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14화 (243/686)

5권 14화

제17장 부자유친(父子有親)(14)

충천(衝天)하는 기세.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잔잔한 위압감이 사위를 잠식했다.

소호는 어느새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상해요. 아버지. 왜 기분이 좋을까요?’

기세만으로도 압도당해서 죽을 뻔한 게 방금 전이건만.

희한하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전해서 승리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쿵.

소호는 발을 굴렸다.

치솟는 호연지기가 있어서 소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은자촌의 악동, 장소호! 갑니다!”

새하얀 가면 너머로 장기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어이가 없는지 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뭐……?”

소호는 작게나마 이겼다는 생각을 하면서, 장기린을 동요시킨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몸을 날렸다. 아지랑이 같은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뒤를 잡았다.

무산학관의 입관 시험 때 사용했던 묵신 할아버지의 신법이다.

소호가 장기린의 뒤통수를 보며 재빨리 손을 뻗었다.

소매.

소매만 잡으면 소호의 승리였다.

후우웅―.

“……!”

당연한 일이지만, 승리의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장기린이 쳐다보지도 않고 휘두른 창대가 소호의 명치 아래, 중완혈을 정확하게 꿰뚫으려 했다.

“우왁!”

소호는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갈지(之)자로 꺾었다.

반격이 올 거라 예상을 하긴 했었는데 그래도 너무 빨라서 반응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도 이 다음은 몸을 돌리면서 횡격을 날리시겠지?’

아니나 다를까 천하를 둘로 가르듯 올곧은 수평 횡격이 날아왔다. 소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앞으로 구를 듯이 뛰어들어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뒷발을 힘차게 차올렸다.

팡! 하고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장기린이 창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소호의 발을 막았다.

마치 전갈 같은 모습.

소호가 바닥을 짚고, 뒷발을 위로 뻗은 자세가 놀랍도록 유연했다.

“흠!”

장기린이 감탄인지 실망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소호는 화과산에서 뚝 떨어진 돌원숭이 같았다.

통통 튀는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그대로 장기린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엔 허공에서 장기린의 목덜미를 향해 원앙각을 뻗어 냈다.

빙글 돌아가는 몸, 쭉 뻗은 다리 끝에 전사경의 묘리로 힘이 가득 담겼다.

“……!”

그 순간, 소호는 오싹한 느낌에 공격을 중단하고 뒤로 몸을 날렸다.

예감은 정확했다. 대체 언제 찔렀는지 장기린의 창이 비스듬하게 아래쪽에서 솟구쳐 있었다. 원앙각을 끝까지 찼다면 옆구리가 찔렸을 위치였다.

“휴우.”

소호는 동요를 감추지 못한 채 한 걸음 물러서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차분하게, 차분하게.”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였다.

웃는 얼굴인데 두 눈만큼은 무섭도록 진지하게 빛났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소호는 다시 한 번 달려들었다.

전질보, 등각, 태극권.

분명 기본적인 무공인데 시의적절해서 장기린조차 피하지 못하고 직접 막아야 하는 공격들이 수십 번이나 터져 나왔다.

파파파팡―.

노력했지만 장기린이라는 벽은 높았다. 소호의 공격이 멈추는 순간, 그 틈을 귀신같이 파고든 창이 소호를 후려쳤다.

“컥.”

소호는 화살을 맞은 참새처럼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부들부들 떨면서 필사적으로 호흡하니 몸 상태가 조금 정상으로 돌아온다.

아팠지만 시선은 여전히 장기린을 향해 있었다.

장기린의 움직임, 습관, 공격 경향을 완벽하게 파악해야만 했다.

‘어떻게 저렇게 얄밉도록 빈틈이 없지?’

소호는 잠시 입을 삐죽였다.

어느새 장기린은 처음 자세 그대로 다시 소호를 창으로 겨누고 있었다.

“너무하시네……!”

소호는 새삼 아버지의 위대함을 느꼈다.

단단하게 완성된 성벽을 공략하듯 전후좌우 어디에도 빈틈이 없지 않은가.

“어르신의 무공, 누구나 아는 태극권. 조금 빨라졌지만……. 그뿐인가.”

장기린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변한 게 없군. 무산학관에선 무엇을 배운 거지?”

“윽.”

소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쪽팔렸다.

소호 한 명의 부족함이 무산학관 전체를 욕 먹이고 있었다.

소호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화탄을 썼던 지난번과는 달리 지금은 그가 가진 무공만으로 장기린을 상대해야 했다.

고민하길 잠시, 소호는 연무장 한편에 세워진 무기들 중에 목검을 꺼내 들었다.

“검……?”

“장소호가 목검을 들었어!”

“쟤가 검술을 했던가?”

“아까 동작 봤잖아? 엄청나게 빨라. 뭔가 해낼 것 같아.”

지켜보던 아이들이 놀라서 수군거렸다.

소호는 자세를 살짝 낮추면서 상대방의 중단을 겨누는, 무산학관에서 배운 기본 검술 삼십육형의 기수식을 취했다.

머릿속엔 묵신 할아버지에게 배웠던 말들이 떠올랐다.

‘공격을 피하는 게 아니다. 공격이 닿지 않는 곳으로 움직이는 것이지. 그 둘의 차이점만 깨달아도 너의 목숨을 두 번은 살려 줄 것이란다.’

“으음”

소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장기린의 주변, 직경 이 장(丈) 정도의 공간에서만큼은 장기린의 창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거리. 거리가 필요해. 맨손으론 너무 짧아.’

검을 잡은 이유는 그래서였다.

