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13화 (242/686)

5권 13화

제17장 부자유친(父子有親)(13)

“헙!”

“뭐……?”

소호는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드는 것을 느꼈다.

경악, 불신, 선망, 질투.

온갖 감정이 뒤섞여 무언의 압박을 만들어 냈다. 사람들이 술렁였다. 당장 옆에 있던 조서인은 물론이고, 섭주해와 대미미, 그리고 다른 백호방의 신입생 아이들도 놀란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백호방의 장소호! 풍운 노사와 대련을 희망하는 게 확실한가?”

“네! 제가 해보고 싶어요!”

“좋다. 앞으로 나와라.”

철우의 허락까지 떨어지자 술렁거리던 아이들이 무거운 침묵에 빠졌다.

소호는 아이들이 양옆으로 비켜서서 만들어 준 길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시선들이 따가웠지만, 지금 소호는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산학관에 남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걸려 있는 대련이었다.

그리고 그 대련 상대는 소호가 아는 사람들 중 최강의 인물. 싸워서 자신이 이기는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물 중의 거물이 아니던가.

‘아버지, 괴물처럼 강하셨네요.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을 밖에서 보니 또 달라. 술래잡기 때는 장난이었어.’

소호는 오싹함을 느꼈다.

무산학관에서 많은 사람들을 봐왔다. 학관장인 가면철왕 철우는 물론이고 수석 교관인 철표와 중걸, 외공사부 황보정과 검술 사부 연홍까지 만만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던가?

그들 모두 무림에서는 당당히 이름을 날리는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단상 앞으로 나와 장기린이라는 사람을 마주하니 알겠다.

달랐다.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자신을 진지하게 상대해 주는 아버지는 근본적으로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그동안 아버지의 십분의 일도 알지 못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 따위는 사소한 일이었다.

눈앞에는 거인이 있었다.

가족일 때는 든든했지만, 적으로 삼는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후우……”

소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장기린은 편안하게 양손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나무창도 창끝이 바닥을 향해 있었다.

흰색의 초라한 베옷. 눈과 입만 뻥 뚫려 있는 흰색 가면 너머로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는 눈빛이 엿보인다.

‘인사해야겠지?’

소호는 황보정이 처음에 인사했던 것을 참고삼아 포권을 취했다.

“저는 무산학관의 장소호라고 해요. 한 수 배우겠습니다!”

인사를 했는데도 대답이 없어서 소호는 힐끗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쏴아아아아―.

“……!”

소호는 거대한 파도가 자신에게 밀려드는 환상을 보았다.

흰색 포말을 일으키며 달려드는, 벽처럼 높고 거대하며 그 속이 심연처럼 어두운 녹청색의 압도적인 파도였다.

조금이나마 드러난 진실한 실력.

장기린의 기파가 소호의 머릿속을 하얗게 물들여 버렸다.

장기린의 두 눈에서 섬광이 번뜩이는 듯했다. 파도가 온몸을 집어삼켰다. 압도적인 투기가 소호를 흠뻑 적신 것도 모자라 천지 사방을 온통 잠식했다. 손끝과 발끝에서부터 일어난 소름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졌다.

소호의 몸이, 손톱 한 조각, 잔털 한 가닥조차 소호에게 외치고 있었다.

위험하다.

싸울 수 없다.

도망쳐라!

소호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이런 사람을 상대로 칼을 든다고……?’

새삼 지난번의 유준이 대단하다 싶었다.

확장된 동공, 달뜬 입술 사이로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천적 이상의 막강한 대적을 눈앞에 두고, 정신과 신체의 괴리가 과호흡을 일으켰다.

소호는 숨을 아무리 가쁘게 쉬어도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소호가 대범하다?

두려움이 없다? 호기심이 강하다?

그래 봤자 열두 살.

이미 완성되어 천하를 논하는 대적을 눈앞에 두자 얼핏 강인해 보였던 정신과 육체는 한계를 드러냈다.

장기린은 진심이었다.

살기를 내지는 않았지만, 절대로 소호를 무산학관에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투기를 내보였다. 소호는 그것만으로도 무너져 내렸다.

입이 벌어지고 동공이 확장되었다. 얼굴은 핏기가 가시며 점점 창백해졌다.

‘답……답해……’

파앗―.

온몸이 모래알만 한 작은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진 것처럼 정신이 지리멸렬하고 있었다.

깜빡. 깜빡.

눈꺼풀을 몇 번 깜빡거렸지만 눈앞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력을 잃었다.

손끝 발끝의 감각도 상실되었다.

후각, 청각, 미각까지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그러자 보게 된 것은 무(無).

광활하고 어두운 세계 속에서 표류하는 ‘나’라는 지성 하나뿐이었다.

기이했다.

신체가 없어지니, 정신이 간절히 신체를 원하다 못해 가상의 육신을 만들어 냈다.

가상의 육신은 신기했다.

손끝, 발끝, 머리카락 한 올과 몸속에 흐르는 피 한 방울조차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작은 소우주가 몸속에 꽉 찬 것 같았다.

소호는 가상의 육신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살아 있는가?

쏴아아아아아―.

“……!”

한 번 들은 적이 있었던 파도 소리가 다시 들려온 건 바로 그 때였다.

깜빡. 깜빡.

소호의 정신이 점멸했다.

어둠뿐이던 세상에 빛이 돌아왔다.

