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16화 (245/686)

5권 16화

제18장 무산 철공주 (1)

무산학관의 하루는 빠르게 시작된다. 학관의 모든 학생들은 묘시(卯時:오전 5시에서 7시)가 시작될 때쯤 들리는 타종 소리에 일어나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멍한 얼굴로 연무장으로 걸어가곤 했다.

처음엔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학생들도 많았지만, 그런 아이들은 각 기숙사의 방장들이 얼굴에 물을 뿌려 버리기 때문에 강제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분노한 마희희가 봉천에게 항의했으나, 결국 전통이라는 명목하에 물러난 사건도 있었다.

연무장에서는 지, 용, 체 구분 없이 학관의 모든 학생들이 모여 태극권을 수련하고, 그 뒤에는 해산하여 그날의 수업을 준비한다.

식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식사를 하고, 목욕을 하고 싶은 사람은 목욕을 했다.

그리고 사시(巳時:오전 9시에서 11시)가 되면 드디어 무산학관의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된다.

“으음…….”

소호는 아직 새벽의 쌀쌀함이 남아 있는 공기를 느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뭔가 아이들의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같이 수업 받는 학생들이 소호를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심지어 기초 검술을 가르치는 연홍 교관과도 미묘하게 자주 시선이 마주쳤다.

‘아버지와의 대련 때문일까?’

섭주해의 조언대로 명성을 얻은 것은 좋은데, 그 대가가 이런 건가 싶었다.

“새로 받은 각반은 괜찮은 것 같아. 그치?, 서인아?”

“으응, 맞아. 주작방이 신경을 쓴 것 같아. 가죽도 좋고, 몸에도 착 달라붙어.”

조서인은 자신이 따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진한 갈색의 각반을 손으로 매만졌다.

“히힛, 발목 쪽에 ‘주작방 기증’이라고 쓰여 있어.”

“맞아! 그, 뭐랄까. 주작방이 내기에 졌으니 주긴 주는데, 이게 최후의 자존심 같다고나 할까…….”

“그렇네. 졌는데 선물까지 해야 하니 분하긴 했겠다.”

소호는 조서인, 은위군, 대미미가 다 같이 차고 있는 각반이 단체로 맞춘 것 같아서 좋았다.

“서인이가 먼저 할래?”

“그게…… 그래! 내가 먼저 해 볼게.”

소호와 조서인은 둘 다 목검을 들고 있었다.

오늘은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하단 공격을 서로 집중적으로 연습하는 날이었다.

아무리 연습용 목검이라도 사람의 몸에 맞으면 뼈를 부러뜨릴 수 있었다. 각반을 차지 않는다면 부상자가 나올 게 뻔했다.

“그럼 갈게!”

“좋아!”

조서인이 기본 검술 삼십육형을 차근차근 펼치기 시작하고, 소호는 날아오는 검격을 똑같은 기본 검술 삼십육형 중 하나로 부드럽게 막아 냈다.

땅! 따당!

모든 아이들이 둘씩 짝을 지어서 수련하고 있는 터라 사방에서 목검과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펼치고 막고, 공격하고 방어하고.

혼자서 익힐 때는 느낄 수 없는 감각들을 배워 나갔다.

빠아악―.

“……!”

그러던 어느 순간, 기계적으로 반복된 동작을 하던 학생들이 한순간 돌처럼 굳어 버렸다.

“꺅!”

사람은 위기를 느끼면 자연스레 눈으로 원인을 찾기 마련이었다.

소호의 시선이 자연스레 반쯤 부러져서 덜렁거리는 목검과 그 목검을 부러뜨린 상대방에게로 향했다.

“미미……?”

소호는 깜짝 놀라 검을 내리고 대미미를 응시했다.

분홍색 비단 무복을 입고 예쁜 당혜를 신은 소녀. 새카만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내린 통통하고 귀여운 소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하고 있었다.

“이, 이건……! 그게…… 어이쿠, 내가 잘못했네! 교관님, 죄송합니다. 제가 방어를 하려다가 힘을 너무 줘서, 실수했습니다!”