‘내 의지를 보여 줘야 해.’

고오오―.

불요신승 할아버지에게 배운 역근경 진기가 강물처럼 도도하게 흘러나갔다.

소호는 가진 바 모든 것을 쏟아붓기로 했다.

달려들어 휘두르는 검, 좌측에서 시작된 검이 파도치듯 너울거리면서 장기린을 밀어붙였다.

“그건……!”

장기린의 목소리에서 동요가 느껴졌다.

눈빛에서 미미한 분노마저 들끓는다.

딱!

창대로 소호의 목검을 거칠게 쳐 낸 장기린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말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왜 하필 그 녀석을 따라하는 것이냐?”

“……제가 아는 제 또래 중에 제일 강하거든요.”

소호는 신들린 듯 움직였다.

마구간에서 봤던 장기린과 유준의 대결을 떠올렸다.

끼어드는 것조차 잊고 넋 놓고 지켜보던 그때의 검술 동작들이 얼마나 압도적이고 아름답던가.

망설임 없는 유려한 움직임.

차가우면서 효율적인 군더더기 없는 검 동작.

소호는 유준의 동작들을 상상했고, 그대로 자신에게 흡수했다.

아직 몸집이 작은 열두 살 꼬마지만,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검에서는 검이 떨쳐 울리는 검명(劍鳴)까지 났다.

장기린의 분위기가 변했다.

보폭을 넓게 벌리고 왼손을 앞으로 쭉 뻗는다.

번뜩이는 눈빛.

오른손에 들린 나무창이 번개가 되어 상대방을 꿰뚫었다.

파아아―!

일연적룡무(一衍赤龍舞)

장기린의 진신무공 제 일 초식이 쾌속으로 소호의 머리를 꿰뚫었다.

아니, 꿰뚫은 듯 보였다.

“……!”

소호는 머리카락 한 올 만큼의 차이로 창을 피한 채 달려들고 있었다.

두려움 따위 없는 것일까?

마치 일연적룡무를 쓰길 기다렸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충격의 여파로 퍽, 하고 코피가 터져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소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 무섭도록 집중한 눈에서 광망이 번뜩였다.

“공격을 피하는 게 아니다. 공격이 닿지 않는 곳으로 움직이는 것이지…….”

묵신 할아버지의 조언을 중얼거리면서 자세를 낮춘다.

부드럽게 반회전 하면서 수직으로 베어 올린 목검이 허공에 커다란 반월을 그려 냈다.

장기린이 가면 쓴 얼굴을 옆으로 젖히고, 그 옆을 소호가 휘두른 목검이 스쳐 지나갔다.

스륵―.

“……!”

섬뜩한 소리와 함께 장기린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성공이다!’

소호는 소리쳐 웃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소호가 무산학관에서 배운 것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펄쩍 뛰어오르는 소호.

그의 손에서, 연홍 사부와 함께 수련했던 기본 검술 삼십육형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피슈슈슈슉―.

“하앗!”

낭랑한 외침과 함께 찌른 목검들은 엄중하게 뻗어 낸 장기린의 창에 모조리 가로막혔다.

하체를 노리든, 손목을 노리든 모조리 막혔다.

소호는 거기서 양손으로 목검을 붙잡고, 천지인(天地人), 삼재검법처럼 기본적인 수직 베기를 전력을 다해 내리쳤다

따악―.

공격은 수평으로 창대를 세운 장기린에게 너무나 가볍게 막혀 버렸다.

힘의 차이는 명확했다.

냉엄한 장기린의 눈빛 아래, 소호가 씩 웃으면서 양손에서 힘을 풀어 버렸다.

휘리릭―.

“……!”

목검이 빙글빙글 돌면서 허공으로 튕겨나간다.

소호는 양손을 철추처럼 휘둘러 장기린의 창대를 확― 하고 붙잡았다.

황보세가의 태산중수.

파권 황보정이 보여 줬던 금나수 수법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창대를 잡은 양손에서 시작된 꿈틀거림이 양손의 손가락 끝부터 시작되어 전완근, 팔꿈치, 이두박근과 어깨로 전달되었다.

소호는 장기린이 들고 있는 창대에 나무에 매달리듯 매달린 채로 온몸을 튕겨 발을 위로 차올렸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 소호와 장기린의 시선이 마주쳤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 서로의 뜻을 알기에 충분했다.

“저 실력이 많이 늘었죠?”

“악동 녀석, 정말로 끝까지 해볼 거냐?”

마주치는 시선.

교차하는 마음.

쉬이익―.

천근갑의 힘이 모조리 담긴 등각(登脚)이 허공에 반월을 그려 냈다.

무산학관 연무장 안에서 크나큰 함성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

“창에서 손만 떼면 피할 수는 있었어. 내가 전장에서 지낼 때의 습관 때문에 무기를 손에서 잘 안 놓긴 하지만……. 하려면 할 수는 있었지. 만약 그것까지 계산했던 것이라면 더 대단한 거긴 하지만 말이야. 어쨌거나 소호가 그렇게 절실한 건 처음 봤다. 떨쳐내기가 쉽지 않더군.”

장기린은 며칠 전의 일을 되새기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맞은편에 있는 두 사람은 그런 장기린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들 중 얼굴이 까무잡잡한 사내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끼어들었다.

“대형, 대형에게 소호의 자랑을 듣는 건 언제든 기쁘지만……. 일단 그것부터 말해 주세요. 서찰 내용이 진짜입니까?”

“아, 그거 말이군.”

장기린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구 너, 무산학관에서 교관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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