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09화 (238/686)

5권 9화

제17장 부자유친(父子有親)(9)

애송이.

천하의 장기린을 애송이 취급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장기린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뭔가 반박을 하고 싶지만, 그럴듯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 듯 보였다.

“흠흠.”

철우는 당연하다는 듯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나에게 세상에서 딱 한 명, 무시해선 안 될 사람을 뽑으라고 한다면 난 나의 부인을 꼽을 것이다.”

“……으음.”

“만약 무시해도 된다는 놈이 있다면 분명 혼인을 하지 못한 놈이야. 뻔한 이야기지. 혹시 난 그렇게 살지 않는다면서 허세를 부리는 놈이 있다? 그건 눈치가 없어서 자기가 왜 구박을 받는지도 모르는 모자란 놈일 테고.”

전에 없는 신랄한 평가였으나 장기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능력만 있다면 삼처사첩도 흠이 되지 않는 시대지만,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똑같은 것이다.

“기린 놈아. 소호에 대해 마음대로 결정해서 뭔가를 해 버린 적이 있느냐?”

“…….”

“있나 보군. 그때 분명 경고를 받았지, 네 부인에게서? 자아, 잘 생각해 보고 말해 봐라. 너는 분명히 경고를 받았어. 네가 아둔한 탓에 눈치채지 못했을 뿐 분명히 경고는 있었을 것이다. 내 혼인 생활 전부를 걸고 확신해.”

장기린은 이번에도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다가 더듬더듬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소호를…… 무산학관에 처음 보냈을 때였다.”

“허어, 설마 네 맘대로 소호를 보낸 것이었냐? 이곳 무산학관에?”

“…….”

“오호통재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철우는 갑자기 불가에 귀의하기라도 한 듯 불호를 외쳐 댔다.

마치 더러운 악령을 만난 듯 그 기세가 열렬했다.

“네 맘대로 아들내미를 학관에 보내서 경고를 받아 놓고, 이번엔 네 맘대로 학관에서 빼 버리겠다고? 단 한 번도 네 마누라와 상의해 보지 않고?”

“그건…… 그렇게 말하니. 그렇군.”

장기린은 인정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순순히 인정하자 마음의 평화 대신 모멸과 자괴감이 찾아왔다.

“내가 인정하겠다. 너는 정말로 무쌍귀로구나.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는 녀석이었어!”

“후우. 장난치지 마라.”

“장난이 아니다. 난 네 녀석이 정말로 놀라워졌다.”

철우는 아둔함이 옮겠다면서 장기린으로부터 한 걸음을 멀어졌다.

장기린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소호는 갑자기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후우…… 알았다.”

장기린은 마침내 항복하듯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휘연을 만나러 가자.”

***

“호아야!”

풍운전장으로 가서 만난 진휘연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들고 있던 서류를 근처 탁자에 내팽개치더니 바람처럼 달려와 소호의 온몸을 끌어안았다.

맞은편에 앉아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머리가 벗겨진 중년 남성이 황급히 탁자 위의 서류들을 챙겨 모았다.

“세상에, 내 새끼! 잘 있었어?”

“어머니……!”

무산학관 전체가 좁다고 날뛰는 작은 호랑이도 어머니 앞에서는 그저 십이 세 꼬마에 불과했다.

발갛게 상기된 볼 위로 동그란 눈에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맺혔다. 밥은 어떻고, 잠자리는 어땠냐며 다그쳐 묻는 어머니에게 붙잡힌 채로 소호는 온갖 감정에 휩싸인 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엄마의 품이 그리웠다며 자존심 같은 거 다 내버리고 펑펑 울기엔 아직 소호는 어렸다.

사내아이의 자존심이었다.

훌쩍거리며 코끝을 훔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다 괜찮아! 잘 지내고 있어요!”

“그래? 우리 호아가 입관 시험 때 일등을 했다면서? 얼마 전에 신입생들 실력을 시험할 때도 최고의 성적이었고?”

“어? 어떻게 알았어요, 어머니?”

“호호, 엄마는 다 알아. 자랑스럽다, 우리 아들. 엄마는 아들이 잘 해낼 줄 알고 있었어.”

