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17화
제18장 무산 철공주 (2)
“도련님들. 왠지 다시 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금방 다시 볼 줄은 몰랐는뎁쇼.”
무산촌에서 영웅객잔으로 채소를 배달하는 사내, 왕오는 오늘도 객잔 뒤편에서 채소 상자를 나르다가 소호 일행의 방문을 받았다.
“낙양을 가셔야 한다니……. 솔직히 도련님의 부탁은 들어드리고 싶지만, 이게 참, 보시다시피 제가 일하는 중이라서 말이죠…….”
“아, 그것 말인데요.”
소호는 들고 있던 보따리 하나를 짠― 하고 들어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저희가 총관님하고는 이미 이야기해 뒀어요.”
“대체 언제!”
깜짝 놀란 왕오가 들고 있던 청경채 상자 하나를 떨어뜨릴 뻔하다가 간신히 붙잡고 객잔 안쪽을 바라보았다.
멀찍이서 눈이 마주친 총관이 코밑에 난 가느다란 수염을 매만지며 의뭉스럽게 씩 웃었다.
그는 슬그머니 다가와 왕오의 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 왕오가 눈을 크게 뜨면서 안색이 변했다.
“예에? 맨 위층에……? 그 비싼…… 아니, 그렇지만 총관 어른. 저는 아직 할 일이…….”
“커험! 험!”
총관은 사람 좋은 얼굴로 소호 일행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도련님들께서 필요하시다면 이 사람을 얼마든지 쓰시지요.”
“아니, 총관 어른. 그렇지만 그러면 지금 옮기던 채소는…….”
“그냥 두고 가게. 내가 하인 몇 명 시켜서 직접 옮김세.”
총관은 다른 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왕오는 멍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아니, 지금껏 이러신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커험! 그만큼 도련님들 일이 중요하단 일이지. 자, 자. 어서 가시게.”
총관이 너스레를 떠는 사이, 소호는 왕오의 손에 심태연 보따리를 쥐어 주었다.
지난번에 왕오의 딸이 좋아한다고 들었던 대추에 찹쌀을 넣은 쫄깃쫄깃 맛있는 간식이다.
“이건 선물이에요. 나중에 따님 주세요, 아저씨.”
“어, 그게, 그걸 또 기억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요.”
왕오는 얼떨떨해하면서도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사이 왕오의 곁으로 다가온 병약해 보이는 소년, 섭주해가 품에서 반짝이는 것을 꺼내 왕오의 손에 몰래 쥐어 주었다.
“낙양 낙성다루까지. 은자 한 냥.”
“……!”
“그 정도면 어떨까요? 왕오 아저씨. 물론 올 때는 따로 드리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면서도 실리를 잊지 않는다. 섭주해는 차분한 눈빛으로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왕오는 혼란에 빠져 시선이 거세게 흔들렸다.
은자 한 냥이면 동전으로 이천 문. 한 가족이 한 달간 먹을 쌀값이었다.
그게 반 시진 정도만 마차를 태워 주면 생긴다?
“에라 모르겠다! 가시지요! 제가 모시겠습니다요, 도련님들.”
“히힛! 잘 부탁드릴게요!”
소호와 아이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간다.
모험의 시작이었다.
***
고도(古都) 낙양은 흥미로운 점이 많은 도시였다.
도시의 시작을 따져 보면 무려 봉신연의 전설의 하(夏)나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 그야말로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 중의 고도였다.
사방에 펼쳐진 넓은 평야를 산악 지대가 든든한 성벽처럼 감싸고 있으며, 아래쪽으로는 낙수와 이수가 도도하게 흐른다.
그래서일까. 낙양의 서쪽에 있는 함곡관은 중원(中原)과 관중 지역을 구별하는 관문이 되어 전국 시대부터 천하를 가르는 전투들이 많이 일어났다.
본래 미인박명(美人薄命)이란 말이 있지 않던가.
낙양이 눈에 띄는 명당이니 노리는 자가 많은 것 또한 인지상정.
삼국시대의 동탁이 낙양을 잿더미로 만든 것은 유명하며, 그 땅을 복원한 것이 조맹덕의 위나라라서 지금까지도 낙양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낙양을 위경(魏京)이라 부르고 있었다.
명나라 때가 되면서 북경과 남경이 있는 동쪽으로 중심지가 옮겨 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낙양은 남경과 비교되는 풍요롭고 부유한 대도시였다.
“소호 형, 북망산이라는 말이 낙양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아시나요?”
“어? 그랬어? 그, ‘그러다가 북망산 간다!’라고 말할 때 쓰는 그 북망산? 처음 알았어!”
“하핫, 맞아요. 바로 그 북망산이에요.”
“그 산이 낙양에 있어?”
“네. 원래 낙양에는 망산(邙山)이라는 풍광이 좋고 풍수지리상 명당에 해당하는 곳이 있다고 해요. 그래서 옛날부터 왕후들이나 고관대작들이 묏자리로 많이 썼는데…… 그러다 보니 공동묘지가 많아졌고, 그게 낙양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망산(北邙山)이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오오오!”
누가 들어도 신기한 이야기였다.
평상시에 아무 생각 없이 쓰던 말의 어원이 바로 이곳 낙양에 있었다니.
“그랬구나. 낙양의 북쪽에 있어서 북망산이라……. 낙양은 세상의 중심 같은 곳이었네?”
“맞아요. 지금은 좀 예전만 못하긴 하지만, 그래도 수나라 때까지 항상 도읍(都邑)으로 지정된 대도시이지요. 지금도 남경에 비교될 만큼 부유한 땅이구요.”
마차에 타고 낙양의 중심가로 가는 길, 비밀스러운 여정이라 살짝 들떠 있던 아이들에게 섭주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신비롭게 느껴졌다.
