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03화 (232/686)

5권 3화

제17장 부자유친(父子有親)(3)

“감히, 그런 짓을 해 놓고.”

고오오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 기운이 정면에 있는 삼십여 명의 호위를 한순간에 압도했다.

한낱 인간의 몸에 어찌 그런 기운들이 감춰져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처음부터 무시무시했다?

아니다. 장기린은 최대한 절제하고 있었다.

마침내 감춰 뒀던 힘이 표출되자 누군가는 겁에 질려 손을 떨고, 누군가는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뿜어지는 기파, 호랑이 같은 살기가 정면의 호위들을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도록 짓눌렀다.

쒜에에엑―!

그래도 장기린의 움직임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맨 앞에서 경계하고 있던 금의위 위사였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이 끊어지는 순간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공격이었다. 순간적인 발검(拔劍), 상단에서 쏘아지는 찌르기가 군더더기 없이 깨끗했다.

따앙!

“……!”

장기린이 손바닥을 휘둘러 검을 쳐 내자, 뒤쪽에 품(品)자 대형으로 서 있던 나머지 금의위 두 사람도 바람처럼 튀어나오며 똑같은 찌르기를 선보였다.

제법 빠른 속도.

장기린은 공격의 박자가 엇나가게 오히려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검을 옆으로 지나가도록 보내고, 금의위 두 사람의 손목을 붙잡아 아래로 내렸다가 창을 내지르듯 힘을 줘서 뒤로 밀었다.

우둑―

“헛!”

“컥.”

짧은 단말마와 함께 두 명의 금의위가 손목을 붙잡고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그나마 검을 놓치지 않은 것을 칭찬해 줘야 할 판국이었다.

장기린의 움직임은 태극권 같기도 했고, 동네 저잣거리에서도 배울 수 있는 호신술 같기도 했다.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시의적절하게 한 박자 빠르게 전개된 초식은 절세신공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했다.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금의위 세 사람이 기습했으나 단 한 수에 제압당했다.

무공이랄 것도 없었다. 주변 군웅들의 눈에는 금의위들이 공격하자마자 튕겨져 나와 비척비척 물러나는 모습만 보였을 뿐이었다. 사방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과연 무쌍귀라느니, 인간 같지 않다는 소리가 수군거리며 들려왔다.

“환관 왕진.”

장기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기회다. 당장 그 같잖은 가마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어라.”

숨 막히는 침묵이 감돌았다.

금의위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모습이 보였다.

백번 양보해서 생각해도 한낱 무인이 황태자를 보좌하는 황실 사례감 태감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장기린이 당당하게 나오니 그 말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더욱 재밌는 사실은, 환관 왕진이 그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 주었다는 점이다.

“마지막 기회를 주다니. 고맙지만 그럴 수는 없겠군요. 이 사람은 황태자 전하를 모시는 몸인지라 다른 사람에게 그 정도 예를 표할 수가 없답니다.”

섭선을 살랑거리며 말하는 왕진에게서는 웃음기마저 느껴졌다.

“그런가.”

장기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그럼 끌어내려 주마.”

곧바로 정면으로 치고 들어갔다.

“막앗!”

금의위 위사가 경호성을 내질렀으나 그 말은 한발 늦은 감이 있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호위 병사들이 이미 공격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채채챙! 퍼억!

“으아악!”

서른 명의 병사들을 향해 달려드는 장기린은 마치 양떼 속에서 날뛰는 호랑이 같았다.

맨손으로 검을 부수고, 갑옷의 뒷덜미를 붙잡아 옆으로 던져 버린다.

막강한 능력을 지녔으나 싸우는 모습은 야수처럼 격식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창병의 창을 한 자루 빼앗긴 뒤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가볍게 내뻗는 일격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금의위 세 명이 합공하여 겨우 한 번을 막아냈을 뿐, 이어지는 적룡일연무 일 초식에 검이 부서지며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서른 명의 호위들이 바닥에 드러눕는 데 걸린 시간은 촌각에 불과했다.

“무섭군요. 이게 무쌍귀인가요.”

그 와중에 환관 왕진은 태연자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마를 메고 있던 가마꾼들이 벌벌 떨어 가마가 흔들리자, 왕진은 손짓을 해 땅 위에 내려섰다.

마침내 그의 앞에 마주 선 장기린.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를 보며 왕진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명천하에서 황실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어울려 살 수 없는 외도(外道)이며, 뭇 군웅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니 이는 오롯이 자신의 길을 가는 패도(覇道). 외도와 패도가 만났으니, 이는 구국의 영웅을 일컫는 별호에 어째서 귀(鬼)자가 들어가는지 충분히 설명이 될지어다. 이 또한 훗날 황실에 대한 지대한 위협이 될 테지요.”

“내가 황실에 지대한 위협이다?”

