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11화 (240/686)

5권 11화

제17장 부자유친(父子有親)(11)

“설마 했는데…….”

소호가 주변의 반응을 살펴보니 다들 의아해하는 분위기였다. 가면철왕이 또 다른 가면을 쓴 사내를 데려왔으나 정체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누굴까? 학관장님의 친구인가?”

“그렇겠지? 근데 강한지 어떤지 난 잘 모르겠어.”

“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무기가 없는 적수공권이야. 권법을 쓰는 사람일까?”

“아냐. 왠지 권사의 느낌은 아냐. 권사라면 저 철거사 중걸 사부처럼 특유의 묵직하면서 가벼운 느낌이 있어야 한다고.”

“묵직하면서 가볍다니. 뭔 소리야?”

“너 모르는구나? 권사들만 알 수 있는 그런 게 있어.”

“잘난 척은. 그렇게 따지면 검사들도 예리함이 있다구.”

무산학관의 아이들은 각자의 생각을 소곤거리며 새로 나타난 사내의 정체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때, 눈을 가늘게 뜨고 열심히 살펴보던 대미미가 손가락을 앞으로 뻗었다.

“아앗! 아버……! 읍!”

깜짝 놀란 섭주해가 대미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으읍!”

“쉿, 쉿! 미미야 지금은 조용히 해야 해. 소호 형, 혹시……?”

소호가 고개를 끄덕이니 섭주해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미미는 섭주해가 놓아주자 동그란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조용히 되물었다.

“왜? 왜 아버님이 여기 오신 거야?”

“으음, 그게…… 설명하자면 길어, 미미야. 이따가 말해 줄게.”

그사이 가면의 사내, 장기린이 단상 아래에 도착했다.

“이 사람은 나의 오래된 친구로…… 굉장히 강한 친구다. 특히 창술에 있어서는 전 무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친구라고,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

아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다름 아닌 무산학관의 학관장이 실력을 보증해 준 것이다.

심지어 그를 대하는 철우의 태도는 정중하기까지 했다.

“창술로 전 무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세상에, 학관장님이 보증한 거야? 그럼 대단한 사람인가 봐!”

“창으로 유명한 사람이 누가 있었지?”

“무림오존 중에 창마존(槍魔尊)? 양가창의 가주?”

“아미파의 아미신창도 있어. 또 누가 있더라……?”

철우는 웅성거리는 아이들에게 쫙 펼친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이 친구는…… 사정이 있어 이름을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 이렇게 표현해 보지. 바람(風)과 구름(雲)이 머무는 곳에서 온 친구다. 이 친구를 풍운 노사(老師)라고 불러도 좋다.”

철우는 스스로의 감각에 감탄한 듯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풍운 노사라니! 세상에, 관장님이 뿌듯하게 웃고 있어!’

소호는 풉, 하고 입에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 실제로 옆에 있는 섭주해랑 대미미도 풍운객잔을 떠올리면서 웃음을 꾹 눌러 참고 있었다.

저 근엄한 패왕 가면 너머로 장난스럽게 씩 웃고 있는 철우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단상 아래에 묵묵히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장기린이 움찔하면서 단상 위를 노려보는 모습이 소호의 눈에는 생생하게 보였다.

“히힛.”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모습이다.

철우는 끝까지 단상 아래를 보지 않고 아이들만 바라봤다.

아이들은 새로 나온 단서에 더더욱 들끓고 있었다.

“풍운……? 바람과 구름……? 그래! 곤륜이다. 곤륜인가 봐! 창마존인 거야!”

“곤륜에서 온 도사님인 거야?”

“그래! 저 검소한 베옷이랑도 잘 어울리잖아.”

“나는 여기저기 떠도는 거지 방파라고 생각했는데?”

“개방? 거기도 창술이 있어?”

“모르겠어.”

“근데 무슨 개방이야, 바보야.”

“바보라니! 바보라니!”

급기야 옥신거리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킨 것은 철우에게 풍운 노사라고 소개된 장기린이었다.

그가 특별한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장기린은 단상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이내 연무장 한편에 놓인 십팔반 병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듯 태연한 태도였다. 뒷짐을 진 채로 천천히 내딛는 걸음걸이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그는 천천히 십팔반 병기 전체를 둘러본 뒤, 그중에 창날이 한쪽으로만 뻗어 있는 외날의 나무창을 꺼내 들었다.

어째선지 연무장에 있던 모두가 단지 무기 하나를 꺼내는 모습을 숨 쉬는 것도 잊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장기린이 창을 손에 쥐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아……!”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도 탄성을 내뱉었다.

공기가 변했다.

마치 천칭의 무게추가 한쪽으로 기울 듯, 급격히 무거워진 공기가 한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크흠! 자아, 오늘 우리 무산학관에 와 준 풍운 노사께선 너희의 실력을 궁금해 하셨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가르침을 내려 주기로도 약속을 한 상태이지.”

철우는 짝! 하고 손바닥을 마주쳐서 사람들의 시선을 억지로 다시 모았다.

