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18화
제18장 무산 철공주 (3)
“감히 하오문 주제에! 대(大) 청성(靑城)을 우습게 보는가!”
거친 목소리가 몇 번이나 터져 나오더니, 이내 쿵쾅거리는 발걸음으로 일단의 무리가 내려왔다.
“그깟 게 무에 그리 대수라고 알려 주지 않고 유세를 떤단 말인가! 소림도 그렇고, 하오문도 그렇고. 청성을 이렇게나 막 대하다니……!”
소호는 푸른색 도복을 입은 남자들이 잔뜩 화가 난 수탉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 모두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청성파……!”
옆에 있던 조서인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순간 청성파의 도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읏!”
조서인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무인들의 날카로운 청각은 조서인의 중얼거림을 단번에 잡아 냈다.
갈 곳 없이 솟구치던 분노가 아이들을 향해 쏟아지려는 찰나였다.
“뭘 쳐다보고 있는……!”
“청광 사제.”
성급해 보이는 청년 도사 한 명이 소리치려는 것을, 삼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도사가 가로막았다.
“어린아이다. 아무리 상황이 힘들다지만 정도(正道)를 잊지 말게.”
“큭, 대사형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청광이라 불린 이는 화를 꾹 눌러 참더니 거칠게 몸을 돌려 다루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옆의 다른 도사들은 “무량수불.” 도호를 읊어 대며 마음을 다스리려 했다.
“미안했소, 소형제들. 부디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오.”
대사형이라 불린 도사는 살짝 고개를 숙여 소호와 아이들에게 사죄를 표하고, 십여 명의 도인들과 함께 밖으로 사라졌다.
“와아아…… 큰일 날 뻔했다…….”
조서인은 그 잠깐 사이에 얼마나 맘고생을 했는지 얼굴이 홀쭉해 보였다.
대미미가 조서인의 등을 살며시 두드려 주니, 조서인이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흐음.”
소호는 청성파 도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의아함을 느꼈다.
“청성파? 예전에 구양 할아버지한테 들어 본 적이 있어. 사천(四川) 쪽에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맞아요. 소호 형, 성도의 북서쪽 청성산에 있는 문파입니다. 구파일방 중에 하나고……. 검술이 유명하다고 들었어요.”
“그래. 이제 기억이 나. 청운적하검이 유명한데, 사실은 최심장이 더 은밀하고 무섭대.”
“무섭다니. 그분께서 무서워하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가는데요?”
“히힛, 구양 할아버지도 젊을 때 가셨던 거니까. 그때는 그만큼 강하지는 않으셨나 봐.”
“그런가요. 그분이 젊을 때라니. 몇백 년 전 이야기 같네요.”
소호와 섭주해는 두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신선 같은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잠시 웃었다.
“그런데 그렇게 큰 문파의 사람들이 왜 저렇게 초조해 보이는 걸까?”
“그러게요. 청성파 정도 되는 문파가 저렇게나 내몰리다니……. 무슨 일일까요?”
“아까 소림사라고 했었지?”
“맞아요. 아마 저들은 뭔가를 찾고 있는데 소림에 갔다가 낭패를 본 모양이네요.”
섭주해는 소호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여기에서도 낭패를 본 모양이구요.”라고 속삭였다.
한편, 낙성다루의 여주인은 위층의 일에 정신이 팔린 듯 보였다.
그녀는 계단 쪽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다시 대미미를 쳐다보더니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일단 제 할 일을 하는 게 좋겠네요. 여러분은 중요한 손님인 것 같으니까요.”
여주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더니 차를 마시고 있던 중년 사내들에게 돈을 받지 않을 테니 오늘은 돌아가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녀는 모든 손님을 야무지게 다 내보낸 뒤, 다루의 정문을 닫아 버렸다.
“여러분, 다들 올라가시죠. 찾는 분을 만나시려면…… 일단 한 사람을 먼저 만나셔야 해요.”
“네?”
소호를 비롯한 아이들은 의아했지만, 일단 여주인의 안내를 따르기로 했다.