“히힛.”

소호는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의 칭찬을 받으니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음식은 어때? 친구들이랑도 잘 지내고?”

“음식은…… 먹을 만해! 애들이랑도 재밌게 지내고 있어요!”

“그러니? 음식…… 정말로 괜찮으려나? 너는 귀하게 자란 것 답지 않게 웬만한 건 뭐든 다 잘 먹잖니. 그래서 걱정이야.”

“아냐. 다 먹을 만해요. 우리 집만큼은 아니지만.”

“그렇지? 운찬 삼촌한테 몇 년만 다른 데서 일해 볼 생각 없냐고 물어볼까?”

휘연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장기린의 눈빛이 흔들리고, 철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하며 끼어들었다.

“강운찬! 그 녀석, 황실의 용화성 대령숙수한테 종종 가르침을 받고 있다면서? 우리야 가끔이라도 와주면 참으로 좋겠군!”

“저도 그러면 좋겠네요. 우리 애가 좋은 걸 먹고 자라야 할 텐데……. 그치만 그건 운찬 삼촌이 결정할 일이니까요.”

“그래도 장기린의 마누라가 말하면 들을 것 같은데?”

“안 돼요. 그런 건 강제로 시키면 안 되는 거예요.”

“그건 그렇지. 그래도 가능하다면 꼭 좀 와 줬으면 싶구만. 청소든 빨래든 다른 건 어떻게든 되는데 요리만큼은 제대로 된 사람 구하기가 쉽지가 않아.”

“흐음, 그런가요? 풍운전장에서 살펴보니 매일 식재료 구입에 돈을 많이 쓰던데요? 숙수들 월봉을 적게 주나요?”

“그건 아닌데. 아무래도 무림이랑 연관된 곳이기도 하고, 특별한 손님이 아니라 학생들한테 밥해 주는 자리는 좀…… 실력 있는 숙수들한테 인기가 없는 모양이더군.”

“그런가요? 그럼 지금은 요리의 질이 따라가질 못하는 편인가요?”

“지금 우리 대숙수도 노력을 많이 하기는 하는데, 근본적으로 사람이 부족해. 무산학관에 애들이랑 교관들, 학관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삼백 명이 훨씬 넘어가니까. 사람이 부족해서 요리의 질을 올리기가 쉽지 않다더구만.”

“그렇군요.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

휘연은 소호를 끌어안은 채로 서류를 들고 멀찍이 떨어져 있던 대머리 중년 사내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는 화들짝 놀라면서 세필로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풍운전장의 다른 직원들을 불러서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기까지 했다.

철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의뭉스럽게 헛기침을 해 댔다.

“크흠! 풍운회가 도와주면 일이 편할 텐데 말이야.”

“호호, 글쎄요. 어떤 게 좋으려나? 사람을 증원할지, 식재료 납품을 바꿔 볼지. 아니면 객잔을 하나 더 차리는 것도 괜찮겠네요. 중요한 건 학관 안에서 양질의 식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는 문제잖아요?”

“파하핫! 역시 핵심을 잘 알아. 거물이구만. 거물이야.”

장기린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철우를 응시했다.

“옛날과 달라지긴 했군. 너, 원래 이렇게 뻔뻔했던가?”

“흥, 모르는 소리를 하는구나, 객주 녀석아. 이 몸은 무산학관의 관도들을 책임지는 몸이시다. 어깨에 짊어진 게 있으면 자존심 따위는 어느 정도 굽힐 수 있어.”

“흐음.”

“그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한없이 가벼우면서도 묘하게 무게감 있는 질문이었다.

장기린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사이, 휘연에게 얌전히 안겨 있던 소호가 꿈지럭거렸다.

“어머니. 보고 싶었어요.”

소호가 머뭇거리다가 내뱉은 말에 진휘연은 감동받은 얼굴로 소호를 꽉 끌어안았다.

“그래. 내 새끼,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저기…….”

소호가 진휘연에게 안긴 채로 장기린을 힐끔 바라봤다.

“물어봐야 할 게 있는데…….”

