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07화 (236/686)

5권 7화

제17장 부자유친(父子有親)(7)

철우는 밤송이처럼 삐죽삐죽한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는 진중한 시선으로 몇 년 전 과거를 더듬어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디서 항주 저잣거리 남색가 같은 놈이 나타나서는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싶었는데, 그놈한테 묘한 기세랄까. 사람을 휘감는 매력 같은 게 있더라고. 젠장, 나도 모르게 어느새 이야기를 듣고 있더라니까.”

“항주 저잣거리 남색가라니. 정확한 표현이군.”

“파하핫! 하긴 너도 조금 전에 보고 왔다면 알겠지. 솔직히 첫인상은 별로 안 좋았었다. 사내놈이 허옇게 분칠한 얼굴이며, 입술도 새빨갛고 말투는 간드러지고. 항주 시절 옥승이 떠오르더라고.”

“옥승이라니. 또 그 시절 이름이군.”

“그놈도 좋은 기억은 아니지?”

철우는 소호의 눈치를 힐끗 보고나서 말을 이었다.

“옥승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아무튼 왕진이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솔직하더라고. ‘나는 널 이용할 거다. 그러니 너도 날 이용해라.’랄까. 줄건 주고 받을 건 받는 확실한 관계를 말하더군. 너무 확신에 차 있어서 좀 정신이 이상해 보이는 게 문제긴 한데……. 아무튼, 다 듣고 나니 드는 생각은 그래, 나쁠 게 뭐 있어? 였다.”

“흐음……”

“객주 녀석아. 생각해 보란 말이다. 소림과 무당이야. 북숭소림 남존무당의 그 태산북두들이라고.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협박을 했든, 회유를 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역근경이랑 소림오권, 양의신공이랑 태극권까지……. 그 외에도 소림과 무당의 무공을 절반 가까이 들고 왔어. 무림 강호에 그 둘 중 하나의 비급만 나와도 서로 갖겠다고 혈겁이 벌어질 거란 말이야. 무림 세상일에 어두운 너라도 대충 상상은 되겠지?”

“무림인들이 탐을 내긴 하겠군.”

“그 정도가 아니야. 명문대파. 그러니까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같은 곳에 들어가지 못한 무림인들이 무공에 대해 갖고 있는 열망과 갈증은…… 네 상상을 아득히 넘어선다.”

철우는 그 상황을 떠올린 듯 얼핏 두려운 기색을 비추기까지 했다.

“게다가 그뿐이야? 황실이 허가를 했다잖냐. 황실 인장이 박힌 칙서까지 보여 줬어. 그동안 소 닭 보듯이 거리를 두고 견제하던 황실과 무림이었는데……. 황실에서 신경을 써서 밀어 준다잖냐. 거대한 땅과 건물을 주고 거기에 돈은 다 대 주는데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참견도 안 한댄다. 내 능력을 마음껏 펼쳐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보래. 그런데 싫은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에 있겠냐는 말이야.”

장기린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묵묵부답이었다.

철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는 아마 이해하지 못할 거다. 넌 특별하니까.”

“……”

“싫어하는군. 안다. 네가 특별하다는 말을 싫어한다는 걸. 그렇지만 사실은 사실이야. 하나 고백하자면 나도 사실 정통 무림인 출신이 아니다. 원래는 그냥 동네에서 근골이 좋아서 힘 좀 쓰는 농촌 꼬마에 불과했어.”

“대석이랑 비슷하군.”

“대석?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타고난 천생 신력이 어마어마한 친구라지? 네 동생들 중 한 명으로 들었는데. 솔직히 호승심을 느껴서 찾아가 보고 싶었다.”

“맞다. 지금은 마을에서 나무꾼을 하고 있지만.”

“파하하핫! 나무꾼이라니. 듣기만 해도 재미있다. 하긴 목재를 옮기는 데 편하긴 하겠어! 나도 금분세수로 은퇴하고 나면 나무꾼이나 할까?”

철우는 크게 웃은 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난 어쩌다가 지나가던 승려분께 잡혀서 억지로 무공을 익혔지. 말하자면 평범한 꼬마가 기연을 만난 거다.”

“그랬군.”

“그래서 나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강호 무림에서 구파일방이니 오대세가니 하는 커다란 무파 출신이 아니면 겪는 일들이 어떤 건지 말이야. 그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다. 나는 말하자면 철씨 집안 일가(一家)를 이뤘지만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장기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왕진이 제안한 게 거기에 딱 걸맞은 일이었다는 거군.”

“그래. 그러니 부정하지 않겠다. 나는 왕진과 손을 잡았고, 무산학관의 학관장으로서 함께 일하는 관계야. 그러니 왕진이 비밀 통로를 통해 학관을 드나들든, 정문을 통해 드나들든 신경 쓰지 않았어.”

“궁금한 게 있다.”

“뭐든지 물어봐.”

“대가는?”

장기린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네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왕진에게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무엇이지?”

“대가는…… 없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철우는 생각을 더듬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왕진이 말은 그럴듯하게 했었다. 내가 무산학관을 짓고 운영하면서 생기는 알력이나, 구파일방 오대세가에 대한 견제가 자신에게 이득이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납득하기엔 무산학관에 너무 큰돈이 들어갔어. 게다가 그 금액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학부모들의 기부금만으로는 운영이 안 돼. 일을 하다 보면 왕진은 대체 뭘 위해 이렇게나 투자해 가면서 학관을 운영하는가? 라는 의문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냐.”

