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19화 (248/686)

5권 19화

제18장 무산 철공주 (4)

“사부님의…… 손녀?”

그게 그리도 충격적인 이야기였을까?

사내는 들고 있던 붓을 벼루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벌떡 일어났다. 턱을 반으로 쪼개 놓은 듯한 커다란 흉터 위로 굳게 다문 입술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손녀…… 손녀라니.”

그는 열기가 피어오르는 눈으로 대미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우…….”

그에 반해 대미미는 마치 작은 짐승 같았다. 소호의 등 뒤에서 고개만 빠끔히 내밀고 힐끔거릴 뿐, 사내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모습 또한 의외였던 모양이었다. 사내가 입을 다물지 못하며 놀라움을 표했다.

“그녀와 닮은 듯했는데……. 완전히 다르군. 이렇게나 다를 수가 있는 것인가.”

사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복잡한 심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 소개를 하도록 하지. 나는 하오문의 하남 지부를 맡고 있는 공진표라고 한다. 소저의 이름을 알려 주겠나?”

대미미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소호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더욱 들어갔을 뿐이었다.

“괜찮아, 미미야.”

소호는 자신의 뒤에 숨어 있는 대미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대미미가 움찔하면서 어깨를 떨었다.

소호는 빙긋 웃어 주었다.

지금은 그녀가 나서야 할 시간이었다. 용기를 주고 싶었다.

“저는…….”

대미미는 머뭇거리면서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미미라고 해요.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어요.”

“대씨. 그런가. 대씨인가.”

공진표는 예상했던 대로라는 듯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눈으로는 대미미를 보고 있지만, 사실 과거의 누군가를 보고 있는 듯이 보였다.

“지부장님.”

그 사이에 옆에서 지켜보던 루주가 끼어들었다.

“흑서 지부장이 전하라던 말이 있었어요. 허튼 생각 말고 이분들에게 잘하라고 하시던데요?”

“흑서 지부장이……?”

“네. 낙성다루를 구석구석 소개시켜 주라면서, 진심 어린 조언이라고 하셨어요.”

“그런가.”

공진표는 잠시 지그시 눈을 감으며 자신의 턱에 난 흉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소저의 할아버지가 연 씨에 사 자, 독 자를 쓰신다는 게 확실한가?”

“네. 어머니께 그렇게 들었어요.”

“어머니라면……?”

벽에 기대어 있던 세 명의 사내들이 웅성거렸다.

공진표는 그들에게 손을 들어 올려 조용히 시켰다.

“그, 어머니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지?”

“연 씨에 종 자, 려 자라고 하는데요……”

“종려……!”

공진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주변 사람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다고 생각은 하지만……. 요즘 세상엔 온갖 종류의 사람이 있기에 물어볼 수밖에 없군. 혹시 소저는 본인을 증명할 신물 같은 것이 있나?”

소호는 자신의 눈치를 보는 대미미에게 다시 한 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 있어요. 어머니가 주셨는데 부러진 검이 하나…….”

대미미가 품안에 손을 넣어 꺼내려는 것을 공진표가 막았다.

“그런가. 아니, 꺼낼 필요는 없어. 갖고 있도록 해. 사부님께서 오시면 그때 확인하도록 하는 게 좋겠군.”

공진표는 앞으로 다가와 대미미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까 흑서가 정리해 둔 다탁 자리였다.

“종려 누이에게 딸이 있다니…….”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에서 잠시만 기다려다오. 사부님을 모셔 오겠다.”

공진표는 벽 쪽에 서 있던 세 사람에게 다가가 몇 마디를 건네더니 계단을 통해 한 층 더 위로 올라가 버렸다.

남은 것은 소호와 대미미 일행과, 낙성다루의 루주, 그리고 공진표의 수하로 보이는 사내들 세 명뿐이었다.

“크흠, 저기…….”

