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08화 (237/686)

5권 8화

제17장 부자유친(父子有親)(8)

머리가 하얘진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것이다.

소호는 자신의 두 귀를 의심했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다못해 동네 개를 쫓아낼 때도 어느 정도 전후 사정은 있는 법이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들은 그 말은 도대체가 맥락이 없었다. ‘왜?’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잠깐만요, 아버지.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아요.”

“너는 잘못 듣지 않았다, 소호야.”

“아뇨. 잘못들은 것 같아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만둬라.”

“……뭐를요?”

“무산학관을.”

소호는 장기린의 눈빛을 보고 알아챘다.

이건 진심이었다.

과거에 자신의 옷깃을 붙잡으면 밖에 내보내 놀게 해 준다고 약속했을 때처럼, 천지개변이 일어나도 변하지 않을 듯한 철탑(鐵塔) 같은 결심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진심이셔. 무산학관을 떠나라고? 도대체 왜? 갑자기?’

소호는 갑자기 서러워졌다.

심장이 쿵쾅거리는가 싶더니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왜……? 도대체 왜요?”

장기린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엄중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아버지가 이상해!’

아버지가 평소랑 다르다는 말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장기린은 가끔 고집스럽게 의견을 밀고 나갈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껏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고 폭군처럼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항상 휘연과 상의했고 사려 깊게 매사를 처리해 왔다.

소호는 눈이 뿌옇게 흐려지는 걸 느꼈다. 이건 슬퍼서가 아니었다. 분해서였다. 분하고 섭섭한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소호는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니 정당한 일일 것이다.

이유를 말해 주지는 않지만 분명히 막상 알고 나면 얄미울 만큼 정확하고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안다.

알지만.

소호는 인정할 수 없었다.

“싫어요!”

“……!”

철탑 같던 장기린의 얼굴이 설핏 굳어졌다.

동공이 흔들리는 모습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었다.

소호는 허리에 척, 하니 손을 얹었다.

장기린을 상대로 소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전투 자세였다.

“난 무산학관을 떠나기 싫어요!”

소호는 그 순간 머릿속에서 자신의 동생들, 섭주해와 대미미를 떠올렸다. 짧은 시간 만에 무척이나 친해진 조서인을 비롯한 기숙사 동료들, 성실하게 수업을 가르쳐 준 교관님들도 생각났다.

그들 모두와 하나씩 즐거운 추억들이 있었다.

소호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지만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떠나 버릴 만큼 가볍게 살아오진 않은 것이다.

게다가 왕진을 만났을 때 뭐라고 했던가.

친구들과 놀면서 좀 더 학관에서 지내고 싶다고 했는데, 곧바로 이런 일이 생기다니!

“너…….”

장기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천천히 고르는 듯,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너답지 않구나.”

“제가요?”

“그래. 지금껏 그렇게 떼를 쓴 적은 없잖나.”

“……아버지도 똑같잖아요.”

“뭐라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저한테 시키신 적 없잖아요?”

소호는 물러설 수 없는 마음을 가득 담아 장기린을 마주보았다.

장기린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가. 나도 지금껏 그래 왔던가.”

“네. 맞아요.”

“그럼 나도 떼를 쓰도록 하지. 안 된다. 무산학관은 그만둬라.”

옆에서 커헙 하고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호는 너무 화가 나서 그런 우스운 소리를 들을 새도 없었다.

“뭐예요! 어른스럽지 못해!”

“원래 어른은 어른인 척할 뿐이야. 애나 어른이나 똑같다.”

“거짓말!”

장기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포기해.”

“싫어요!”

“무산학관이 좋으냐.”

소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할 여지도 없다고 생각했다.

“네!”

“그런가. 네가 살아온 마을보다도?”

“……!”

소호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무산학관은 좋다. 많은 친구들이 있고 배울 것이 많고, 함께 겨루고 옥신거리면서도 즐겁게 지내는 생활이 너무 좋다. 지루하다는 생각을 밥 먹듯이 하던 소호에게 있어서 무산학관은 지내면 지낼수록 새로운 일들이 터지는 무릉도원 같은 공간이다.

하지만 태어나고 자란 은자촌과 비교하라고 한다면?

산림이 우거진 삼산과 맑은 샘물들, 적왕과 깜돌이가 있고 십로 할아버지들과 삼촌들이 어울려 지내던 은자촌과 비교한다면.

“그건…….”

소호는 문득 또다시 서러워졌다.

분해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하지만 꾹 참았다.

사내놈이 눈물을 쉽게 보이면 안 된다고 배워왔다.

“무산학관과 은자촌을 비교하는 건…… 치사해요.”

“치사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그럴 리가 없어요.”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장소호. 네가 아는 것과 다른, 많은 일들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어. 그리고 주변의 많은 자들이 너를 이용하려 들지. 그러니 네가 무산학관에서 나오는 게 최선이다.”

