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06화 (235/686)

5권 6화

제17장 부자유친(父子有親)(6)

시간이 멈춘 듯했다.

‘으아아……!’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서서히 다가오는 동안 소호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굳어 있었다. 잘못을 하다가 걸린 것 같은 부끄러움이 소호를 덮쳤다. 그리고 원망스러웠다. 한창 재밌었는데, 왜 하필 본인이 지금 나타난단 말인가.

“파하핫! 들켜 버렸나!”

그에 반해 철우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거물은 거물이었다.

학관장실의 문을 열고 조용히 나타난 사내는 하얀 무명옷을 입고 꽤나 긴 머리를 뒤에서 질끈 묶고 있었다. 코와 입술 근처에 적당히 난 수염과 오른쪽 귀가 없다는 사실이 유난히 눈에 띈다.

철우가 자랑하던 과거의 주인공, 장기린이 나타난 것이다.

“도대체 옛날이야기는 왜 하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나잇값을 못해도 유분수지.”

“……거 쪼잔하게! 옛날이야기 좀 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얼마나 재밌어?”

“재밌긴. 전혀 재미있지 않다.”

“파하핫! 뭘 그러나. 난 때때로 항주 때가 그립기도 하고 그렇던데.”

장기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가. 과거가 그립다는 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겠지.”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있군. 나이는 나만 먹었나? 시간은 공평한 거다. 너도 나이가 꽤 들었어. 풍운객주.”

“뭐?”

장기린은 오랜만에 듣는 호칭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객주라……. 오랜만이군. 소호에게 들은 건가?”

“그래. 아직도 객잔 일을 하고 있다면서?”

“뭐, 그렇게 되었다.”

“난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게 생고생을 해 놓고. 아니, 하긴. 그러고 보면 예전에 항주 때부터 그렇긴 했지. 마치 이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처럼 절박하게 굴곤 했어. 그때 이야기를 해 보자면 분명히 너는……”

“그만해라. 덩치랑 안 어울리게 너는 의외로 말이 많군.”

장기린은 질린다는 듯이 손을 내저어 철우의 말을 끊었다. 소호를 보며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장소호.”

“네. 아버지.”

“난 내 이름이 부끄러워서 안 말해 준 게 아니다.”

“……네에?”

“철우 저 인간이랑은 싸운 적도 없어. 처음에 운찬 대신 한 대 맞아 준 거지. 그뿐이다.”

소호는 동그란 두 눈을 끔뻑거리며 놀란 듯이 장기린을 쳐다봤다.

장기린은 어째선지 뒷짐을 진 채 아무것도 없는 집무실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호가 장기린과 함께 살아온 십이 년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시선을 돌리는 행동은 분명히 쑥스러워하고 있을 때의 아버지의 반응이었다.

‘뭐야! 이름 이야기는 진짜였구나!’

아버지의 비밀을 하나 알게 되니, 방금까지 있었던 어색함과 불편함이 싹 다 날아가 버렸다.

“파하하하핫!”

한편, 철우는 살면서 이렇게나 웃은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끝부분만 들은 줄 알았더니. 아주 전부 다 엿듣고 있었구나! 이런 이망 같은 녀석. 무쌍귀라는 별호가 울겠다. 아주 통곡을 하겠어!”

“이망……? 아니, 그 이망 말인가!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또 꺼내는 거냐.”

“파하하핫! 그래도 기억은 하나 보구만? 역용술을 기가 막히게 잘 쓰던 변태 녀석. 낭화 곁에 숨어서 오 년, 아니 육 년이던가? 몰래 지켜만 보던 음흉한 녀석 말이다. 결국에 낭화를 인질로 잡고 버티던 그놈을 네가 쓰러뜨렸잖냐.”

“알고 있으니 그만 말해라. 그리고 그런 녀석과 비교하지 마라.”

“파하하하핫! 음흉하니 음흉하다고 하는 거다.”

“그런 이름을 떠올리다니. 너도 대단하다. 도대체 언제가 돼야 그 시절 항주 얘기를 그만 할 거냐.”

