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10화 (239/686)

5권 10화

제17장 부자유친(父子有親)(10)

소호는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은자촌, 가족, 무공.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면 그 세 가지가 소호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삼산현을 둘러싼 흑산과 백산의 그 신령(神靈)한 기운, 맑디맑은 시냇물을 마시고 드넓은 풀밭을 끝도 없이 뛰어다니던 행복했던 시절들을 지금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은자촌은 소호의 고향이었다.

언제 어떤 삶을 살든 다시 되돌아가야 할 하나뿐인 집이었다.

가족도 그랬다.

대단한 분이지만 조금 대하기가 어려운 아버지, 항상 상냥하게 대해 주는 어머니. 쾌활하고 유쾌한 삼촌들과 늘 시끌벅적한 할아버지들에 동생들까지, 그들 모두가 한 가족이었다.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빠진 은자촌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무공……은 사실 그리 좋아하진 않았다.

마을의 할아버지들이 뭔가 하나라도 더 주려고 하는 분들이다 보니 숨 쉬듯이 자연스레 배웠을 뿐, 특별히 무공을 익히고 싶다거나 진지하게 제대로 수련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할 수 있으니 한다.

잘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할아버지들이 기뻐하니까. 소호는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며 무공을 익혔을 뿐이었다.

그랬던 소호가 무산학관에 오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조서인이라는 아이를 보게 되었다. 순수하고 착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게 유일한 단점인 소년과 만나면서 소호의 세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 세상을 만나듯이, 소호는 조서인이 무공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며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았다.

조서인은 소호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아이였다.

일분일초, 짧은 시간조차 아깝다고 생각하면서 무공에만 몰입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무공을 좋아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질리지 않고 한 가지 동작만 반복할 수가 있을까?

신기했다. 계속해서 지켜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함께 내기를 준비하게 되었고, 같이 무공을 수련하면서 친해졌다.

서로 농담을 건네고, 부대끼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깨달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소호는 무산학관을 떠나기가 싫어졌다. 조서인뿐만이 아니다. 철웅, 백설지, 은위군. 그 밖에도 앞으로 친해지고 싶은 아이들이 많았다.

그러니 지켜내야만 했다.

진심으로 원하는 게 있다면 자신의 힘으로 쟁취하고 지켜 낼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 게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그러니 싸울 것이다.

그 상대가 천하의 장기린, 소호의 아버지일지라도 말이다.

“난 지켜 낼 거야.”

고민은 길었지만 한번 결단을 내리니 마음이 편해졌다.

소호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휘연이 생각해 낸 방법은 확실히 효과적이다. 철우도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그대로만 된다면 네가 무산학관에서 지내더라도 일방적으로 사건에 휘말리거나 왕진의 음모에 당할 일은 없겠지.”

“그럼 괜찮은 거죠, 아버지?”

“잘 모르겠다. 소호야. 솔직히 나는 아직 납득이 되지 않는구나. 지금도 가장 좋은 방법은 네가 무산학관을 나오는 거다. 휘연은 네 바람을 최대한 들어주려는 것뿐이야.”

“저는…….”

“후우, 하지만 하나뿐인 아들의 바람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 그러니 증명해라.”

“네?”

“이곳 무산학관이 다닐 만한 가치가 있었음을, 너 스스로 증명해.”

“……!”

“방법은…… 알고 있지?”

소호는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서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꾹 눌렀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장기린과 소호가 해 오던 것이니까. 방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소호가 언제 증명하면 되겠냐고 묻자, 장기린은 그에 대해 해질녘이 되면 알게 될 거라고 했었다.

“도대체 왜 갑자기 모이게 된 거야?”

“특별 수업이라던데?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만 모이는 거래.”

“이렇게 갑자기? 해질녘에 모인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잖아?”

“그러게. 애들이 다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고 있어.”

주변에는 소호와 같은 시기에 무산학관에 들어온 아이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모여들고 있었다.

깨끗하게 다듬어진 대리석 연무장으로 신입생 오십 명이 차례차례 모여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각 기숙사의 방장들, 그리고 주요 과목을 가르쳐 주는 교관들도 다 모였다.

아이들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건 그때쯤이었다.

단상 옆에 쭉 늘어선 교관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긴장한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소호야! 먼저 와, 와 있었구나?”

말을 더듬는 순박한 목소리, 백호방의 방장인 봉천이 다가왔다. 옆에는 수련에 미쳐 있는 소년, 철웅도 함께였다.

“선배님들 오셨네요?”

“으응, 어머니는? 돌아가셨어?”

“네에, 오늘은 객잔에서 묵으신다고 숙소로 먼저 가셨어요.”

“어머니가 미, 미인이시더라.”

“히힛, 감사해요. 어머님께 전해 드릴게요.”

봉천은 빨개진 얼굴로 길쭉한 양팔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소호의 어머니는 소호와 함께 기숙사 내부를 둘러보고, 동급생과 선배들까지 만나 본 뒤에야 돌아갔다.

숙소를 보고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소호는 뭐,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나저나 분위기가 심각한데? 봉천, 뭔가 들은 거 없어?”

