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2화
제17장 부자유친(父子有親)(2)
“……!”
단 하나의 이름이 세 명을 당황시켰다.
철우와 유준의 숨소리가 흐트러졌다. 특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살짝 벌린 유준은 번개라도 맞은 듯한 모양새다.
당연한 일이었다. 왕진과 유준의 관계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는 장기린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장기린이 주목한 건 소호도 같이 당황했다는 점이었다.
‘설마.’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그는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소호도 이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 거냐.”
“어, 그게…….”
소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들었다기보다는 만났는데…….”
“뭐?”
“조금 전에 만났었는데……. 좀 특이하긴 하지만 나름 자기 신념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
장기린은 소호의 입으로 듣는 왕진에 대한 평가에 기가 차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남궁 삼촌을 공격하다니……? 이게 진짜예요, 유준 선배?”
“…….”
“도대체 모르겠어요.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소호는 혼란에 빠진 듯이 보였다. 부축을 하고 있는 모습이 어색했다. 당장이라도 유준이랑 떨어져야 하는 건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니었다. 소호는 왕진을 조금 전에 만났다고 했다.
즉, 왕진은 지금 이곳 무산학관에 있는 것이다.
‘나와 휘연이 무산학관을 방문했을 때 하필 이곳에 왔다? 그리고 내 아들을 만났고?’
우연이다?
아니다. 우연이 거듭되면 필연이듯, 있을 수 없는 일에서 장기린은 누군가의 그림자를 느꼈다.
책략의 냄새. 모략의 향기가 났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끈적끈적한 음모가 존재함을 느꼈다. 오랜 시간 전장에서 단련된 장기린의 감각이 위험 신호를 발하고 있었다. 장기린은 몸에서 힘을 뺐다. 상황이 변했음을 알아차린 철우가 붙잡고 있던 장기린을 놓아주었다.
“소호. 솔직히 말해라. 왕진을 봤다는 건 조금 전에 나온 저 비밀 통로를 통해서 만났다는 건가? 어디에서 만났지?”
“어……. 네. 맞아요. 그, 저 조그마한 사자상들에게서 햇볕이 내리쬐는 지하 통로였는데……. 만난 곳은 아마 위치상으로는 본관 건물쯤?”
장기린은 번뜩이는 시선으로 유준을 노려보았다.
유준은 심정이 복잡한 얼굴이었다.
‘소호는 저놈의 소개로 왕진을 만난 모양이군. 거기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소호에게 할 말이 뭐가 있지?’
장기린은 소호가 왕진에 대해 그리 나쁜 인상을 받지 않은 듯한 게 더욱 마음에 걸렸다.
그는 소호가 가르쳐 준 건초 더미 밑의 비밀 통로에서부터 정원에서 본관 쪽을 향해 놓여 있는 사자상들을 눈으로 좇았다.
사자상들이 끝나는 방향에 본관 건물이 있다. 보나마나 저 안에 비밀 공간이 있고 거기에서 왕진이 소호와 유준을 만났음에 틀림없었다.
상식적으로는 곧바로 비밀 통로를 통해 다시 왕진을 찾으러 쫓아가야 할 상황이었다.
장기린은 고민했다.
곧바로 건초 더미 아래로 뛰어들어야 할 것인가?
그런데 왠지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아냐, 틀려. 저긴 아니다.’
장기린은 자신의 감각을 믿기로 마음먹었다.
치열한 전장에서 항상 그를 살려 준 예민한 본능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그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지금 그가 가야 할 곳은 다른 곳이라고.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라고 말이다.
‘만약 왕진이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래서 소호를 만난 것이라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할까. 곧바로 빠져나가지 않을까?’
“철우. 여기서 가장 가까운 출구는 어디지?”
“출구 말인가? 여기서 가까운 쪽이라면 본관 뒤편에 뒷길로 내려가는 후문이 더 가까운데.”
“그쪽으로도 비밀 통로가 있나?”
“으음, 그건 분명…….”
철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며 답해 주었다.
“그래, 있다. 분명, 통로를 빠져나가면 후문 밖의 아랫마을로 나가게 될 것이야. 그 환관도……. 분명 그 통로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가. 그럼 조금 이따가 다시 와서 마저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동안…… 내 아들과 저 녀석을 잘 데리고 있어 줘.”
장기린은 엄중한 눈빛으로 철우를 응시했다.
철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제기랄, 이게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원, 둘 다 잘 데리고 있을게.”
“부탁한다.”
장기린은 마지막으로 소호와, 소호가 부축하고 있는 소년을 쳐다봤다.
부자간에 교차하는 시선에 서로 많은 의미가 오고 갔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지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다시 오겠다.”
장기린은 몸을 돌렸다.
상념은 접어두었다. 지금 당장 급한 일은 따로 있지 않던가. 왕진이 향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무산학관의 아랫마을에 가 보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 번 발을 떼자 그의 몸은 무산학관의 후문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왕진. 드디어 얼굴을 보겠군.’
분노와 살기가 뒤섞인 무서운 기세가 무산학관을 가로질렀다.
***
무산학관 본관에서 후문, 그리고 후문에서 마을까지 가는데 불과 반각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장기린은 진주 주렴으로 가려진 황금색 가마가 마을의 중심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순간, 자신의 직감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누구냐!”
장기린이 시야에 보일 때부터 눈에 띄게 긴장하던 가마꾼과 호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숫자는 스무 명.
