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12화 (241/686)

5권 12화

제17장 부자유친(父子有親)(12)

까득―.

황보정은 이를 악물었다.

창이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동안 그는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빠르기도 빠르지만 시점이 절묘했던 것이다.

그가 오대부검(五大夫劍)으로 찌른 것과, 창이 날아온 시간은 촌각의 시간차만 있을 뿐 거의 동시라고 해도 무방했다.

어쩌면 고수(高手)의 조건은 간결함일지도 모른다.

회피 후 혈당으로 손목을 감아 주의력을 분산시키고, 찌르기 일격으로 승부를 보는 데까지.

군더더기 없이 물 흐르듯 움직이는 모습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순간적으로 판단해서 움직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와아…… 너무 빨라.”

“내가 뭘 본 거지……?”

사방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황보정은 자신이 패배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과연, 강하시오. 소문이 잘못되지 않았소.”

황보정은 방패와 목검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대리석 바닥에 떨어진 방패와 목검이 데구루루 구르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황보정은 몸을 날려 십팔반병기 중에 언월도를 집어 들었다.

휘리릭―.

빙글빙글 돌리다가 자세를 낮춰 앞을 겨누는 황보정의 동작은 지극히 안정적이었다.

도(刀)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나 엄밀히 따지자면 대도(大刀)이고, 삼국시대 관운장이 쓴 청룡언월도만큼이나 긴 언월도였다.

오른손으로 잡은 손잡이는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칼날 쪽을 잡은 왼손은 바닥을 향해 겨누었다.

칼날까지 위를 향하니, 이는 누가 봐도 첫수를 상방(上方)으로 시작하겠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과 마찬가지.

“한 수 배우도록 하겠소.”

황보정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아래를 겨누고 있던 언월도가 비스듬히 반원을 그리면서 장기린의 창끝을 노렸다.

착창(捉鎗)의 한 수.

왼쪽 위에서 우측 아래로 상대방의 창끝을 눌러 방어하려는 한 수였다.

따악―.

“……!”

당연한 이야기지만, 장기린은 순순히 제압당해 주지 않았다.

로창(櫓鎗)의 한 수.

우측 하단에서 좌측으로 창을 비스듬히 쳐올려서 황보정의 한 수를 막은 것이다.

착(捉)의 요결로 창끝을 물고 늘어지려던 황보정의 노림수는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황보정은 오히려 눈빛이 번뜩였다.

상대방은 처음처럼 피했다가 반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맞받아쳐 주었다.

아이들의 앞에서 창술 대결에 어울려 주겠다는 속내를 보여 준 것이다.

‘이번에는 길게. 해볼 테면 해보라는 것이겠지.’

“차하앗―!”

호협(豪俠)하고 사내다운 것이 황보세가의 기질이었다.

덤빌 테면 덤벼 보라는데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황보정은 양손으로 언월도를 감아쥐고 무지막지한 기세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칼끝으로 사방을 점하면서 크게 휘돌리는 란창(纏欄)의 기법으로 천지사방 막강한 기운을 흩뿌렸다.

따앙― 따앙― 따다당―.

그에 맞서는 장기린은 제자리에 꼿꼿이 선 채로 칼날을 막아 낼 뿐이었다.

그렇게 열 호흡 정도의 공방이 이어졌다.

진왕마기(秦王磨旗)에서 발초심사(撥草尋蛇)까지. 창술의 기본기인 양가팔법이 정심하게 펼쳐졌다.

황보정은 전력을 다해 후려치고, 찌르고, 베려고 하였으나 장기린의 방어는 그 어떤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거대한 성벽을 눈앞에 둔 기분이다. 과연 무쌍귀. 만전(萬戰)을 경험한 자. 그 어떤 공격에도 놀라는 법이 없다.’

황보정은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이대로는 승리가 요원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최후의 한 수를 써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천왕태보(天王太步).

천왕보보다 더욱 큼직한 보폭으로 몸을 날려 한순간에 거리를 좁혔다.

물러나는가?

아니다.