철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쩔 수 있나. 그때가 제일 자유롭고 재밌었는데!”

“그럼 지금이라도 청월루로 돌아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가면 뭐가 남아 있더냐. 내가 모시던 총관님은 무림맹에서도 은퇴했고, 네가 있던 사고뭉치 풍운객잔도 없을 거고. 과거는 과거라서 아름다운 것이다. 그저 지금처럼 추억하면서 좋아하면 그만.”

철우가 계속 박장대소를 하니 장기린도 결국 피식 웃으면서 항복하고 말았다.

“그만 좀 웃어라. 아무리 잘난 놈이라도 자식 앞에선 쪼잔하고 소인배가 되는 법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파하핫, 맞다. 맞는 말이다. 나도 자식 놈 앞에서는 참 못난 아비가 되더군. 아! 그건 알고 있냐, 객주 놈아. 내 아들도 네 아들이랑 같은 기숙사에 있다. 일 년 선배야.”

“그래? 그럼 소호랑도 만나 봤겠군?”

“당연히 그렇겠지? 어땠냐, 꼬맹아. 철웅이란 놈은 쓸 만해 보이더냐?”

소호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솔직하게 말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다.

“네. 굉장히 열심히 하는 선배라서 도움이 많이 되어요. 조언도 많이 해 주고요.”

“그런가. 그런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장기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시선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철웅의 아버지, 철우에게로 향했다.

“그럴 것 같지 않은데.”

“말이 심한 녀석이군. 날 닮았으면 열심히 하는 게 당연하다.”

“전혀. 너는 항주에 있을 때 잠만 자다가, 가끔 일어나면 누굴 때리고, 술 먹고 자다가 또 일어나서 누굴 때리는 일밖에 안 하지 않았나?”

“말도 안 되는 소리!”

장기린은 적절한 반격의 순간을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청월루에서 그것밖에 안 하면서 그나마도 질려서 매번 풍운객잔으로 놀러 오곤 했잖냐. 할 일이 없어서.”

“너야말로 생각이 항주에서 벗어나질 않는구나! 도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냐.”

“그저 네 아들이 너와 안 닮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파핫! 누가 할 소릴!”

철우는 비웃으며 소호를 가리켰다.

“널 닮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지. 널 닮았으면 이 아이가 이렇게 명랑하고 눈이 반짝거릴 수 있겠다고 생각하냐.”

“‘음? 그런가?”

장기린은 소호를 응시했다.

“난 나랑 많이 닮았다고 늘 생각하는데.”

소호는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참느라 입가를 씰룩거렸다.

“파하핫! 그렇다면 큰일이군. 무산학관에도 풍운이 몰아치겠어. 네놈을 닮았다면 이곳도 평안하긴 글렀구만. 갑자기 말도 안 되게 몽고 놈들이 쳐들어오고 그런 거 아니냐?”

“쓸데없는 소릴.”

장기린과 철우가 실없는 이야기로 옥신각신했다. 도대체 가면을 왜 쓰냐는 이야기부터 낭화는 어떻게 되었냐는 이야기까지 주제가 널뛰었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소호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은자촌에 살면서 소호는 장기린의 지인들을 많이 봐 왔지만, 대부분이 의형제를 맺은 동생들이었다. 존경을 받고, 믿음직스럽게 도와주는 그런 관계만 봐 오다가 철우를 보니 뭔가가 달랐다. 두 사람은 대등한 위치에서 아웅다웅했다.

‘그런 사람이 또 누가 있더라. 아, 한 명 있다. 어릴 때 봤던 현백 삼촌.’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무슨 나무가 벼락을 맞았을 때 태어났다 하여 붙은 이름이 현백이라면서 늘 이름의 어원을 말해 주던 특이했던 삼촌, 소호는 그 사람 말고는 장기린의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친구가 별로 없네……”

무심코 입 밖으로 나온 중얼거림이 장기린과 철우의 대화를 멈춰 놓았다.