“그런데?”

“…….”

“결정적으로 의심스러운 게 있는 것이지?”

장기린은 철우를 꿰뚫어보듯 응시했다. 철우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맞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 무산학관도 벌써 사 년째다. 곧 두 번째 졸업생이 나오겠지. 왕진은 항상 학관 최고, 특히 기숙사 최강의 인재들과 만나기를 원한다. 식사를 함께 한 적도 몇 번 있지. 주기적으로 아이들의 성적도 확인하려 하고. 무산제전이 열리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참석해서 직접 아이들의 활약을 지켜보지. 말로는 학관의 최대 투자자로서 인재들을 격려하기 위해서라지만……”

철우는 말끝을 흐렸다. 장기린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말만 들으면 참 좋은 일인데……. 단지 그것만으로 시간을 내서 굳이 만난다? 내가 알기로 왕진은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철우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망설였다. 그의 퉁방울처럼 커다란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다가 가라앉았다.

“아니, 아니다.”

“말해 봐. 지금 무엇을 떠올렸지?”

“우연일 거라 생각한다. 근거는 전혀 없어.”

“너답지 않군. 일단 말해라. 보통 그런 직감이 정답으로 향하는 길을 보여 주는 법이다.”

철우는 장기린의 격려를 받은 뒤에야 조심스레 말했다.

“첫 번째 졸업생들 중에 두 사람을 찾을 수가 없다.”

“……그게 무슨 뜻이지?”

“연락이 안 되는 그런 수준이 아냐. 아예 없어졌다. 대단히 뛰어난 아이들이었다. 다른 졸업생들과는 격이 달랐어. 특히 한 명은 무공을 익히는 모습이 탐욕스러워 보일 정도로 의욕이 넘쳤다. 가끔 그 의욕이 과해서 싸우기도 하고 그랬지만……. 이놈들은 무림에 나가는 순간 이름을 떨치겠구나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무림에 나간 후에 찾을 수가 없다?”

“그래.”

철우는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장기린에게 섣부른 추측을 하지 말라는 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

“숨어서 무공 수련을 한다든가, 조용히 무림행을 한다든가 그런 생각은 하지 마라. 그렇게 안 된다. 무산학관은 졸업하면 졸업생의 증표로써 신분패 같은 것을 받는다. 그게 있으면 명제국 어디를 가든 역관이나 관아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지. 식객이 되어서 밥도 먹을 수 있고 말도 빌릴 수 있어.”

“그건 참……”

“대단하지? 무산학관을 졸업하면 관직을 주는 느낌이야. 명시된 건 아니지만, 혜택이 그러하다. 역시 황실이다. 일 처리하는 방식이 무림 문파와는 전혀 달라.”

장기린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철우는 생각하던 바를 계속해서 말했다.

“처음에는 경험 없는 무림 초출이라 비명횡사라도 당했나 싶었던 게 계기였다. 무림 강호는 무공만으로 헤쳐 나가는 게 아니니까. 기습을 당할 수도 있는 거고, 독에 당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런 거라면 무산학관이 찾아내서 복수를 하든가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찾은 건가?”

“확실히 찾은 건 아니지만, 제보를 들었다. 황실 쪽에서 일한다더군. 그때 직감이 왔다. 왕진은 무산학관 최고의 인재들을 황실에 끌어들이고 싶은 것이구나. 그래서 아이들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직접 눈으로 보고 옥석을 골라내려했던 것이구나, 라고 말이야. 그제야 그렇게나 같이 식사를 하고 잘해 주려 했던 노력들이 이해가 갔다.”

철웅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답답해 보인다고, 지켜보던 소호는 생각했다.

“즉, 억지로 데려간 건 아니다?”

“그래. 그건 확실하다. 왕진도 그렇게 말했었고, 그 아이들도…… 이렇게 말하면 뭐하지만 다들 명문 세가 출신이 아니라서 출세에 대한 욕심이 컸어. 왕진을 따라 황태자를 모시는 근위대가 되기로 했다면, 그럴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이라고, 철우는 중얼거렸다.

“나는 모르겠다. 무림지존이 되겠다는 포부를 품고 무공을 갈고닦는 것이 옳다고 생각은 하지만……. 무공을 배우고 나서 높은 관직을 얻기 위해 황실에 들어간다? 그것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있을까?”

철우는 교육을 집행한 학관장으로서 고민하고 있었다.

장기린은 그에 반해 눈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과연.”이라고 말하면서 심상치 않은 기세를 풍겼다.

소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장기린이 저런 눈빛을 할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저 모습은 마치 맹수들이 멀리 뛰기 전에 잠시 몸을 움츠리듯, 장기린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신호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뭘 깨달으신 걸까?’

소호가 얼마 전에 왕진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 누구보다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던 왕진과 그의 뒤에서 수신 호위처럼 서 있던 유준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장소호.”

“네?”

바로 그때, 소호를 향해 청천벽력 같은 말이 들려왔다.

“너는 이제 무산학관을 그만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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