장기린은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황보정과 맞부딪쳤다.

뻑― 하고 거친 소리와 함께 장기린의 창과 황보정의 언월도가 칼날 직전의 목 부분에서 부딪쳤다.

황보정의 전신 근육이 다시 한 번 부풀어 올랐다.

똑같이 손잡이가 긴 장병(長兵)이지만, 황보정의 언월도는 칼날이 크다.

딱 달라붙은 채로 손목만 회전시켰는데도 칼날이 거의 장기린의 목전까지 닿는다.

그런데 창대를 맞댄 상태에서 더 이상 움직이기가 쉽지가 않다.

황보정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전력을 다한다는 사실은 지켜보는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황보정의 양 갈래로 짧게 기른 콧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육척 장신의 거한이 얼굴과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힘을 쓰고 있는데 그를 마주하는 장기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새하얀 가면 너머.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 무심하게 그를 마주 본다.

“흐……읍……!”

결국 먼저 포기한 것은 황보정이었다.

그는 왼발을 옆으로 빼며 궁보 자세로 회전했다.

갈 곳을 잃은 힘이 옆으로 흘러 땅바닥을 내리쳤다.

쾅! 하고, 나무로 된 언월도를 내리쳤는데 대리석 바닥의 파편이 사방으로 튕겨졌다.

“우왓!”

“헙!”

지켜보던 아이들이 굉음과 파괴력에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황보정이 눈을 번뜩였다.

그는 허공으로 펄쩍 뛰어오르면서 공중에서 언월도를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꽈앙!

창대가 둥그렇게 휠 만큼 전력을 다한 일격이었다. 장기린은 창을 비스듬히 돌려 공격을 흘려냈다.

다시 한 번 대리석 바닥이 깨지고 그 파편이 튀어 올랐다.

바로 그 때, 황보정은 다시 한 번 손에서 무기를 놓았다.

“……!”

튕겨나간 언월도가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황보정은 그사이에 정면을 향해 정권을 내지르고 있었다.

순검술과 언월도 창술에 이어 이번엔 무기를 내려놓고 권법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미 두 사람의 몸은 가까이 붙어 있는 상황이었다.

황보정이 큼직한 두 주먹으로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정권을 연이어 뻗어 내자, 장기린이 반보(半步) 옆으로 이동하면서 날아오는 정권들을 창 손잡이로 일일이 쳐 냈다.

꽈과광―.

“흠!”

황보정은 양손을 마치 철추처럼 휘둘러 창대를 확― 하고 붙잡았다.

벽력신권(霹靂神拳)에 이은 태산중수(泰山重手). 황보세가 무공의 화려한 향연이었다.

금나수 수법으로 창대를 붙잡은 황보정의 오른손으로부터 뭔가 거대한 꿈틀거림이 시작되었다.

고오오―.

잔뜩 부풀어 오른 힘이 오른쪽 손목, 팔목, 어깨, 승모근을 넘어 왼쪽 손끝까지 뻗어진다.

“아앗……!”

지켜보던 무산학관 아이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저 모습, 저 꿈틀거림.

본 적이 있었다.

“천근갑(千斤閘)……!”

수업 때 배웠던 소림 칠십이 절예 중의 하나가 실전 대련에서 펼쳐진 것이다.

아이들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대련에 집중했다.

힘이 집중되는 것을 느낀 것일까.

장기린이 처음으로 맞대결을 피하고, 강하게 발을 굴러 진각을 밟았다.

쿠우웅.

연무장이 흔들리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그 강력한 반발력으로 창끝을 위로 반회전시켜 황보정을 떼어 놓았다.

쒜에에엑―!

그리고 이어지는 차창(箚鎗)의 한 수, 정면의 찌르기 일격이 황보정의 가슴 앞에서 멈춰 섰다. 핏― 하고, 황보정의 갈색 무복 앞섶이 살짝 찢어졌다.

황보정은 시뻘건 얼굴로 숨을 몰아쉬면서 양손에 힘을 빼고 자연스레 늘어뜨렸다.

