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15화 (244/686)

5권 15화

제17장 부자유친(父子有親)(15)

소호는 대결이 끝나고 한 시진쯤 지났을 때 정신을 차렸다. 입안은 텁텁했고 뭔가가 잔뜩 바스락거리는 콧속에서는 쇠 맛이 느껴졌다.

그래도 정신을 차린 것은 은은한 연꽃 향 때문이었다.

부드러우면서 진한, 봄날의 따스한 햇볕처럼 여운을 남기는 향은 싫어할 수가 없다.

소호는 늘 연꽃 향이 나던 집을 기억하고 있었다. 들판에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필 때쯤엔 아버지가 항상 어디선가 연꽃을 두 송이씩 들고 오곤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가 기뻐했던 모습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

소호가 눈을 번쩍 뜨니 샛노란 옷자락이 그를 반겼다.

“일어났어, 아들?”

“어머니!”

소호는 벌떡 일어나려다가 헉, 하고 단말마를 내지르며 다시 벌러덩 누워 버렸다.

“으아아,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요……!”

“그럴 줄 알았어. 넌 어릴 적부터 그랬어. 꼭 한도를 모르고 까불다가 집에 와서야 끙끙거리잖니?”

“으으, 내가 그랬었나?”

“그래. 우 대인이 그러셨잖아. 자신의 한도를 아는 게 중요하다고. 몸이 정해 놓은 한도를 자꾸 넘어 버리니까 아픈 거라고 말이야.”

“히힛, 그래도 할 수 없었어요. 상대가 아버지였으니 한도를 넘어야…… 아얏!”

“하여간, 너는 어쩜 그리 네 아버지랑 똑같니? 엄마 걱정시키는 게 빼다 박았어, 아주.”

소호는 진휘연이 작게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며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꼬집힌 옆구리는 아팠지만, 얼얼하던 아픔은 금방 아련하게 사라졌다.

“네 몸을 스스로 관리하고 다룰 수 있어야 비로소 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하나부터 열까지 이렇게 걱정만 하게 만드니 어떻게 엄마가 마음 놓고 너를 학관에 보내 놓겠어?”

“평소엔 잘 관리하는데…….”

“남자들은 왜 그러니? 꼭 한도를 넘어서라도 싸워서 결판을 내야 해?”

“네! 그렇지 않으면 납득할 수 없어요. 가끔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있다구요.”

소호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위엄 있게 말해 보았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단호함을 보여 줬을 때와 같이 호랑이처럼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후후훗.”

그런데 어째선지 어머니는 소호의 볼만 쭉쭉 잡아당기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네 몸을 아끼렴, 소호야. 그래야 엄마랑 아빠가 마음 놓고 너를 학관에 맡기지. 안 그러면 진짜로 데리고 가 버린다?”

“으우, 그럴게요.”

소호는 양 볼이 휘연의 손에 붙잡힌 채로 대답했다. 그녀는 진지한 눈빛으로 소호를 지그시 응시했다.

“대충 대답하지 말고.”

“대충 아닌데…….”

“명심하렴. 아버지는 가족이 위험하다고 하면 나라랑 전쟁도 치를 수 있는 사람이야. 엄마는 지옥 불이 활활 타고 있어도 그 안에 들어가서 가족을 들쳐 업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이고.”

“우응?”

소호는 볼이 붙잡힌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니는 예를 들고 있을 뿐일 텐데, 이상하게도 분위기가 묘하게 실감났다.

마치 진짜 있었던 일 같았다.

“에이, 설마.”

“진짜야. 아들. 우린 그럴 수 있어. 그러니까 항상 조심해서 다치지 말아야 해. 안 그러면 큰 일 난다?”

“알았어요, 어머니. 조심할게요.”

“너를 위해서만이 아니야.”

“네?”

“명심해. 너의 안위는,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야.”

“네……?”

“알았지?”

“……네에.”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자신을 위하고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만큼은 넘치도록 느껴졌기에 소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다.

그러고 보니 기절하기 전의 상황에 생각이 닿았다.

천근갑의 힘을 담아 뻗어 낸 최후의 발차기가 아버지의 소맷자락에 닿았었는데……. 그 이후에 기뻐하면서 곧바로 의식을 잃어버려서 결과를 모르는 것이다.