“하지만 너희의 실력을 직접 보기 전에, 풍운 노사는 우선 우리 무산학관이 자랑하는 교관들과의 대련으로 창술이 뭔지에 대해 보여 주기로 하였다. 너희는 이 대련이 얼마나 귀한지 깨달아야 한다. 만약 풍운 노사가 누군지 알게 된다면 이 대련을 보기 위해 천금을 쓰는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철우가 손짓하자 황보정이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섰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오. 나는 강호에서 파권이라 불리는 황보정이오.”

평범한 갈색 무복으로도 황보정의 거대하고 건장한 체격은 가려지지 않는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하는 모습은 강렬하면서도 위압감이 있었다.

“풍운.”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고 들었소. 하지만 천하에 적수가 별로 없는 분[無雙]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전력을 다해도 괜찮겠소?”

“물론.”

황보정은 장기린이 그렇게 답할 거라 예상한 듯, 망설임 없이 십팔반병기 쪽으로 다가가 동그란 방패와 목검을 집어 들었다.

“무산학관에서는 외공을 가르치고 있소. 십팔반 병기 대부분의 제반 사용법은 다 익혔으나 가장 자신 있는 것은 이 순검술(盾劍術)과 언월도를 사용한 창술, 그리고 천왕삼권(天王三拳)이오.”

황보정은 몸을 낮추고, 궁보에 방패를 앞에 내민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그에 맞서는 장기린.

그는 그저 무릎만 살짝 굽혔을 뿐, 양팔을 모두 늘어뜨린 자연체였다.

“황보 사부는 산동성(山東省)에서 산동제일권(山東第一拳)으로도 뽑히는 절정고수다. 풍운노사가 창술이 뭔지 보여 주기엔 충분할 터.”

철우는 칭찬으로 한 말일 테지만, 황보정이 듣기로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황보정의 안색이 굳으며 기세를 더욱 끌어 올렸다.

“엄청나다……!”

“분위기가 무서워……!”

아이들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기대감에 눈을 빛내고 있었다.

수업을 엄하게 지도하는 호랑이 선생님이 바깥의 초고수와 싸우는 순간인 것이다.

여기에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건 무산학관의 학생이 아니다.

“자아―――, 시작!”

철우의 선언과 함께 황보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커다란 등껍질로 몸을 감싼 거북이 같았다.

천천히, 방패로 상체를 가리면서 앞으로 나가가다가 한껏 몸에 힘을 주었다.

잘 발달된 승모근과 방패를 든 전완근이 두꺼워졌다. 몸을 낮추자 하체 부위의 갈색 무복도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챠핫!”

후우우웅―.

그러다 돌진.

황보정의 거구가 천왕보(天王步)의 묘리를 담아 장기린을 박살 내버릴 듯 포탄처럼 쏘아졌다.

앞으로 내밀고 있는 방패는 더 이상 방어용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무서운 흉기고 병기다.

검으로 찌르면 검이 부러지고, 창으로 치면 창이 튕겨 나갈 거력이 담겨 있었다.

“허억!”

아이들이 놀라서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장기린은 창을 정면에서 한 바퀴 휘돌리는가 싶더니, 손잡이 쪽으로 방패를 옆에서 후려쳤다.

따앙―.

“……!”

황보정에게 타격은 없었으나, 장기린은 어느새 그가 오른손에 든 목검으로 공격할 수는 없는 위치로 반 보 이동해 있었다.

힘이 아니라 기술.

정확한 순간에 적절한 힘이 가해지자 황보정은 표적을 잃은 들소처럼 장기린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기만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자세를 낮췄다가 일어서면서 일격.

휙― 하고 수직으로 올려치는 창의 손잡이를 황보정이 방패로 콱, 틀어막았다.

휘리릭―.

“……!”

사달은 거기서 일어났다.

창의 손잡이 쪽에 달려 있는 붉은색 수실.

혈당(血黨)이라 불리는 끈이 방패를 들고 있던 황보정의 왼손 팔목에 휘감긴 것이다.

황보정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혈당을 이용한 제압술이라니. 창술사들 중에 혈당을 보면 창술사의 공력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그는 다급하게 팔을 뒤로 빼서 수실을 풀어내려 했지만, 웬걸.

어찌나 단단히 꼬였는지 수실이 아니라 쇠심줄로 칭칭 감겨 있는 듯했다.

“흐읍!”

황보정의 온몸에서 다시 한 번 커다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방패를 살짝 옆으로 열어젖히면서 허리를 비틀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목검으로 상대방을 찔렀다.

오대부검(五大夫劍).

전사(纏絲)의 묘리가 담긴 일 초식. 산동 황보세가의 검술이 그림처럼 뻗어 나갔다.

후욱―.

“……!”

검을 찌른 순간 황보정은 알아챘다.

어느새 한 걸음을 물러섰는지 장기린은 검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손목에 걸려 있던 수실도 풀려 있었다. 변검술사도 경탄할 놀라운 솜씨다.

장기린이 겨누고 있던 창끝이 점에서 원으로, 그리고 새카만 어둠으로 다가온다.

휙― 하고 스쳐 지나가는 창날.

창날은 황보정의 얼굴 오른쪽, 뺨을 스치고 멈춰 섰다.

“이런 것도 재밌군.”

낮으면서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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