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04화 (233/686)

5권 4화

제17장 부자유친(父子有親)(4)

왕진은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장기린은 그걸 만류하지 않았다. 잡고 있던 멱살도 놓았다.

왕진은 무릎을 꿇고 있는 것에 자존심 상해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런 모양새뿐인 사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말해 두죠. 나는 은자촌에 딱히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에요. 아! 은원이 하나 있기는 한데, 별로 거기에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답니다.”

“은원이 있다고?”

“제 손가락이 꽤 예쁘죠? 길고 하얗고. 후훗, 시간이 나면 그 마을에 계신 장강용왕님한테 물어보도록 해요. 내 예쁜 손가락이 왜 몇 개 없는지.”

장기린은 진심으로 놀랐다.

왕진이 대천문을 이용해 뭔가를 하려고 한다고만 생각했을 뿐, 왕진 자신도 은원이 있다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긴, 그러니 대천문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겠지.’

똑같이 원한이 있기에 함께 행동한다. 이해하기 쉬운 이유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내 부모님이 용왕님과 은원이 있어서요. 은원의 시작을 따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죠. 무의미한 일이랍니다. 후후, 난 그런 재미없는 일은 좋아하지 않아요. 그보다 큰 걸 봐야죠.”

“의외로 관대하군. 그래서? 큰 걸 보기 때문에 오늘은 목숨을 건 건가?”

“비꼴 줄도 아는군요. 재밌네요. 그럼 이렇게 말해 볼까요? 나는 오늘 당신을 만나서 손해 볼 일이 없었답니다. 이해가 되나요?”

“…….”

“혹시 오늘 죽으면? 태자 전하께서 저에게 꽤나 의지하고 계시니 분노하실 테고, 당신은 잘되면 역모, 잘 안 풀려도 대명제국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겠지요. 그건 그거대로 제가 바라던 대의에 도움이 되니 괜찮았답니다. 무림인에 대한 위기의식이 전혀 없는 저 윗분들도 그제야 뭘 좀 느낄 테죠. 죽지 않으면? 좋은 일이죠. 저는 잃은 것 없이 무쌍귀라는 걸출한 인물을 직접 보게 되는 것이니까요.”

어느 쪽이든 남는 장사라며 왕진은 크게 웃었다.

장기린과 왕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친다.

장기린은 왕진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섬뜩했다. 자신의 목숨을 판돈으로 걸었음에도 오히려 남는 장사라며 웃을 수 있다니.

‘이 녀석, 위험하다.’

장기린은 왕진에게서 위험함을 느꼈다.

위험한 성정, 비상한 능력.

분칠한 얼굴 너머에 숨어 있는 비범한 광기가 느껴졌다.

자연스레 옆에 떨어져 있는 창으로 시선이 향했다. 왕진을 이곳에서 죽여야 할 것인가. 미래를 위해 어느 쪽이 올바른 선택일지 장기린은 고민했다.

“날 죽일까 고민하나요?”

“글쎄. 어쩔까.”

“후훗, 당신은 날 안 죽일 거예요. 직접 보니 난 알 수 있어요.”

“잘못 생각한 것 같은데.”

장기린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맹수가 으르렁대는 듯 살기가 넘실거렸다.

“당신은 원칙주의자예요. 그것도 꽤나 고결하고 완고한 사람이군요. 주변의 조언도 잘 듣는 편이고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군.”

“후훗, 은자촌에 대해서 내게 필요하던 일은 대부분 끝났어요. 이제 딱히 당신과 그쪽 마을을 건드릴 일은 없을 거랍니다. 나도 굳이 원한을 늘려서 일에 방해받고 싶지 않아요. 남궁세가 쪽은……. 으음, 그건 실수였다고 해 두죠. 그냥 실력을 알아보라는 것이었는데……. 저의 검이 생각보다 날카롭더군요.”

“유준이라는 아이 말인가.”

“만나 봤나요? 특별한 아이죠?”

“피 냄새가 짙던데.”

“그랬나요?”

장기린은 빙글거리며 웃는 왕진을 보며 분노를 느꼈다.

“그 나이에 그 정도 살기. 얼마나 살행을 시킨 거지?”

“뭐 그래도, 북로전쟁의 붉은 악귀만큼은 아니겠죠?”

장기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꾸 나를 재촉하는군.”

“후훗, 미안해요. 재미있어서. 무림인이라는 게 나이랑 상관없이 칼끝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 아니던가요? 어차피 온갖 곳을 떠돌며 죽고 죽이는 자들. 그게 문제가 되는 건지 잘 모르겠군요.”

“……무림인을 싫어하는 것 같군.”

”싫어합니다. 그리고 유준은 나도 아끼는 아이랍니다. 먼 미래에도 함께하고 싶네요. 대답이 되었나요? 한 가지 더 말해 두자면 남궁세가에는 상응하는 보답을 보냈어요. 남궁가의 후계자는…… 지금쯤 이미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거예요.”

“…….”

놀라운 이야기였다. 장기린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침묵에 잠겼다.

“어때요? 저를 살려 줄 준비가 되었나요?”

“아직, 한 가지 남았다.”

“무엇이죠?”

“신수는 어떻게 되었지?”