검을 뽑지는 않았으나, 일제히 움직여 장기린과 가마 사이에 삼열횡진을 형성하는 모습이 잘 훈련된 군인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일열은 검, 이열은 창, 삼열은 활을 갖고 있다.
움직이는 행동에 절도가 있었다. 형형하게 빛나는 서른 쌍의 눈이 장기린을 노려봤다.
‘긴장하고 있군.’
호위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이 특히 눈에 띄었다.
검은색 비단 무복에 가슴에 작게 새겨진 황금색 용문(龍文), 황실을 수호하는 금의위일 것이다. 허리춤 검 손잡이에 손을 얹은 자세, 품(品) 자를 형성해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주는 모습은 그들이 초짜가 아님을 보여 준다.
특히 가장 앞에 선 사내의 무공 수위가 꽤나 준수했다.
금의위 관복이 그림으로 그린 듯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짙은 눈썹, 고집스러운 입매가 그의 성격을 드러냈다.
“대명제국 황실의 행차시다. 다가오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들의 호흡은 거칠어져 있었다.
그들이 호위하는 대상으로부터 미리 뭔가를 들은 것일까. 아니면 나타난 장기린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흩뿌리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상대는 ‘죽음’을 대비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긴장되었던 공기는 장기린이 한 발을 더 내밀자 순식간에 폭발하며 전장의 공기를 가져다 주었다.
금의위와 그 휘하의 병졸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스릉―.
“대인을 보호하라!”
창날이 번뜩이고, 활대에 화살이 매겨진다. 햇빛에 반사된 검광들이 사방에서 꽃처럼 피어올랐다.
“신분을 밝혀라! 밝히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딱히 위협이 무서워서는 아니지만, 장기린은 그제야 멈춰선 채 가마를 바라보았다.
그가 대화를 나눠야 할 사람은 금의위가 아니었다.
주렴이 걷히며 한 사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서서히 드러나는 얼굴은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녹색 비단 관복과 검은색 관모를 정갈하게 갖춰 입고, 얼굴엔 분칠을 하였다. 피처럼 붉은 입술, 대부분 잘려 나가 몇 개 남지 않은 손가락이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하늘을 찌르는 듯한 그 기상. 당신이 무쌍귀로군요? 이것 참, 기대보다 빠르군요. 생각을 바꿔야 하겠어요.”
마치 여인처럼 맑고 영롱한 목소리에 기묘함을 느끼길 잠시, 환관 사내가 장기린을 향해 염기 가득한 미소를 짓는다.
그는 정중하게 손을 모아 포권을 취하며 공손하게 예를 보였다.
“반갑습니다. 대명제국의 정명정대한 후계자이신 주기진 태자 전하를 보필하는 자. 사례감을 맡고 있는 환관 왕진이라 합니다.”
장기린은 솔직히 인정하기로 했다.
놀라운 자였다.
무공에 완전 문외한은 아닌 듯하지만, 무인이라 부르기엔 일천한 실력이었다.
그저 호흡을 도와주는 양생술 정도만 익힌 듯한데, 어찌하여 무지막지한 기세를 내뿜는 장기린을 똑바로 마주하면서 떨지 않을 수 있는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운화가 그랬었지. 환관 왕진은 간웅인지 신념이 있는 악인인지 속을 알 수 없는 자라고.’
그 말만큼 어려운 표현도 없지만, 또 한편으로는 직접 만나 보니 충분히 이해가 되는 탁월한 분석이었다.
지금의 모습만 보아도 신기하지 않은가.
자기가 한 짓을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 거기다 그를 향해 포권을 취하면서 인사까지 하다니. 범상치 않은 그릇이었다.
‘돌이켜 보면 가족을 제외하고 나를 편하게 대한 건 몇 명밖에 없었지. 대령숙수 용화성 대인이라든가, 무공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 일가를 이룬 실력자들.’
그런데 왕진이 그 정도 능력을 보여 준 것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말투 또한 선명하고 정갈한 북경식 한어(漢語)를 구사했다.
“대답이 없으시군요. 무쌍귀 장기린. 맞으시지요?”
“그렇다.”
장기린의 대답에 웅성거리며 반응한 것은 왕진이 아니었다.
금의위를 포함한 호위병사들.
그리고 어느새 주변에 몰려들어 있던 마을 사람들, 거지와 호사가들이 수군거리며 삼삼오오 떠들어 댔다.
“무쌍귀래. 무쌍귀. 그 구국의 영웅!”
“무림오존이랑 같이 일컬어지는 고수라지 않았나? 어째서 이곳에?”
“무쌍귀가 황실 태감을 만나다니. 희한한 일이구만. 신기한 일이야.”
어느새 떠들어 가며 이야기를 거듭해 나간다.
그리고 그제야 장기린은 느꼈다.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그래서 장 대인. 이 미천한 자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실까요?”
왕진은 마치 영문도 모르겠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흑색섭선을 펼치고 부채질을 했다.
잘 짜인 경극 같은 모양새였다.
왕진과의 사이에 펼쳐진 금의위 인의 장막.
그 위에서 제갈무후처럼 웃고 있는 황태자를 보필하는 환관.
장기린은 부아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웃고 있는가.
그런 짓을 해 놓고, 내 아들을 장난질에 끌어들여 놓고서?
“웃음이 나오는가.”
분노한 장기린.
무시무시한 기파를 뿜어내며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