이 층에 올라가니 일 층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낙성다루의 일 층이 여러 개의 다탁들이 줄지어 놓인 전형적인 객잔 같은 모양새라면 이 층은 병풍과 창호문으로 가려진 방이 하나 있고, 그 앞에 놓인 딱 하나뿐인 다탁을 위해 이 층 전체가 존재하는 듯한 모습으로 꾸며져 있었다.
벽에 걸린 산수화와 옥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들이 이 층의 전경을 더욱 품위 있게 만들어 주었다.
쓰러진 다탁과 깨진 도자기들을 대충 정리하고 있는 모습만 아니라면, 귀빈을 맞이하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이런 씨부럴 놈들, 도사라는 것들이 자기 화도 주체하지 못해서 탁자를 엎고 말이야……. 쯧쯧, 적하 진인이 장문령을 내던지고 다 끌고 나왔다더니 그럴 만하네. 그럴 만해! 도교(道敎) 삼대성지는 개뿔! 무당파 발끝의 때만도 못한 놈들 같으니.”
입으로는 쌍욕을 구성지게 내뱉으면서도 다탁을 정리하는 솜씨는 정갈하기 그지없었다.
사내는 꽤나 특이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체구가 왜소한데 거기다가 회색 두건을 머리에 뒤집어써서 더욱 눈에 띈다.
눈동자가 안 보일 만큼 눈이 가늘게 찢어졌고 코는 매부리코, 입은 앞니 두 개와 함께 툭 튀어나와 쥐를 닮은 사내였다.
“흑서(黑鼠) 님. 그런 건 우리 애들이 정리해도 되니 편히 계세요.”
“편히 있기는 개뿔! 내가 어질러진 꼴 못 보는 거 잘 알면서 그래? 됐어. 내가 하면 돼.”
“그래도……”
“씨부럴, 내가 말이야. 특급 중요 인물인 대인께서 갑자기 낙양으로 오지만 않으셨어도 이 꼴을 안 보는 건데……. 공 지부장도 그래. 수하들이 충성심이 지나쳐. 저렇게 자꾸 깽판을 치면 일이 복잡해질 텐데 말이야.”
흑서라 불린 사내가 안 그래도 툭 튀어나온 입으로 주절주절 불만을 흘리는 모습은 꽤나 재밌는 모습이었다.
“흑서 님은 항상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잘 도와주시잖아요?”
“내가 제이(二) 지부장이라서 그래. 제이 지부장이라서. 서러워서 빨리 일(一)자를 달아야지 원. 소림도 그래. 일을 처리하려면 하고, 안 하려면 안 할 것이지. 무겁게 자리만 잡고 앉아서는 다들 속 터지게 만들고 말이야. 그러니까 기다리던 사람들이 열받아서 우리가 이런 애먼 돌멩이나 쳐맞는 거잖아!”
“후후, 소림이야 원래 그런 곳이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맨날 아무 짓도 안 하면서 돌부처처럼 눌러앉는 바람에 주변을 불편하게 만들어요. 씨부럴.”
흑서는 대충 탁자를 정리한 뒤, 다탁에 널브러져 있던 육포하나를 입에 넣어 질겅질겅 씹었다.
“그나저나, 그 꼬맹이들은 뭐야? 이 시간에? 다루에 새로 소동(小童)이라도 받는 거야?”
“아, 이분들은……. 무상(武上)을 만나러 온 손님들이에요.”
“어? 손님? 무상의? 그 일이라면 공 지부장을 만나야겠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로?”
“으음, 여기 이 소녀분이 무상의 손녀시라고…….”
“쿠엑! 손……! 뭐?”
흑서는 켁켁거리면서 목에 걸린 육포를 토해 내느라 몇 번이나 격한 기침을 해 댔다.
그는 벌게진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대미미를 바라봤다.
대미미는 뚫어져라 보는 시선이 싫었는지 소호의 뒤로 숨었다.
“무상의 손녀라면, 그 호녀(虎女)의……. 아니, 그러고 보니 닮은 것 같기도 한데……. 잠깐만. 그분은 지금 분명히 그 마을에……! 그렇다면……!”
흑서는 혼자서 뭔가를 깊게 생각하더니, 이내 경악한 얼굴로 아이들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기 시작했다.