왕진이 촤르륵― 섭선을 펼치고 웃었다.

“후훗, 황실을 떠난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자이혼이 그러더군. 네가 대천문에도 신수가 둘이나 있다고 했다고. 게다가 내가 만났던…… 자기를 사흉의 짐승이라 부르던 놈은 의견이 다른 것 같던데.”

“실패작이라 그래요. 차차 개선될 테죠.”

“실패작이라고……?”

“아! 미리 말해 두겠는데, 무쌍귀 당신 때와 같은 혈겁은 벌이지 않았어요. 폐하의 재가도 얻었죠. 당신이라면 나중에 진짜인지 알아볼 수도 있겠죠? 어디까지나 정당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답니다.”

“…….”

“어때요? 저를 죽일 건가요?”

장기린은 바닥에서 창을 들어 올렸다.

왕진은 섭선으로 얼굴의 반쪽을 가린 채 눈꼬리를 휘며 웃고 있었다. 그 뻔뻔한 웃음을 보니 창을 잡은 손에 자연히 힘이 들어갔다.

장기린은 무산학관에 도착하기 전에 만났던 부운화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대형, 왕진은…… 기이한 자입니다. 간웅일지, 신념이 있는 악인일지. 훗날 역사가 판가름할 테지요. 은자촌을 건드렸다는 것에 분노했었습니다만, 그자에 대해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심상치가 않습니다. 뭔가 따로 노리는 바가 있는 것 같아요.”

“따로 노리는 바가 있다고?”

“예. 나라를 뒤흔들 만큼 큰일 같습니다. 제가 알아내서 반드시 막을 테니, 혹여 만나더라도 죽이진 말아 주십시오. 황태자의 총애를 받는 자입니다. 대놓고 죽이기엔……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좀 더 알아볼 것을 권유하던 부운화였다.

구구절절 맞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장기린은 갈등을 느꼈다.

‘운화, 이런 건 처음이다. 네 말이 틀릴 수도 있겠다고 느껴져. 이놈을 정말 살려 둬도 될까?’

텐차이, 하시르, 우르칸.

반야혼, 항주에서 암약하던 객잔의 주인들, 강호관직론에 몰려들었던 사파의 무인들과 온갖 파락호들까지.

그동안 만났던 장기린의 대적들 중 특이하지 않은 자가 없었지만, 이렇게 보기만 해도 심혼이 불쾌해지는 듯한 상대는 없었다.

‘일격, 단 일 격이면 되지만…….’

하지만 그 일격은 십 년이 넘게 지켜오던 불살(不殺)의 맹세를 깨고, 휘연, 소호, 형제들, 그리고 은자촌의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격이었다.

창이 무겁게 느껴졌다.

전장이 그리운 건 처음이었다.

적과 아군이 명확한 전장에서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으득―.

장기린은 이를 악물면서 창을 땅에 내던졌다.

마음속 미망과 미련을 한 번에 털어버렸다.

“후후훗.”

왕진은 웃음을 흘렸다.

장기린은 마치 자기가 했던 말이 맞지 않냐고 되묻는 듯한 그 얼굴에 주먹을 날려 주고 싶었다.

“경고하겠다. 나와 내 가족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 그들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때는 네가 어디에 숨든 지금과 다른 모습의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명심하죠. 그리고 약조합니다. 난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어요.”

“지켜보겠다.”

장기린은 왕진에게 등을 돌린 뒤, 무산학관으로 돌아올 때까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기분이 나쁜 승리다.

상대방을 무릎 꿇렸으나 처음으로 패배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

소호는 어색한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들어와 본 무산학관 학관장의 집무실은 화려하지 않고 단출하면서도 그 인상이 강렬한 곳이었다. 살짝 어두운 목재를 이용해 만든 공간에 탁자와 의자밖에 없는 살풍경한 모습이었는데,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벽면에 사람 몸통만 한 초패왕 가면이 걸려 있는 게 문제였다. 경극에서나 볼 법한 초패왕의 가면이 집무실에는 두 개나 있는 것이다.

벽에는 거대한 철가면.

눈앞에는 가면을 쓴 거대한 사람.

그 둘이 나란히 있는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학관장님은 언제부터 가면을 썼을까? 어렸을 때부터 썼을까?’

철우가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부터 가면을 썼다면 어떨지 잠시 생각하며 웃을 뻔한 소호지만, 눈앞에서 팔짱을 낀 채 마주 앉아 있는 당사자를 보니 웃을 수가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유준이 옆방에서 의원에게 진료를 받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소호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음, 저기…… 학관장님, 질문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물어보렴,”

“학관장님은 아버지를 원래 알고 계셨어요?”

“……그래. 그 이야기를 해야겠군.”

철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한숨을 푹 내쉬는가 싶더니 기분을 전환하듯 목을 이리저리 꺾기 시작했다. 우두둑― 우두둑― 뼈가 풀리는 소리가 나고, 철우에게서 느껴지던 분위기가 바뀌었다.

“거 참,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막상 이야기를 하려니 막막하네. 그래. 이건 네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다.”

“네? 제가 태어나기 전에요?”

“그래. 네 아버지가 네 어머니를 만날 때쯤 나를 만났는데.”

철우는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는 객잔 주인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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