덜렁거리는 목검을 들고 있는 소년이 천둥치듯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사실 소년이란 말을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로 큰 체구를 지닌 아이였다. 키가 대충 봐도 오척이 훨씬 넘는데다 덩치도 커서 마치 작은 곰을 보는 듯했다. 분명 다른 십이 세, 십삼 세의 아이들과 또래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턱은 사각형으로 각이 졌고, 아직은 통통한 부분이 있지만 떡 벌어진 어깨에 코밑에는 벌써 거뭇거뭇 어설픈 수염이 나기 시작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전상.

올해 용 시험 차석으로 합격한 신입생이자, 대미미를 추종하면서 곁에서 보필하는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흐응? 대단하네. 힘이 세다고 듣긴 했는데.”

“저 정도면 상식 밖인데? 어떤 외공을 익힌 걸까?”

“외공을 익힌다고 되는 거야? 저런 건 처음 봤어…….”

그가 대미미를 감싸 주려는 마음은 기특하지만, 아이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한쪽의 목검만 박살이 났다면, 박살 낸 쪽이 강력하다는 것쯤은 당연한 진리였다.

‘단단한 목검이 폭발한 것처럼 중간이 터져 버렸어. 미미가 힘의 제어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소호는 목검이 부러진 모양을 보며 힘의 흐름을 추측했다.

“죄, 죄송……해요.”

대미미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사과하는 순간, 그녀의 손에 잡혀 있던 목검에서 빠득― 하고 뭔가가 구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소녀가 허둥지둥 자신의 목검을 살핀 뒤 당황하며 양손으로 목검을 붙잡았다.

미미의 왼편에 있던 소호는 분명 똑똑히 보고 말았다. 목검에는 소녀의 손자국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하아―, 너네는 정말 특이하구나. 특이한 신입생들이야.”

화검 연홍 사부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용 시험 합격자들은 항상 힘을 갈무리하는 연습을 하도록 하렴. 너희는 보통 사람들보다 힘이 세잖니? 다행히 목검은 많으니까 저쪽에서 ‘둘 다’ 새 거 가져와서 연습하고.”

“네, 네!”

대미미가 가지러가기도 전에 전상이 재빨리 뛰어가 두 사람 몫의 목검을 들고 돌아왔다.

그 뒤의 수업은 순조로웠다.

대미미가 극도로 긴장한 듯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지만 그 외의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나니 대미미는 축 처진 얼굴로 소호에게 터덜터덜 걸어왔다. 소처럼 순박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오라버니이…….”

“미미야!”

소호는 울상이 된 미미를 보며 옛날 일을 기억해 냈다.

아마 사오 년쯤 전에, 여덟 살 정도 되는 꼬마 시절에 딱 한 번 미미는 이런 얼굴로 소호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날은 대석 삼촌과 연 부인이 처음으로 부부 싸움을 했던 날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마음이 심란했던 미미는 소호네 집으로 도망쳐 왔고, 평소에 쓰던 젓가락과 소호가 아끼던 팽이를 부쉈다.

악력으로.

“무슨 일이야, 미미야?”

“그게…….”

대미미는 우물쭈물하며 주변을 살폈다.

소호의 결정은 빨랐다.

“좋아! 주해! 주해가 필요하다. 모여서 회의를 하자!”

다행히 다음 수업이 시작되기까지 한 시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소호는 대미미를 붙잡고 곧바로 그들의 보금자리인 백호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옆에 있던 조서인이 “어어?” 하는 사이에 그도 소호의 여정에 함께 합류하게 돼 버렸다.

전상과 덩치가 큰 소년 몇 명은 이런 일이 이미 몇 번이나 있었던 사람처럼 그들을 지그시 지켜보면서 멀어졌다. 마치 멀리서 응원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어머님과 약속한 게 있었다는 거지?”

“으응. 어제 오라버니의 아버님, 어머님을 뵙기 전에는 잊고 있었어. 엄마가 낙양에 가서 마음이 내키면 한번 가 보랬는데…….”

“마음이 내키면?”

소호는 약속의 조건이 넓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정도면 약속이라기보단, 그냥 조언이나 권고 정도에 가깝다.

