4권 25화
제16장 무공의 이유(9)
“나는 추 대인이 가르쳐 주신 무공 덕분에 목숨을 구했어. 내가 살던 마을은 뭐랄까. 살기가 좀 팍팍했거든. 그런 곳에서 짧은 인연만으로 무공을 가르쳐 주셨으니……. 추 대인은 나에게 새로운 삶을 주신 것과 다름없는 은인이야.”
“그러고 보니 추 할아버지는 유준 선배를 데려오지 못한 걸 안타까워 하셨어요.”
“그래? 그때는 몰랐어. 추 대인이 무공만 가르쳐 주고 훌쩍 떠나신 줄 알았거든. 그때 나를 거두어 준 게 왕 대인이야. 내가 소호 너만큼, 아니, 너보다 더 어렸었는데도 내 가치를 인정하고 데려가서 키워 주셨어. 교육을 위해 무산학관 같은 좋은 곳에 넣어 주시기도 하셨지. 나에겐 아버지 같은 분이셔.”
소호는 유준이 왕진을 마주했을 때 사문의 존장을 대하듯 공손했던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유준 선배는 왕 대인을 잘 알고 있었던 거네요.”
“맞아. 게다가 왕 대인은 큰 뜻을 품고 있어. 황태자 전하가 제위에 오르면…… 그야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될 거야.”
“대명제국의 이 인자가 되는 거예요?”
“맞아. 그럼 지금 꿈꾸는 대부분의 일들이 가능해지겠지. 나는 그분이 원하는 걸 행하는 검이 되기로 마음먹었어. 그게 내 천명이야.”
단호한 목소리. 한일자로 굳게 다문 입에선 고집스러운 완강함이 느껴졌다.
소호는 선뜻 공감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으음. 그렇구나.”
불과 이삼 년의 차이가 그렇게나 큰 것일까.
천명을 논하는 유준의 말을 소호는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천명이라……. 하늘이 정해 준 운명. 나의 천명은 그럼 뭘까?’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에 대한 대답은 쉽게 나오질 않았다.
소호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지팡이를 짚어 가며 앞장서던 유준이 사다리를 붙잡으며 멈춰 섰다.
“다 왔어. 올라가자.”
맹인 소년이 능숙하게 사다리를 타는 모습은 다시 봐도 신기하기만 했다.
소호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드문드문 손톱만 한 구멍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지하 비밀 통로.
재미있긴 했으나 가슴에 찝찝한 감정이 남으니 괜히 비밀 통로가 음산해 보였다.
‘화전촌……. 휴우, 진구 삼촌이 그랬어. 실력이 부족할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도 또 하나의 실력이라고. 주해에게 상담을 해야겠다.’
비밀스러운 탐험이 묘한 인연과 함께 끝나 가고 있다고, 적어도 소호는 그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
“왕 공공.”
두 사람이 나간 뒤, 선이라 불리는 소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왕진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요, 선. 내가 집혼기를 내어 준 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나요?”
“네에. 그게…… 그 소년은 아직 저희 사람이 아닌데…….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너무 이르지 않았나 생각해요.”
“후훗, 맞아요. 백이면 백, 내가 성급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 소년이 그렇게 특별한가요?”
“후후훗.”
왕진은 선이 다시 끓여서 내려 준 찻물을 한 모금 입안에 머금으며 빙긋 웃었다. 왕진에겐 오른쪽 손가락이 불과 두 개밖에 남지 않았지만 둘 다 섬섬옥수처럼 하얗고 길게 뻗어 있었다. 긴 손가락이 흑단목 탁자 위를 은어처럼 유영했다.
“세상 모든 일이 어디 계산대로만 흘러가던가요. 그것만으로는 복마전 같은 황실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일이지요. 때로는 온전히 자신의 감을 믿어야 할 때도 있답니다, 선.”
“그런……가요?”
“그래요. 선은 아까 그 소년이 특별하냐고 물었지요?”
왕진은 의자에 몸을 묻으며 나른하게 웃었다.
염세적인 얼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새빨간 입술로 빙긋 웃음 짓는 모습은 똬리를 튼 구렁이처럼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장기린의 유일무이한 적자이자 은자촌 노괴들의 공동전인, 무산학관의 모든 교관들이 눈여겨보고 있는 비할 바 없는 무골(武骨).”
“……!”