그때 세 명의 사내들 중 가장 멀끔하게 잘생기고, 비싸 보이는 비단 장포를 입은 사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반가워, 소저. 나는 홍원(弘員)이라고 해. 보시다시피 공진표 지부장님을 모시고 있는 화화공자야.”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을 걸어 보지만, 대미미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화화공자라니. 자기가 잘생긴 바람둥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과는 그다지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몇 살이든 몇 마디 말이면 친해질 자신이 있다더니……. 다 거짓말이었군.”

“그게 아니다, 장광. 여기 이 소저분이 그저 부끄러움이 많을 뿐이야.”

“흥, 핑계 없는 무덤이 어디에 있나.”

장광이라는 사내는 키는 작지만 온몸이 단단한 근육질인 대머리의 청년이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는 스님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자잘한 흉터가 온몸에 있었고, 삐뚤어진 눈빛이 불만스럽게 아이들을 향했다.

“소저, 그리고 다른 친구들아. 여기 이 친구는 장광이라고 한다. 공 지부장님은 저 녀석이 단단해 보인다고 해서 ‘짱돌’이라고 부르지. 아주 잘 어울리는 별명이지?”

“히힛……!”

소호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저 덩치, 저 외모로 ‘짱돌’이라는 나름 귀여운 별명이라니.

아주 잘 어울리지 않는가.

“이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쓸데없는 소리는 무슨. 사실이지 않나? 너는 짱돌이라 불리면 기분 좋아하잖아?”

“헛소리! 지부장님이 그렇게 부르시니 참을 뿐이다!”

“후하핫. 그런 거였나? 참는 거였군! 그럼 나는 짱돌이라 부르면 안 돼?”

짱돌이라 불린 사내, 장광이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부르기만 해 봐라. 입을 뭉개 주마.”

홍원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과장스럽게 놀랐다.

“아이쿠, 이 잘생긴 입술이 다치면 국가적인 손실이니. 안타깝지만 참아야겠구만.”

이를 가는 듯 뿌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살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꽤나 진실됐다. 홍원은 그저 웃어넘기는 것을 보니 어찌 보면 대범한 성정인지도 모를 일이다.

“자, 마지막은 이 친구. 화인지라는 친구인데, 우리 중에 몸이 가장 날렵하고…… 무섭지. 이 친구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니까 그다지 대화할 일은 없을 거야.”

화인지라고 불린 사내는 머리카락을 어깨가 넘도록 길게 길러서 풀어헤쳤다.

체구는 보통.

느낌도 별다를 게 없지만, 약간 그림자 속에 있는 듯 어두운 분위기를 풍겼다.

“묵신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다. 그치?”

“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소호가 옆에 서 있는 주해에게 소곤거리자, 섭주해도 같은 생각이라며 동조해주었다.

조서인은 어땠냐 하면, 잔뜩 긴장한 채로 석상처럼 서 있기만 했다.

가슴이 살짝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았다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구별이 안 갈 정도였다.

“소저. 우리는 말이지. 공 지부장님의 심복들이야. 하오문에서도 이 정도로 충성심이 강한 사람들은 별로 없어. 그래서 말인데, 소저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

“그딴 거 알아서 뭐해!”

화화공자 홍원의 말을 자르면서 장광이 버럭 소리쳤다.

“이제 와서, 그딴 게 다 무슨 소용 있냔 말이야!”

“장광. 그래도 들어 봐야지.”

“뭐하러! 이런들 저런들, 아무 상관도 없고, 아무 일도 없을 거다. 하! 십 몇 년이나 지나서 이제 와서? 우리 지부장님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묵혀 뒀던 감정이 거칠게 흘러나오니,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홍원의 웃음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네 오늘 평소보다 심하군. 그게 맞든 틀리든, 여기 있는 순수한 아이들 앞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야. 그렇게 화를 못 참겠으면 잠시 나가서 바람이나 쐬도록 하게.”

“젠장.”

장광은 숨을 씩씩거렸지만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해 준 것은 낙성다루의 루주였다.

그녀는 어느새 끓여 왔는지 따뜻한 차를 들고 와 다탁에 정갈하게 내려놓았다.