“어떤 거? 우리 아들, 필요한 게 있어?”

“필요한 건 아니구. 물어봐야 하는데…….”

소호는 머뭇거리다가 질문했다.

“나, 무산학관에 계속 다니면 안 돼요?”

“그게 무슨 말이니? 누가 우리 소호가 학관을 다니지 못하게 해?”

“음…… 그게…….”

소호는 고민하고 있었다.

중요한 문제를 물어보긴 해야 하는데, 어머니께 문제를 상담하는 것과…… 아버지의 행패를 일러바치는 것의 차이가 굉장히 미묘했던 것이다.

‘어떻게 물어봐야 하지?’

소호의 고민은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아버지와의 문제구나?”

“……!”

소호는 움찔 굳어졌다.

역시 어머니는 위대했다.

소호는 아무 말 안 하고 시선만 아버지에게로 향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귀신같이 간파당한 것이다.

슥―.

휘연이 소호를 품에서 놓고 일어서서 장기린을 바라본다. 소호는 정면이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장기린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소호가 무산학관에 다니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나요?”

장기린은 뒤쪽에서 뭔가를 열렬히 토론하고 있는 풍운전장의 직원들을 힐끔 바라봤다.

휘연은 곧바로 알아듣고 소호에게 말했다.

“호아야. 잠깐 저기 가서 저 아저씨들이랑 놀고 있을래?”

“네?”

“아마 당과도 주고 이야기도 많이 해 주실 거야.”

휘연이 그들에게 손짓하자 대머리 중년 사내가 황급히 다가와 소호를 데리고 풍운전장의 안쪽 의자로 향했다.

“자, 소회주, 아니, 도련님. 이쪽으로 잠시 오시지요?”

“어어…… 그게…….”

소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문제가 생겼다, 휘연.”

“무슨 일인가요?”

옆에서 풍운전장의 직원들이 차랑 당과를 꺼내 오고, 이것저것 이야기를 건넸지만 소호는 영혼 없이 대답할 뿐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저 멀리, 눈으로만 보이는 장기린과 휘연의 대화에 신경이 집중된다.

“왕진이라는…….”

“……속을 한 건…….”

장기린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고, 휘연 또한 심각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질문을 던지고, 장기린이 담담히 대답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휘연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허리에 척 하니 손을 얹은 특유의 자세를 했다. 그녀가 손가락 하나를 세우면서 말을 하니 장기린이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일이 어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이곳에서 답답한 건 소호 한 사람뿐이었다. 다만 건네받은 당과는 달콤하고 맛있었다.

잠시 후, 휘연이 다가오는 모습에 소호는 벌떡 일어나서 물었다.

“어머니! 어찌 되었어요?”

“호아야.”

휘연은 빙긋 미소 지었다.

구김살이 하나도 없는 맑은 웃음. 평소에 다른 사람들이 소호에게서 느끼던 바로 그 환한 미소였다.

“너는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단다. 엄마가 다 해결할게.”

“……!”

소호는 양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휘연의 품에 안겼다.

“역시 어머니가 최고야!”

어머니의 품 안은 따뜻했다. 장기린의 얼굴에 떠오른 씁쓸한 미소는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아버지한테 인정받는 건 호아가 잘해 보렴.”

“알았어요, 어머니.”

소호는 휘연이 속삭여 준 말에 다시 한 번 의지를 다졌다.

***

며칠 후, 삼산현의 은자촌.

텅 빈 풍운객잔을 멍하니 지키고 있던 두 명의 사내는 헐레벌떡 달려온 표사에게서 서찰을 하나 건네받았다.

은자촌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소악동(小惡童)들의 소식일 것이다.

그들은 기대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재빨리 서찰을 꺼내어 읽었다.

그러나 서찰은 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멍하니 굳어져서 서로를 바라보다가, 다시 한 번 찬찬히 서찰을 읽어 보았지만 그런다고 내용이 바뀔 리가 만무했다.

특히 다들 알아주는 다혈질이자 내면을 숨길 수 없는 한 사람. 적룡기마대의 막내인 진구가 은자촌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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