“이 이상 특별한 아이가 또 있을까요? 현 무림맹주의 아이가 특별하다지만 소호와 비할 수는 없을 테지요. 심지어 그 아이가 무산학관에 들어오다니.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 주신 선물 같지 않아요?”
진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자. 그러면서 대국을 조종하려는 황실의 이무기.
“장기린이라면. 천하제일 무쌍귀 말인가요? 두 번째 신수였던?”
“맞아요. 그 사람이에요.”
“세상에! 그렇다면 저 소년에게 집혼기를 준 것은……!”
선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왕진의 진짜 계획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그제야 왕진이 소호에게 집혼기를 준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놀라운 일.
만약 성공한다면 모든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위험해요, 왕 공공. 그 마을은 위험하잖아요.”
“물론이지요. 적들은 강해요. 은자촌에서 무쌍귀까지 갈 것도 없이, 일야회주 묵신이나 장강용왕 추묵환 정도만 나서도 저의 목숨을 가져가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일 테지요.”
“그걸 아시면서……!”
선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왕진은 웃음으로 흘려버렸다.
“적이 강할수록 활로는 백척간두의 줄타기에 있는 법이지요. 그리고 걱정할 것 없답니다. 선. 무림 강호에서 항상 최후엔 정파가 승리하지요. 그 이유가 뭔지 아나요?”
“모르……겠어요.”
“명분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의명분이란 그처럼 중요한 것이지요. 그러니 저는 강하기만 한 무림인들이 두렵지 않답니다.”
차갑게 웃고 있는 왕진에게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정말로 목숨을 내놓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일까.
선으로서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진은 뒷짐을 진 채 일어나 걸음을 옮기면서 웃었다.
“나는 확신합니다. 백호방의 작은 호랑이. 저 소년이야말로, 우리의 계획을 앞당겨 줄 열쇠가 될 것이에요.”
***
“괜찮은 곳이네요. 사방신의 이름을 딴 기숙사를 각 방위에 배치하고 기숙사 주변은 학생들이 갖고 싶은 시설들을 경쟁을 통해서 일 년에 한 번씩 설치하게 하고, 중앙에는 사부들이 머무르는 본관과 연무장. 식당도 있고…….”
진휘연은 학부모로서의 관점과 상인으로서의 관점이 뒤섞인 눈으로 무산학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중앙 광장에 있는 상점들은 상권으로서도 훌륭해요. 물론 학관 안에서 파는 거라 이문을 남기는 게 목적은 아니지만……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겠어요. 물건의 종류가 적은 게 단점이긴 하지만요. 물류에 있어서 근처 마을이랑 연결은 잘 하고 있는 건가요? 식당은요? 늘 신선한 식재료를 가져와서 요리하나요?”
“그야 당연하지.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학생들을 위해 돈 쓰는 걸 아끼지 않는다고. 어린놈들이 나름 집안에서 곱게 자란 귀하신 몸이란 말이야.”
“어린놈들이라니. 누가 들으면 청월루 철우파 대장이 말하는 줄 알겠어요.”
“커험! 험!”
친한 사람들 앞에서 과거의 말투가 나와 버린 철우였다.
현재는 무산학관의 학관장이자 무림 강호의 위대한 가면철왕이 투덜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 참, 이건 뭐, 학부모님을 만나는 건지, 높으신 분이 시찰 나와서 보고하는 건지 모르겠구만.”
“어머나, 잊으셨어요? 저는 둘 다예요.”
“젠장, 그렇지. 높으신 분이기도 했지.”
“항주에 있을 때의 저로 생각하면 곤란해요, 학관장님. 무산학관을 지을 때 저희 풍운회의 자금도 들어갔다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네에, 네에. 어련하시겠습니까. 세월무상이라더니. 시간이 너무 빠르구만. 그땐 큰 소리만 나도 놀라던 요조숙녀였는데, 상황이 이렇게나 바뀔 줄이야……. 어이, 객주님. 너는 네 부인이 이렇게 거물이 될 줄 알고 있었어? 그래서 객잔하면서 꼬신 거야?”
철우가 괜스레 만만한 장기린에게 트집을 잡았다.
장기린은 헛웃음을 흘리며 장난을 받아 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전혀 몰랐다.”
“하여튼 될 놈은 된다니까. 뭐랬지? 부모님의 손수건? 그 덕분에 진가장의 재산을 찾았다고 했었나?”
“천운이었지. 게다가 예전에 나와 인연을 맺었던 왕 대인이 도와주기도 했고.”