“어, 없어. 그냥 아까 귀한 손님이 오, 오, 올 거라고 듣긴 했는데, 시간이 안 맞았는지 만나지는 못했어.”

“그래? 아쉽네.”

“너, 너야말로 아버님께 들은 거 없어? 아버님이 주, 주, 주최하신 거잖아.”

“나? 별소리를 다. 난 아버지랑 한 달에 한 번 이야기하면 많이 이야기하는 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나눌 사이가 아니야.”

“아아…… 그, 그랬지.”

봉천이 난감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고 철웅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철웅과 봉천의 대화를 옆에서 듣던 소호는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걸 꾹 눌러 참아야 했다.

‘철웅 선배는 알까? 학관장님이 사실 말이 좀 많으시다는 걸? 오늘 어머니, 아버지보다 학관장님이랑 더 많이 이야기한 것 같은데?’

하지만 그걸 철웅에게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호도 그 정도는 아는 교양 있는 소년인 것이다.

‘안 돼. 안 돼. 집중해야 해. 난 아버지한테 증명해야 하잖아.’

소호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문득 신경이 쓰이는 광경을 발견했다.

소호의 친구인 조서인이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한 눈빛으로 휘청거리면서 서 있었던 것이다.

“어……? 서인아?”

조서인은 죽은 생선 같은 눈빛으로 소호를 돌아보았다.

“아아, 소호구나.”

“무슨 일 있었어?”

“그냥…… 뭐랄까……. 무신을 만났달까…….”

“무신?”

조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분을 만났어. 내 무공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게 해 주셨어…….”

“그래? 그게 누구였는데?”

“누구냐고……? 그러네. 누구실까? 학관장님의 손님…… 아니지 친구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친구분이시고, 부인이 굉장히 미인인 분이었어.”

“……!”

소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던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그, 그래?”

“응. 굉장한 분이셨어. 그분이 한 수 보여 주셨는데……. 그 모든 동작들이랄까. 움직임 같은 게 하나하나 선명하게 새겨져서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조서인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두 번 톡톡 두드렸다.

“사실 잊고 싶지 않기도 해. 뭔가 무릉도원에 다녀온 것 같아. 계속 기분이 멍해.”

“……그렇구나?”

“이걸 어떻게 쓰면 좋을까? 똑같이 움직여 봐야겠지? 그런데 똑같이 안 될 것 같은데……. 한 시진. 아니, 아니지. 하루, 아니, 한 달 정도만 잠을 좀 줄여서…….”

소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서인의 무공 사랑이 폭주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피해자였다.

‘도대체…….’

아마 높은 확률로, 지금 신입생들이 모인 것도 아버지와 연관이 있을 터였다.

소호는 장기린을 향해 한번 따져 묻고 싶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아버지. 도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신 거예요?’

게다가 학관장과도 친구였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신기한 일이었다. 캐면 캘수록 신기한 게 튀어나오는 아버지는 과거에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단 말인가.

‘이러다가 황제랑도 안다고 하시겠네.’

소호는 자기가 생각해 놓고도 웃긴다 싶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소호 형, 어머니는요?”

“오라버니! 어머님은 어디 계셔?”

그때 가까이 다가온 은자촌 출신 두 사람이 활기찬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 객잔으로 향하셨어. 오늘은 거기서 머무신대.”

“와아! 이따가 찾아가 봐야겠다!”

대미미는 배시시 웃으면서 기뻐했다.

어려서부터 소호의 어머니를 유난히 잘 따르던 대미미였다. 지금도 친어머니인 연 부인이 오셔도 이 정도로 좋아할까 싶을 정도로 기뻐하는 중이다.

“소호 형,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으응.”

“아버지와 관계된 일인가요?”

소호는 깜짝 놀라 섭주해를 바라봤다. 소년답지 않은 진중한 눈빛이 소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주해 너는 내가 속일 수가 없구나?”

“후후, 속이려고 하지 마세요. 그래서, 심각한 일인가요?”

“글쎄? 으음, 사실 오늘…….”

소호가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려던 순간이었다.

주변에서 떠들던 아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묵직한 존재감을 가진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구의 몸, 패왕 항우의 철가면을 쓴 사내였다.

무산학관 관장, 가면철왕 철우가 나타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철표, 제갈승조, 중걸. 세 명의 수석 교관과 황보정과 연홍과 같은 일반 교관들이 모두 굳은 얼굴로 시립했다.

철우는 성큼성큼 걸어오자마자 서두 없이 바로 본론을 말했다.

“오늘 너희를 다 모은 것은, 너희에게 한 사내와 만나게 해 주고 싶어서다.”

철우가 입구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연무장에 모여 있던 모두의 시선이 철우가 가리킨 쪽으로 쏠렸다.

한 사내가 차분한 발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뒷짐을 진 채 소박한 흰색 베옷을 입고, 얼굴에는 눈과 입만 뚫려 있는 가면을 쓴 사람이었다.

“으아아.”

소호는 예상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양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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