“외지에서 오셨는데도 잘 아시는구만요? 그 도련님 말씀이 맞습니다. 낙양에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큰 부자들도 많고, 무서운 고관들도 많습죠.”
마부석에 앉아 있던 왕오도 섭주해의 이야기에 한몫 거들었다.
“그렇구나. 아저씨는 여기에 자주 오세요?”
“아이구, 워낙 볼거리가 많아서 자주 오고 싶지만……. 일이 바빠서 무산을 벗어날 시간도 별로 없지요. 그저 가끔 야채 수확 철에나 한 번씩 옵니다.”
소호는 그런 것치고는 왕오가 낙양의 지리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더 캐묻지는 않았다.
어느새 소년, 소녀들이 탄 마차 주변의 풍경은 많이 변해 있었다.
무산학관을 빠져나올 때만 해도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만들어진 시골 같은 풍경이었는데, 확실히 낙양에 오니 온갖 상점들이 왁자지껄하게 장사를 하는 분위기였다.
큰길에는 짐을 싣고 다니는 우마차와 뭘 살지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이 강물처럼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소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게 진짜 대도시라는 것을 느꼈다.
삼산현의 시골 마을 따위에선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거대하고 삭막한 풍경이 분명히 존재했다.
왁자지껄한 거리, 대도시의 중심부다운 화려한 건물들 사이에서 소호와 아이들은 마침내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기에 보이시지요? 도련님들. 말씀하셨던 낙성다루가 바로 저기입지요. 이곳 하남 땅에서 제일 비싼 곳이기도 합니다요.”
“저기가……!”
소호는 아이들과 함께 마차에서 우르르 뛰어내려 위를 올려다보았다.
무려 오 층 높이.
녹색과 붉은색이 자유롭게 조화된 벽면과 지붕이 아이들을 반기고 있었다.
“왕오 아저씨는 나중에 다시 뵐 수 있을까요?”
“언제쯤 말이십니까?”
“그게, 잘 모르겠지만…… 아마 한 시진 뒤에……?”
“으음……. 그렇게나 늦어도 되겠습니까? 일단 알겠습니다요. 근처에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있지요. 뭐.”
슬슬 해가 져서 어두워졌기 때문일까. 층층마다 환하게 불이 켜져 있으니 낙성다루가 더욱 화려해 보였다.
“으음, 이 냄새……!”
가까이 다가가자 다루 안에서 흘러나오는 차향이 콧속을 자극했다.
어머니의 연꽃 냄새 같기도 했고, 백설지의 백합 향 같기도 했다.
소호는 뭔가에 홀린 듯이 아이들을 모두 이끌고 낙성다루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선 은은하게 나던 차향이 훨씬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비단 옷을 입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소호와 아이들을 보면서 수군거렸다.
“아이가 이런 곳에?”
“엄마가 다루에 와 있는 건가?”
“그러게. 해도 졌는데, 아이들이 올 만한 곳은 아니지.”
소호는 수군거리고 있는 사내들 옆에서 조용히 차를 따르고 있는 한 여인을 발견하였다.
자연스레 그녀에게 시선이 향한다.
차분한 연녹색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나이는 삼십 대 중후반쯤 되었을까?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가서 순해 보이는 눈매와 그 옆의 눈물점이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얼핏 수수해 보이지만 소호는 알 수 있었다. 저 여인이 이곳 낙성다루의 책임자였다.
“어머나, 귀여운 꼬마 손님들이네요. 그런데 어쩌나? 우리는 해가 지고 나선 아이들은 손님으로 받을 수가 없어요.”
“그래요?”
소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아이들이 오기는 오나요?”
“호호, 아니요. 가끔 가족들이 올 때나 올까요? 아이들은 차 마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맞아요. 저도 그동안 배운 것들 중에 다도가 제일 재미가 없었어요.”
“어머나, 소형제는 정말로 다도를 배웠나요?”
“네, 어머니랑 작은 어머니가 모두 차를 좋아하셔서요.”
“교양 있는 분들이네요. 소형제는 귀하게 크셨구나?”
“히힛, 그건 아닌 것 같긴 한데요.”
소호는 손을 내저어 거절하며 분위기를 바꿨다.
“사실 저희는 차를 마시러 온 게 아니에요.”
“그러면 왜 왔나요? 소형제들?”
여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소호를 시작으로 대미미, 섭주해, 조서인을 차례로 살폈다.
“저희는 한 사람을 찾으러 왔어요.”
“한 사람?”
소호는 궁금해하는 다루의 여주인을 앞에 두고 대미미에게 물었다.
“미미야, 할아버님 성함이 어떻게 되셔?”
“어, 음, 할아버지 성함이…… 연씨에 사(死)자랑 독(毒)자를 쓴다고 하셨어…….”
“그렇구나. 그럼 성함이 연사독이신 거네.”
소호가 별생각 없이 툭 던지듯 내뱉은 이름에 다루 안의 공기가 굳어졌다.
“……!”
다루에 불이 나도 침착할 것만 같던 여주인이 눈을 크게 뜬 채 굳어 버렸고, 안쪽에서 신세 한탄을 하며 투덜대던 중년의 사내들 한 무리가 화들짝 놀라면서 대미미를 응시했다.
“응?”
대미미가 깜짝 놀라면서 소호의 뒤로 숨었다.
많은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어, 그게……. 저기, 무슨 일로 왔…… 아니, 오셨는지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네요?”
소호는 보고야 말았다.
웃고 있는 여주인의 눈물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말이다.
뭔가를 대답하려는 찰나, 위쪽에서 뭔가가 우당탕 쓰러지는 소리와 접시가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 그리고 성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