대련은 끝났다.

황보정은 세 가지 무공으로 모두 패배한 것이다.

“후우…… 졌소. 과연, 대단하시오. 겨뤄 봐서 영광이라 말하고 싶소.”

황보정은 지극히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장기린은 그런 황보정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자신의 손에 들린 나무창을 한쪽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팟―.

작은 파열음과 함께, 황보정의 손에 잡혔던 부분에서, 크지는 않지만 짐승이 발톱으로 할퀸 듯한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천근갑이라 불린 무공.

마치 악력만으로 창을 짓누른 듯한 손자국이 남아 버린 것이다.

“대단하군. 창에 손상을 입은 게 얼마 만인지……”

“풍운 노사가 맞상대해 준 덕분이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소?”

황보정은 장기린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공만을 봤을 때. 삼호방주와 비교해선 어떻소?”

“……무공 경지는 삼호방주가 높지만, 기술로는 그대가 더 완성된 듯하군.”

“기쁜 말이로군.”

황보정을 처음으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진정으로 만족했다는 듯 후련한 얼굴로 학관생들을 향해 외쳤다.

“나는 졌다. 하지만 질 만한 분에게 졌으니 아쉽지 않다. 순검술을 사용했을 때 보여 준 노사의 백전연마의 통찰력, 언월도 때 보여 준 융통무애하여 막힘이 없는 창술, 권법을 쓸 때 보여 준 강력함까지. 너희는 오늘의 이 대련을 절대로 잊어선 안 될 것이다!”

황보정의 외침에 학생들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의 대련은 너무나 강렬하여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우와아……! 우와아아……!”

특히 한 사람, 정도가 심하게 몰입한 아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조서인이었다.

옆에 있던 소호가 말을 걸어 진정시켜야 할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서인아. 진정해.”

“대단해……. 창을 어떻게 저렇게 자유롭게 쓰는 거지? 아까 혈당으로 손목 휘감는 거 봤지? 얼마나 연습하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되겠지? 저분도 사람이니까?”

소호는 그것만큼은 나도 모르겠다면서 난감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철우가 단상 위에서 크게 웃으면서 다시 아이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역시, 풍운 노사다. 내가 말했던 게 진짜임을 이제 너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아―, 그러니 이제는 너희의 차례다. 풍운 노사와 대련을 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

아이들이 웅성거리던 소리가 뚝 그치고 침묵이 감돌았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초절한 경지에 오른 고수와의 대련은 매력적이지만, 황보정이 저렇게 일방적으로 질 정도인데 그들이 나서기엔 쑥스럽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렇구나.’

그때 소호는 눈치챘다.

패왕 항우의 가면을 쓴 철우가 소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힐끗 시선을 돌려 아버지 쪽을 바라보니, 그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한 눈빛으로 소호를 바라보았다.

‘그래, 그런 거였어.’

아버지가 자신을 증명하라고 했던 말은 이런 뜻이었다.

최고의 무대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라.

승리한다면 명성을 얻을 것이요, 진다면 무산학관을 떠나야 할 것이다.

‘하여간, 아버지는 뭐든지 너무 극단적이시다니까?’

소호는 웅성거리면서 서로 눈치만 보는 아이들을 보면서, 문득 예전에 섭주해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학관을 변화시켜 보자는 이야기를 할 때의 일이다.

“으음, 무공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무산학관 내에서 ‘이름’을 떨쳐야 해요.”

“어떻게?”

“하나, 앞으로 모든 수업에서 최고의 성적을 올린다.”

“……응?”

“둘, 앞으로 하는 모든 대결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다.”

“그래, 나한테도 어쩌면 좋은 일이었구나.”

소호는 마음을 다졌다.

옆을 바라보니 섭주해와 대미미가 무슨 말이냐는 듯 속도 모르고 웃고 있었다.

“그래. 즐겁게 해 보자.”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무산학관에서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는지 없는지.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다면, 무산학관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

“저요! 제가 해 볼게요!”

소호는 힘차게 손을 들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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