“물론. 그대와 그대의 주변에 모여 있는 모두가 황실의 안녕에 위배되는 자들.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지대한 위협이랍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왕진의 두 눈동자가 신념으로 빛났다.

“그런가. 그게 네 생각인가.”

“당신의 부인, 당신의 형제 그리고 당신의 자녀. 모두 위험합니다. 제거하든가, 적합한 조치를 취해야 할 테죠?”

뒷짐을 진 채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왕진은 무언가를 초월한 사람 같았다. 분칠한 얼굴, 깨끗하게 가다듬은 용모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보이지 않는다.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일부러 장기린을 자극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장기린은 그런 왕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론을 내렸다.

“무릎을 꿇어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기린은 왕진의 멱살을 잡아끌면서 그의 발목을 걷어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왕진이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큭!”

왕진이 신음을 흘리며 장기린을 올려다보았다.

모욕적이다?

아니, 이것도 부족하다.

드러난 증거는 없으나, 왕진은 대천문이라는 곳을 만들어 은자촌을 위협했고, 남궁휴를 죽일 뻔했으며, 또한 소호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그중 하나만 행했어도 장기린으로서는 목을 치고 싶은 대죄이건만.

“그 배포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내가 목숨을 빼앗지 않을 거라 안이하게 생각했다면, 그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려 했다.”

장기린은 섭주해나 현백처럼 지략이 뛰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그 사람의 진심만큼은 꿰뚫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군. 환관 왕진. 너는 나에게 죽기를 바라고 있었어.”

두려움을 모르는 눈빛, 심중을 자극하는 언사.

그 모습은 장기린에게 익숙한 모습이었다.

과거 전장에서 많이 봤었다. 본인의 목숨을 희생하여 뭔가를 이루고자 하였던 병사들.

숭고한 목적을 수행한다 진심으로 믿고 미끼를 자처했던 안타까운 목숨들이었다.

“증인은 충분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구경하고 있는 군웅들이 보였다.

농사짓는 백성들, 잠시 장사를 하려 마을에 온 행상들, 무산학관에 볼일이 있는 무림인들까지, 온갖 종류의 인물들이 모여 있다. 저들 모두의 입을 막는 일은 요원할 것이다.

왕진은 그런 계산을 한 게 분명했다.

“궁금한 것은 이유다. 어찌하여 이런 일을 벌였나. 나에게 잡힐 것을 알면서.”

“후후훗.”

왕진은 무릎을 꿇은 채로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했다.

“무릎을 꿇리다니.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이런 행패를 부리나요?”

장기린은 짧게 대답했다.

“자이혼.”

“후후훗.”

왕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 일은 참 계획대로 되질 않아요. 살수들이 일처리만 잘했어도 되었을 일인데.”

“원래 완벽한 일은 없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 몽고인은 잘 살아 있나요? 불구대천의 원수일 텐데 곧바로 죽이지 그랬나요.”

“그 녀석도 불쌍한 인생이라.”

장기린은 솔직하게 말한 것이었으나 왕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훗. 원수에게 동정을 받다니. 자이혼 그 사람도 안됐네요.”

“우리가 잡담을 할 사이는 아닐 텐데. 본론만을 말하라.”

“어째서 아닌가요. 친해져 봐요, 우리.”

황실의 태감이나 되는 위치면서 사람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에 대해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장기린은 기묘함을 느꼈다.

왕진의 머리는 비상하나, 성정이 어딘가 비틀려 있음을 느꼈다. 목숨을 도외시하며 계속해서 웃는 자. 이상하다. 이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후후후훗, 재밌네요. 내가 여기까지 나온 것은 순전히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랍니다. 말로만 듣던 무쌍귀를 직접 보고, 판단을 내리고 싶었어요.”

왕진이 극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양손을 뻗었다.

“패도를 걷던 영락제가 진심으로 아끼던 무장! 구국의 영웅이자 무림강호의 치부 같은 존재! 지닌바 무력은 무쌍이나 평범하게 살고 싶은 자! 후후훗, 딱히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 흥미롭네요. 정말로 친해지고 싶어요. 아! 대천문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어요. 그저 필요했기에 잠시 만들었던 것뿐이랍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별 생각 없이 몇 년이나 들여 은자촌에 은원이 있는 자들을 전부 모았다고?”

“그래서 그자들은 다들 어떻게 되었나요? 전부…… 아니지, 대부분 사라졌죠?”

왕진이 새빨간 입술을 끌어올려 깊고 진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오히려 내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원수들을 모아서 죽여 줬는데?”

“너는…… 이상하군.”

“후후후훗, 그 말을 무쌍귀에게 듣다니 영광이군요. 나도 말하지요. 당신은 이상해요. 어쩌면 우리 둘은 닮았는지도 모르겠네요. 둘 다 이상하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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