장기린은 항상 그랬듯이 소호를 정면으로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솔직하면서 당당하다.

뭔가를 숨기거나 잘못하는 것은 없는 태도였다.

평소엔 그 모습이 멋있었지만, 지금은 그 당당함이 미웠다.

“제가 모르면 알려 줘요. 아버지. 왜 나가야 하는 거예요?”

“…….”

장기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호는 울컥 화가 났다.

“말 안 해 주시면, 저도 싫어요! 납득할 수가 없어요.”

“곤란하군.”

“네. 그러니까 저를 무산학관에서 나가게 하고 싶으시면 이유를 말해 주세요.”

장기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소호, 너는 왕진을 만났었다고 했지.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나? 철우에게 그랬듯이 너를 회유하려고 하진 않던가?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나?”

“그건…….”

“사실인가, 아닌가.”

잘못을 추궁하듯 엄중한 목소리였다.

소호는 기세가 움츠러들었다.

“맞아요. 그런 식으로 말하긴 했어요.”

“그래. 그렇겠지.”

“그렇지만. 거절했어요. 저는 무산학관에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노는 게 좋다고요. 여기 있는 게 좋으니 거절하고 나왔단 말이에요. 입관 시험도 애들이랑 어울려서 치렀고, 기숙사도 배정받았고, 서인이랑 무공도 같이 수련하기로 했고,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학관에서 나가라고 하시면…….”

결국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소호는 분하고 부끄러웠다.

울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감정이 북받치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왕진은 위험한 자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진 않겠다고 하긴 했지만 모르는 일이지. 믿을 수도 없고, 설령 믿는다고 해도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이라면서 수작을 부릴 수도 있는 일이지. 나는 만에 하나라도 네가 엮이고 이용당할 위험이 있다면 무산학관에서 나오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답지 않아요. 아직 벌어진 일이 아니잖아요. 제가 거절할 수 있어요.”

“네가? 왕진의 수작을 거절할 수 있다고?”

장기린은 미심쩍어 보였다.

소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단호함을 보여 줘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네! 제가 거절할 수 있어요! 오늘 그랬듯이 다음번에도 그럴 수 있어요!”

“…….”

“진짜예요. 저는 냉철하게 거절할 수 있어요!”

소호는 미간을 좁히며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호랑이처럼 무섭고, 냉혹하게.

그 어떤 제안도 거절할 수 있는 단호함을 표현했다.

“…….”

장기린이 움찔하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푸흡, 하고 억눌린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는…… 후우…….”

깊고 힘겨운, 함께 십이 년 동안 살았던 소호가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던 탄식이 흘러나왔다.

“자식이라는 건…… 힘들군.”

소호는 장기린이 왜 억겁 같은 한숨을 내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틈을 노려 철우가 재빨리 끼어들어 왔다.

“크흠! 자, 자. 부자간에 오랜만에 만났는데 싸우지 마라. 객주 너도, 왜 갑자기 애를 울리고 그러는 거냐.”

“내가? 울렸다고?”

“울렸지. 그럼! 저 눈물 자국이 증거다!”

“…….”

장기린은 또다시 억겁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호는 얼굴이 빨개져서 재빨리 소매로 눈물 자국을 닦아냈다.

“왜 남의 학관장실에 가정사를 들고 와서 아빠랑 아들이 싸우고 그러는 거냐. 나도 아들이랑 사이가 안 좋은데. 내가 이러려고 학관장이 되었던가…… 나는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것인가…….”

철우는 갑자기 창밖의 먼 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객주 녀석아. 잘 들어라. 내가 총각 때는 몰랐었다. 이삼십 대에 혈기방장하게 여기저기 사고도 치고 다니고, 여러 여자들…… 커험, 아무튼, 그럴 때는 몰랐었다.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하고, 모든 결정도 내가 내린다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건가?”

“아냐. 전혀 아냐. 그렇게 안 돼.”

철우는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무산학관의 관장으로서 소호 같은 아이를 놓치는 게 아깝기는 하다만. 그건 둘째치고…… 왕진 때문인지 숨겨진 이유가 더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너는 그게 제일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소호가 무산학관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냐.”

“그래. 그렇다.”

“타협의 여지는 없고?”

“……그래.”

철우는 뒷짐을 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진중한 표정으로 눈을 반개하고 있었다. 그가 밤송이 같은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는 모습이, 마치 장비가 관우로 변신한 듯 현명해 보인다고 소호는 생각했다.

“너는 틀렸다. 풍운객주야.”

“어째서지?”

“아까 잠깐 말했지만, 결정을 내리는 건 네가 아니야. 아니,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겠군. 그래. 너는 그 결정을 ‘혼자’ 내려선 안 된다.”

“……!”

그제야 알아챈 장기린을 향해 철우는 현명하고 진중한 미염공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가락이 척, 하니 장기린을 가리켰다.

그의 목소리는 판관처럼 준엄했다.

“네 마누라와 상의하고 결정해라. 애송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