“무슨 소릴…….”

천하의 장기린의 말문이 막혔다. 어두운 갈색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정처 없이 흔들린다.

“파하하하핫!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이런 특이한 놈이 나 말고 친구랄 만한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래? 소호야. 그게 사실이냐? 나 말고도 친구 같은 녀석이 또 누가 있느냐?”

“어…… 음……. 현백 삼촌?”

“한 명이 있군. 그리고?”

“…….”

소호는 솔직한 아이였다. 그 이상을 떠올릴 수 없으니 대답을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파하하핫!”

또다시 박장대소를 하는 철우의 옆에서 장기린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 좀 웃어라. 평생 웃을 웃음을 여기서 다 쓰려는 거냐.”

“파하하핫! 기분이다! 어차피 가면 쓰고 있을 땐 웃지도 못하는데. 까짓 거 다 쓰도록 하지!”

“됐다. 내가 말을 말자.”

장기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보다 슬슬 진지한 이야기를 하지.”

“파하핫! 주제를 돌리려는 거냐!”

“아냐, 휘연이 기다릴까 봐 그런다. 슬슬 기숙사를 보러 가 봐야지.”

철우는 휘연까지 놀리지는 않았다. 서서히 들떴던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얼굴로 장기린과 마주 앉았다. 물론 입꼬리는 아직도 올라간 채였다.

“우리한테 해 줄 이야기가 있지 않나? 아까 이야기했던 왕진이라는 자에 대해서다.”

“흐음, 지금 이야기해도 되는 거냐?”

철우의 시선이 소호에게 닿았다.

“소호도 이제 마냥 어린아이는 아니다. 게다가 이미 사건에 엮였으니 사실을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어.”

“그런가. 하긴 나도 십이 세 때는 바위를 내던지며 산적들과 싸우곤 했지.”

철우는 듣는 이가 귀를 의심할 만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잠시 떠올리며 납득했다.

“왕진은……. 말하자면 이 무산학관을 설립할 수 있도록 나서 준 사람이다. 여기 무산학관 부지를 마련하는 일부터, 소림이랑 무당의 무공을 지원받은 것, 거기에 나를 무림맹에서 무산학관으로 데려온 것도 그자였으니까.”

“왕진이 너를?”

장기린은 진심으로 놀란 듯 보였다.

“무림맹주님…… 아니, 이제 전대 무림맹주님이시지. 그분이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하던 때였는데, 떠나시면서 구양세가 가주님을 다음 무림맹주로 추대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그런데 그분도 자리를 거절해 버린 거야. 그러면서 구양세가 가주가 추천한 무림맹주가 누군지 아나?”

“누구지?”

“백연.”

“……!”

“이제는 구파일방과 다른 세가들이 화합을 해야 한다면서 구파와 세가의 연결점이 될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하더라고. 사실 맞는 말이긴 하지. 구파 중 하나인 무당파의 제자이면서 구양세가 딸내미랑 혼약을 맺은 사람이 흔한가? 기억하고 있지? 그, 풍운객잔에도 꽤나 드나들던 그 애송이.”

“일해검 백연.”

장기린은 그립다는 듯이 그 이름을 되새겼다. 만적 반야혼을 추적할 때 만나게 된 귀한 인연이었다.

“의도야 좋지만. 무림 늙은이들이 그렇다고 순순히 예, 그럽시다, 할 리가 없지. 구양세가 가주가 한다고 해도 말이 많을 상황인데, 아직 불혹의 나이도 안 된 새파란 애송이가 맹주가 되는 꼴을 두고 보지는 않을 거 아냐? 그래서 난리가 났을 때 왕진이 날 찾아왔더군. 난 전대 맹주님이랑 같이 무림에서 물러날까 고민하고 있던 때였는데……. 찾아와서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철우는 장기린과의 첫 만남을 말했을 때처럼, 그때를 생생하게 떠올리며 말했다.

“저랑 같이 세상을 바꿔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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