“허억!”
특히 소호의 얼굴에서 헛바람을 삼키면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흑서님……?”
“잠깐, 잠깐만. 생각 좀 정리하고.”
흑서는 안 그래도 요즘 머리카락이 많이 빠져서 고민하고 있는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면서 뭔가를 끝없이 고민했다.
“낙양…… 아이…… 무산학관……. 그랬구나. 그래서 다들 여기로…….”
“네?”
“소림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리고 황실의 그놈은……? 나 이것 참.”
흑서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에서 하오문의 하남 제이 지부장까지 올라온 사람이었다.
생각을 거듭하는 그에게서 영민한 빛이 번뜩였다.
“루주. 난 방금 쫓겨났으니까. 루주가 대신 말 좀 전해 줘.”
“쫓겨나요? 흑서 님이요?”
“그래. 장광 놈이 하도 떽떽거려서 나도 성질나서 그냥 나온 거야.”
“아…….”
“공 지부장에게 전해. 이건 진짜로 제이 지부장으로서 진심 어린 조언이야. 허튼 생각 말고, 이 친구들한테 잘 하라고 해.”
“이 친구들……?”
“원하는 것도 들어주고, 여기 낙성다루도 구석구석 소개시켜 주고.”
“네에?”
“내 말 잘 들으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난 알아볼 게 있어서 빨리 가 봐야겠어.”
흑서는 아직 집무실에 한 무리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떠나 버렸다.
“진짜로 가다니……!”
여주인은 충격을 받은 듯했으나 소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사이, 안쪽의 문이 열리면서 다섯 명 정도 되는 사내들이 빠져나왔다.
호랑이, 늑대, 사슴, 온갖 짐승의 가죽을 대충 엮어서 옷으로 입고 있는 산적 같은 사내들이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얼굴에 흉터를 하나 이상 갖고 있었는데, 그들도 앞서 나온 청성파처럼 불만스러운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특히 맨 앞에 있는 자.
호랑이 가죽을 걸치고 사나운 눈빛을 한 젊은이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하오문 놈들. 후회할 짓을 하는군……. 가자!”
“예!”
산적 같은 사내들이 낙성다루의 여주인과 아이들을 힐끗 바라보며 스쳐 지나갔다.
사내들이 밖으로 다 나간 뒤에 여주인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태산박……. 저곳까지 거절하다니.”
“네?”
“아니, 아니에요. 후후, 상황이 좀 안 좋을 때 오시긴 했는데, 그래도 들어들 가셔요.”
여주인의 웃음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소호와 아이들이 안내받은 집무실 안은 먹 향으로 가득했다.
사방 책장에 가득 꽂힌 죽간들과 서책에서 나는 향기다.
양쪽으로 시립해 있는 세 명의 사내들도 꽤나 특이한 모습이었지만 특히 집무실 가운데에 앉아있는 자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겉보기엔 고작해야 삼십 대 정도, 얼굴이 허여멀건 하고 유약해 보이는 사내였다. 팔다리도 가늘고 키도 보통, 몸도 호리호리해서 우습게 보이기 십상인데, 턱을 반으로 쪼개 놓은 듯한 깊은 흉터와 차갑다 못해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 그의 인상을 강하게 만든다.
“이번엔 꼬마들인가? 오늘은 손님이 많은 날이군.”
청성파와 태산박을 차례로 쫓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해 보였다.
붓을 들고 일필휘지로 뭔가를 써 내려가는 모습에선 정갈한 기품마저 흘렀다.
“루주. 무슨 일이지?”
“무산학관에서 온 손님들이에요. 이 소녀가…… 무상을 만나러 왔어요.”
“……무상을?”
처음으로 사내가 고개를 들고 대미미를 직접 응시했다.
“사부님은 우리 하오문의 대들보 같은 분이시다. 아무나 만나게 해 드릴 수는 없지. 어쩐 일로?”
“본인이 무상의 손녀라고 말하셔서…….”
“……!”
처음으로 사내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벽면에 기대어 서 있던 세 사람도 깜짝 놀라 서 있던 자세를 바꾸었다.
집무실 안의 공기가 심상치 않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