멍하니 바라본 정면에는 장기린이 처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자세와 무심한 눈빛으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장기린의 눈에서 잠시 기이한 빛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뿐이었다.

파도도 없고, 거인도 없었다.

소호는 허탈함을 느꼈다.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니. 대련을 시작하기도 전에 너무 압도적인 경험을 하여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모두 의아한 눈빛이었다.

소호가 왜 혼자서 죽을 것처럼 숨도 못 쉬다가 이제서야 살아났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살아 있어…….’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다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손을 들어 보니 손끝이 여전히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호흡도 개운치는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을 뻔한 것을 애써 꾹 참아 버텼다.

그때 장기린이 입을 열었다.

“무공이란 무엇인가? 대체 무공이 무엇이기에 사람은 무공을 익히면 강해지는가?”

“……!”

나지막하고 듣기 좋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주변 모두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장기린은 소호로부터 시선을 떼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하아……. 후우…… 하아…….”

장기린의 의식에서 벗어나자 소호의 호흡이 점차 편안해져 갔다.

“내 이야기를 잠시 해 볼까? 나는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내가 무공을 익히는지 몰랐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해지기 위해 뭔가를 수련하긴 하는데 그게 무공인지 뭔지는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무공이란 것은 신선들이 한걸음에 산을 뛰어넘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허구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니 나는 내가 무공을 익히는지 몰랐었지.”

아이들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빛내며 경청하고 있었다.

아이들뿐이 아니다. 철우와 교관들도 숨도 쉬지 않은 채 귀를 기울였다.

장기린의 눈은 때때로 허공을 응시했다.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 모양이었다.

“누군가는 의아해할 것이다. 어떻게 무공을 익히는 걸 모를 수가 있나?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특이한 곳에서 살아왔고,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닥치는 대로 뭐든지 배워야만 했다. 그게 무공이든 뭐든 상관이 없었다. 이해하고 익히면 강해져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무언가.’ 그것으로 충분했다.”

“……!”

“숨 쉬는 법, 땅을 걷는 법을 따로 의식하고 배우는 사람이 있던가?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무공이 그러했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무림 강호에 나와 보니, 나는 꽤나 강해져 있었다.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장기린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아이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올해의 신입생들 중 가장 당돌한 아이.

청룡방의 원형주가 분홍빛 비단 무복 자락을 휘날리며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질문이 있습니다! 풍운 노사!”

“무엇이지?”

“풍운 노사의 무공 경지는 어디인가요? 오기조원? 반박귀진?”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아이는 아이였다.

급을 나누고, 강함의 순위를 매기는 것만큼이나 재밌는 건 이 세상에 없다.

학생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랬다.

그 질문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점이었다.

항상 잘난 척을 하는 원형주를 좋아하는 학생은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모두가 감탄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았다.

“무공의 경지란 칼로 물 베듯 나눌 수는 없다고 들었다만?”

“그, 그래도 분명 어딘가에는……!”

“반박귀진, 반로환동. 그런 말들은 적이 있다. 육체가 깨끗하게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던데…… 비슷한 일은 있었다. 여기 이것.”

장기린은 가면 때문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오른쪽 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원래는 어릴 적에 잘렸었던 귀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충격적인 사건 뒤에…… 정신을 차려 보니 귀는 멀쩡히 붙어 있었다. 몸도 가벼워졌고, 원하는 동작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예……?”

아이들이 놀라며 장기린의 귀를 바라봤다.

장기린의 오른쪽 귀는 반쯤 잘려 나간 상태였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잘린 게 나았다가 다시 잘렸다는 소리인가?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각자 이야기를 나눴다.

반박귀진이니 반로환동이니.

임독양맥이 타동되면 온몸의 상처가 낫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아이들이 떠들어 댔다.

“잠깐! 너희들 다 조용히 해 봐! 그게 언제예요? 언제 그런 일을 겪으신 겁니까?”

“열여섯쯤이었던 것 같군. 너희들보다 몇 살 위였을 거다.”

“……!”

열여섯에 반박귀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지라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몇몇 아이들은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면서 홀린 듯한 얼굴로 선망의 빛을 내비쳤고, 몇 명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장기린을 멍하니 응시했다.

전체적으로 못 믿는 아이들이 더 많았지만, 대놓고 반박하는 아이는 없었다.

상대는 어쨌거나 절정을 초월한 지고한 경지의 고수였다.

진지한 그의 목소리에서 거짓을 찾아내기란 힘들었다. 철우가 보증한 무인이란 점도 더욱 의심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도 나중에는 결국 내 대적에게 귀를 잃었으니, 어차피 귀를 잃을 운명이었다는 것이겠지.”

담담하게 말하는 장기린에게서는 백전을 넘어선 경험이 잔잔한 향기처럼 물씬 풍겨 나왔다.

아이들을 말을 잃었다.

그 기운, 그 기세.

일찍이 아이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충격이었다.

“무공이란 그런 것이다. 결국은 강해지기 위한 것. 그걸 매일의 일상 속에 녹여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어나서 숨을 쉬는 삶의 모든 것에 무공의 이치를 담아라. 따로 무공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무공은 특별한 게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삶이 어려운 것이라며, 장기린은 나직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멍해져 있는 모두에게서 몸을 돌려, 다시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바라봤다.

“이만하면 되었겠지. 무산학관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스스로를 증명해라. 나의 소매를 잡으면 너의 승리다.”

휙.

가볍게 한손으로 들어 올린 창이 소호를 겨누었다.

“와라. 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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