“어머니, 그럼 저기…….”

“응?”

“나 무산학관에 남아도 되는 거죠?”

어머니는 언제나 그랬듯이 연꽃 향이 물씬 풍기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전에 말했듯이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만 남아 있었는데…… 그건 소호가 잘 해낸 것 같아.”

“진짜요?”

“아들. 이제 다른 건 걱정하지 마. 나머지는 엄마가 알아서 할게.”

“……!”

어머니로부터 보증을 받으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소호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해냈다.

자신의 힘으로 무산학관에서의 삶을 쟁취해 낸 것이다.

“그러니까. 학관 생활 열심히 하고 많이 배우렴. 주해랑 미미도 잘 챙겨 주고.”

“히힛, 네! 걱정 마세요!”

그 후로도 무산학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욱신거리던 느낌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어머니가 손을 놓자마자 소호는 벌떡 일어났다.

“으음!”

막상 일어나고 나니 살짝 열려 있는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깥 공기가 쌀쌀하다는 게 느껴졌다. 꽉 껴안아 주던 어머니의 따스함이 꿈만 같다.

어머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밖을 향해 손짓했다.

“친구들은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한번 나가 보렴.”

“어? 진짜요!”

“그래. 좋은 아이들이더라. 특히 서인이라는 아이랑 말이 별로 없는 여자아이.”

“어어…… 네?”

서인이는 그렇다 치고, 말이 별로 없는 여자아이라니?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 사람을 어머니가 어떻게 만났나 싶었다.

“아빠랑 나랑 여기서 한동안 있을 테니까. 이따가 다시 영웅객잔으로 돌아오렴. 할 이야기가 많단다. 아빠랑도 다시 한 번 이야기해야지?”

“네!”

소호는 어머니께 손을 흔들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호가 있던 곳은 영웅객잔 안의 큰 방이었던 모양이었다.

방에서 빠져나왔는데, 신기하게도 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커다란 접객실이 나타났다.

‘우와, 영웅객잔에 이런 곳이 있었어?’

아무래도 전에 왔을 때는 일 층에서 차만 마시고 가느라 몰랐던 모양이었다.

접객실에서는 백호방 아이들이 모두 모여 다과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뭔가를 열정적으로 토론하고 있었는데, 소호는 자신의 이름이 자주 들려서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거기서 소호가 목검을 놔 버리고 권법으로 전환해서 달라붙지 않았다면 못 이겼을 거라고. 둔재라서. 보는 눈도 없냐?”

“또 둔재래! 아니라니까. 소호는 창술도 뛰어나. 창으로 겨뤄서 병기의 길이가 비슷했다면 빈틈을 노려서 소매를 건드리기가 더 쉬웠을 거야.”

“아니, 풍운 노사의 무공을 못 봤냐? 그 무시무시한 파권 사부가 손도 한 번 못 써 보고 당했어. 근데 그게 가능하면, 소호가 파권 사부보다 강하다는 거냐?”

“그건, 그렇다고 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소호니까. 대결에선 뭔가 해낼 것 같다고 할까…….”

“하긴, 그렇게 듣고 보니 뭔가 해낼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권법이라 창술에 통한 면이 있는 거야. 창 같은 장병기는 근거리에 약하다고 인정해, 이 창쟁이 녀석아.”

“인정 못해. 창은 지상 최고의 병기야.”

“이렇게 멍청할 수가!”

은위군과 조서인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진지한 얼굴로 열렬히 토론하고 있었다.

은위군이 저렇게나 많은 말을 한다니, 처음 알았다. 그것도 조서인을 상대로 말이다.

‘아…….’

소호는 잠시 제자리에 멈춰선 채 백호방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차를 마시고 있는 섭주해와 윤지관.

대미미와 마희희는 둘이 나란히 앉아서 다과를 오물오물 먹고 있었고, 토론하는 소년들 옆에서 봉천과 철우, 그리고 백설지가 토론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 난 이 생활을 지켜 낸 거구나.’

코끝이 찡했다.

부모님의 힘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처음 뭔가를 이뤄 냈다고 생각하니 더욱 감동적이었다.

“파하핫! 이 녀석들아. 그만 다퉈! 이변의 주인공이 나타났는데 계속 토론할 거냐?”

“어?”