“가고 싶어지면 한번 가 보라고...... 아니면, 도움이 필요해지면 가 보라고 하셨어.”

“그래? 거기가 어딘데?”

“나도 놀랐었는데……. 나한테 할아버지가 있대!”

“뭐어?”

소호, 섭주해, 조서인.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이 동그래져서 놀랐다.

“할아버지? 친할아버지?”

“응!”

“와아, 그랬구나. 근데 왜 지금까지 몰랐지? 한 번도 못 뵌 거잖아?”

“으응, 그게, 할아버지랑 우리 엄마, 아빠랑 싸운 적이 있으시대.”

“아……그렇구나.”

“그래서 한 번도 못 뵈긴 했는데……. 엄마가 그렇게 고민하는 건 처음 봐서……. 신경이 쓰여.”

대미미는 섬세한 소녀였다. 어머니가 고민하던 모습이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스스로도 고민하고 있었다.

소호는 문득, 은자촌에 있을 때 거의 매일 보곤 했던 대미미의 어머니, 연 부인을 떠올렸다.

키가 육척에 가까운 장신에 길쭉한 팔다리를 지닌 미인.

아이들에겐 항상 상냥하고 대석 삼촌에게도 부드러운 여성이었지만, 성정이 호탕하고 결정을 단칼에 내리던 여걸이었다.

‘그런 연 부인이 고민을……?’

소호는 대미미가 고민할 만하다고 느꼈다.

화통한 성격의 연 부인이 고민, 고민하면서 미미에게 부탁한 일을 잊고 있었으니.

대미미처럼 착한 성격에 수업이 눈에 안 들어올 만도 했다.

“그러니까. 어머님께서 할아버지를…… 볼 수 있으면 보라고 하셨다는 거지?”

“응. 도움이 필요하면 가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긴 하셨어.”

“할아버지가 어디에 계신데?”

“낙양! 낙성다루에 가서 그걸 보여 주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어.”

“그거?”

대미미는 잠시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손바닥만 한 비단 전낭을 하나 꺼내 왔다.

분홍빛 비단 끈을 끌러내니 그 안에서 중후한 황금빛이 번뜩였다.

“헙?”

황금과 인연이 없는 삶을 살아온 조서인은 눈을 크게 뜨면서 굳어 버렸다.

소호는 호기심에 얼굴을 삐쭉 앞으로 내밀었다.

대미미가 연 부인에게 받은 증표는 황금으로 만든 단검을 반으로 분질러 놓은 모양이었다.

단검은 손잡이 부분부터 칼날 끝까지 모조리 황금이었는데, 칼날 쪽이 비스듬하게 부러져서 끊겨 있었다.

반대쪽 조각은 어디로 간 것일까. 자연히 궁금해지는 모양새였다.

“와아.”

부러진 검 날.

출생의 증표를 갖고 떠나는 모험.

어린 시절에 책장에 꽂혀 있던 영웅서사에서 본 적이 있는 내용이었다.

소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은자촌 십이 세 소년 소호가 이런 일을 놓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소호는 휙― 고개를 돌려 섭주해를 바라봤다.

섭주해는 난감하다는 듯, 그렇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담담하게 웃어 주었다.

“무산학관은 수업 시간만 지키면 그 밖의 시간은 자유예요. 다만, 정문에 있는 문지기들은 학생들을 밖으로 내보내 주지 않으니 나가려면 오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건 괜찮아. 내가 비밀 통로를 알아.”

“네? 비밀 통로요?”

“응!”

섭주해는 묻고 싶은 게 많은 듯 보였지만 일단 수긍하고 넘어갔다.

“무산학관 자체가 낙양 외곽에 있으니 거리는 가까운데……. 으음, 다만 문제는 이 근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할 것 같네요.”

“이 근처 지리를 알고 있는 사람…….”

소호는 생각을 거듭했다.

무산학관 근처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

낙양과 무산학관을 왔다 갔다 하는 인물.

“히힛.”

소호는 웃으면서 아이들에게 선언했다.

“오늘 가 보자. 지리를 아는 사람이 떠올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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