장기린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사이 갑자기 선두의 걸음이 멈췄다.
샛노란 경장을 입은 여인, 진휘연은 자리에 멈춰 서서 장기린과 철우 두 사람을 지그시 응시했다.
“기숙사에 가서 우리 호아를 얼른 보고 싶긴 한데……. 그 전에 할 일이 있어요.”
“휘연, 할 일이라고?”
“네. 여기 학관 안에 우리 풍운회에 소속된 가게가 하나 들어와 있거든요. 이참에 한번 살펴볼 게 있어서요.”
철우가 당황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잠깐, 풍운전장을 말하는 거지? 살펴본다는 게 뭔가 불안하게 들리는데.”
“찔리는 게 있나요? 돈에는 관심이 없었던 학관장님?”
“으음…….”
“걱정 마세요. 문제가 있다면 도와드릴 테니까. 아무튼, 두 사람도 오랜만에 만났으니 할 말도 많으시죠? 비켜 드릴 테니 천천히 이야기하고 오세요. 이따가 기숙사로 가기 전에만 풍운전장으로 와 주세요.”
성실하게 자기 일을 찾아 하겠다는 이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장기린과 철우는 손을 흔들어 주는 휘연을 뒤로한 채 본관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여자야. 장가 잘 갔구나, 장가(張家)야.”
“……어이가 없군. 무슨 말인가 했더니. 못 본 사이에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파핫! 재밌기만 하구만! 그래서? 장가 잘 간 게 아니라는 거냐?”
장기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파하핫! 애처가 나셨구만. 애처가 나셨어.”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걸어가는 두 사람은 항주에서 객잔에 기거하던 시절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둘 다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시절이다.
돈과 음모가 휘몰아치던 곳에서 나라의 명운이 결정 나던 치열했던 시간들이 아니었던가.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가 좋았어. 파락호 대장으로 사는 것도 꽤나 재밌었거든.”
“그래 보였었다. 그게 천직이었는데. 오히려 지금 학관장으로 사는 모습이 더 어색해 보이는군. 무림맹에 돌아가지 않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파하핫! 모르는 소릴 하는군. 학생 꼬맹이들이 날 무신처럼 숭배한다고.”
“다들 크게 속고 있나 보군.”
장기린이 한숨을 내쉬니 철우가 다시 한 번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만 장기린에겐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사실 내가 여기에 온 건 이유가 있다.”
“소호 때문에 온 게 아니고?”
“물론 소호를 보고 싶어서 온 것이지만, 동시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 중요한 일이야.”
“남궁세가 이야기인가.”
철우는 대번에 알아들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거대 세가의 차기 가주가 암습을 당해 사경을 헤맨다는 것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일이 아닐 터. 더군다나 무림맹의 거물인 철우가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누구 짓이야? 누가 남궁 꼬맹이의 몸에 칼침을 놓은 거야?”
철우가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퉁방울같이 튀어나온 두 눈이 분노로 활활 불타올랐다.
“그런가. 거기까진 몰랐던 거군.”
“……무슨 소리야?”
“내 동생들과 뇌안각이 추적한 결과. 흉수는 맹인에 지팡이를 짚는 소년처럼 보이는 인물이라더군. 그 흉수가 있는 곳이…….”
장기린이 말을 멈추고 제자리에 멈춰 선다. 그랬기에 보지 못했다. 장기린의 말을 들은 철우의 두 눈이 혼란과 당혹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을 말이다.
장기린의 시선은 한 곳에 못 박혀 있었다.
하늘의 뜻을 알고, 자신의 명운을 건 싸움을 이미 모두 끝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더더욱 특별하다.
얼마 전 도철이라는 놈을 만났을 때도 이렇게나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었다.
잘 가꿔진 정원과 자그마한 사자상들 너머, 텅 빈 마구간으로 보이던 곳에서 건초 더미가 흔들리더니 한 사람이 바닥에서 기어 올라왔다.
흰색 의복, 백태가 낀 두 눈. 장님의 상징 같은 지팡이.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손과 발이 길쭉길쭉하여 검사 같은 체형이지만 얼굴에선 소년 특유의 앳된 느낌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따라 올라온 소년이 맹인 소년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을 때, 침착함을 유지하던 장기린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화아아악―.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기세, 막강한 기파가 무산학관 전체를 집어삼킬 듯 넘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