“소호!”

중년 사내처럼 너스레를 떠는 십 대 소년 철우를 시작으로 모든 아이들이 소호를 반기며 웃어 주었다.

소호는 환하게 웃으며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

“아버지.”

소호는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아버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럴수록 왠지 모르게 아버지가 불편했다.

예전에 추룡 삼촌이 소호에게 ‘구국의 영웅을 아버지로 둔 기분이 어떻냐?’라고 조용히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자기는 아버지 때문에 가출해서 군부에 투신했던 거라면서, 얼굴에 길게 그어진 흉터를 일그러뜨리며 호탕하게 웃던 추룡삼촌을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능력을 알면 알수록 넘어야 할 산이 높아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될 수 있을까? 라고 늘 비교하면서 생각하게 된다.

‘추룡 삼촌이, 자기 맘을 알게 되면 꼭 연락하랬는데.’

문제는 그 말을 한 삼촌이 서역으로 여행을 떠나 버렸다는 것이다.

대체 언제 돌아올 것인가.

아니, 돌아오긴 할 것인지 그것도 알 수 없다.

“소호.”

소호는 움찔 몸을 떨었다. 어머니가 볼일이 있다면서 나가 버리는 바람에 장기린과 단둘뿐이었다.

‘혼나려나?’

잘못한 것들이 몇 가지 떠올라서 불안했다.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고 있으니 후우, 하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 봐라. 소매가 갈라진 게 보이느냐?”

“네?”

“너 때문이다. 잠시 놀아 주려고만 했는데 옷이 찢어져 버렸다.”

소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기린이 내민 소매를 바라보았다.

늘 하얗고 정갈한 흰색을 유지하던 무명옷이 엄지손가락 하나 정도의 길이로 거칠게 찢어져 있었다.

“그게, 저기……. 그냥 툭 건드리기만 하려고 했는데……. 닿을지 몰라서 힘을 주는 바람에…….”

“잘했다.”

“네?”

“잘했다, 소호야. 무산학관에서 노력했구나.”

소호는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장기린이 어색한 얼굴로, 마치 늑대가 토끼를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소호는 그 얼굴을 보니 감정이 격해져서 재빨리 고개를 푹 숙였다.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뭘 걱정했던 거냐고 스스로 묻고 싶었다.

“나는……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동류였지.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잔인하고 사람 목숨을 가볍게 보는 짐승 같은 자로 변해 있었어. 누군가에게 목줄을 쥐여야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맹수 같은 자였다.”

소호는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장기린의 말에 자연스레 집중했다.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이내 안타깝고, 그리고 두려워졌다. 내가 만약 휘연이나 운화, 운찬이나 진구처럼 나를 믿어 주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도 저렇게 변해 버렸을까? 라는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변의 가족들을 더욱 소중히 하기 시작했지.”

소호는 고개를 들었다.

만전의 싸움과 수많은 일을 경험한 아버지가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준이라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그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 아이도…… 마치, 사랑해 주는 가족을 만나지 못한 너의 모습을 보는 듯했지. 그래서 더욱 너를 학관에서 데리고 나가려 했다. 그 아이와 같은 공간에 있다가 너 또한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그 때문에 휘연에게 혼났다면서, 장기린은 나직하게 웃었다.

“진정한 부모라면 자기 자식을 믿어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전혀 몰랐어요…….”

“부모는 자식이 자신과 같은 실수를 하는 게 싫은 법이라고 하더군. 혹시 모르니 안전장치는 해 뒀지만……. 소호야.”

“네, 아버지.”

“사람다운 사람이 되거라. 약속할 수 있겠느냐?”

사람다운 사람.

소호는 진지하게 생각을 거듭한 후 승낙하였다.

“예. 사람다운 사람이 될게요.”

“그래. 그럼 됐다.”

장기린은 뒤끝을 담아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나직하게 웃는 장기린.

그가 소호에게 앉으라며 자리를 권했다.

“이야기를 해 보자. 무산학관에서의 이야기를 해다오.”

“그게…….”

소호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품을 떠나보냈던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시간을 잊을 만큼 길게 이어졌다.

“그런데 아버지. 안전장치가 뭐에요?”

“그런 게 있다.”

소호가 알게 될 순간이 기대된다면서 장기린은 웃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