“잘 끓인 차는 마음의 응어리도 씻어 준다고 하더군요. 다들 한 잔씩 마시면서 편안히 계세요.”

빙긋 웃는 얼굴, 눈 옆의 눈물 점에서 사람을 상대해 본 관록이 느껴졌다.

차는 용정차였다.

최고급은 아니라고 설명한 그녀는 아이들에게는 따로 가져온 주전자에서 먼저 한 잔씩을 따라주 었다.

“……!”

한 모금을 마신 대미미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소호에게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오라버니. 달아요.”

“그렇네. 감초가 들어간 건가요?”

“맞아요. 꼬마 손님은 미각이 뛰어나군요?”

루주는 부드럽게 웃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소저의 일행분들은 다들 어떤 사이인가요? 무산학관에서 함께 공부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요.”

“그것 말입니다만.”

소호가 대답하기 전에, 옆에서 조용히 찻잔을 양손으로 감싸고 있던 섭주해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루주님은 저희가 무산학관에서 온지 어떻게 아셨죠?”

“후후, 영민한 손님.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곳은 하오문이랍니다. 마방, 다루, 객잔들과는 대부분 연결이 되어 있죠. 여러분이 타고 온 마차가 지금은 다른 다루에 가 있더라구요?”

“왕오 아저씨……!”

“그리고 이래 봬도 제가 사람을 상대하면서 살아온 세월이 이십 년이 넘었답니다. 이제는 얼굴만 봐도 대충 그 사람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정도는 되어요. 꼬마손님들은 범상치 않은 무림인의 느낌이 났구요.”

섭주해는 그제야 이해하고 감탄하면서 납득할 수 있었다.

범상치 않은 무림인이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루주가 그렇다면 그랬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십 년이나 되셨어요? 그럼 낙성다루에서 대체 얼마나…….”

“어머나, 나이를 물으려는 건 아니죠? 그건 비밀이랍니다.”

아이들은 부드럽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서 더 이상 묻지 말라는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소호는 배시시 웃으면서 첫 번째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여기 있는 주해와 미미는 저랑 같은 마을에서 형제처럼 지냈어요. 저에게는 친동생들이에요. 그리고 여기 있는 서인이는 저의 친한 친구구요.”

“어머나, 그렇군요. 여동생이라…….”

루주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대미미를 바라봤고, 대미미는 괜히 차만 마시면서 딴청을 피웠다. 그녀의 자그마하고 동그란 귓불이 빨개졌다.

루주는 홍원, 장광, 화인지 삼인방에게도 찻물을 따라 주었다.

“사실 저뿐만이 아니라, 저기 있는 세 사람과, 그리고 공 지부장님은 소저와 깊은 인연이 있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소저의 어머니와 인연이 있다고 해야 하겠죠. 십여 년 전에 저희 하오문은…….”

담담히 흘러나오던 그녀의 과거 이야기는 쿵쿵거리는 발소리에 중단되고 말았다.

위층에서 내려오는 한 사람은, 불편하고 다급한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발소리로 다 드러냈다.

루주와 삼인방이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호와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서 그냥 제자리에 앉아 있는 사이, ‘그’가 나타났다.

단 한 번만 봐도 다시는 잊을 수 없을 듯 강렬한 인상을 지닌 노인이었다.

조금도 얼룩지지 않은 새하얀 백발을 한 올도 흘리지 않고 뒤로 팽팽하게 당겨 묶었다. 수염 역시도 온통 새하얗게 세어 버렸으니 그야말로 백염공이었다.

육척 장신에 젊은이 못지않게 울룩불룩 강건한 육신에서 당당한 자신감과 백전을 넘어선 노련함이 동시에 흘러나온다.

어깨에 걸친 비단 장포는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새빨갛고 번쩍거렸다.

강렬한 인상.

부릅뜬 호안(虎眼)은 기세만 다를 뿐 대미미의 어머니, 연 부인과 판박이였다.

“누가 내 손녀냐!”

마치 탐관오리라도 잡으러 온 듯, 쩌렁쩌렁한 외침이 낙성다루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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