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20화 (249/686)

5권 20화

제18장 무산 철공주 (5)

‘저 할아버지, 강해.’

소호는 오싹― 하고 등 뒤에서 뭔가가 기어가는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놀라운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엄청난 영감님을 만난 것이다.

소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으로 상대방을 읽어 내기 시작했다.

가볍게 내딛는 발걸음, 끝이 보이지 않게 깊은 호흡, 아무렇게나 서 있는 자세조차 빈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완벽했다.

‘적어도 추묵환 할아버지랑 동급……. 가면철왕 학관장님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아. 무기는…… 권사? 무기를 쓰진 않으시는 것 같은데.’

소호는 호기심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런 사람이 대미미의 외할아버지라니. 순하기만 하던 대석 삼촌은 대체 어떻게 연 부인을 만난 것일까. 이런 할아버지가 딸을 순순히 내주었을까? 그런 의문이 계속해서 들었다. 과거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지지 않은가!

“흐음?”

그런데 소호가 노인을 보며 느낀 것처럼, 노인도 소호에게서 뭔가를 느낀 듯했다.

새하얀 눈썹을 한 쪽만 위로 끌어 올리면서, 흥미롭다는 듯이 소호를 잠시 응시했다.

하지만 흥미도 잠시, 급한 일이 있는 노인의 시선은 대미미에게로 향했다.

“너냐!”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우렁찬 목소리였다.

“힉!”

대미미가 깜짝 놀라면서 소호의 뒤로 숨었다.

겁먹은 듯이 치켜뜬 눈이 노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으음…….”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노인은 대미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갑자기 굳어 버렸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노인은 복잡한 심경이 일렁이는 눈빛으로 척, 하니 손을 내밀었다.

“증표.”

“네……?”

“증표가 있느냐?”

대미미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으며 품 안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자그마한 꽃무늬가 가득 새겨진 주머니에서 온통 황금으로 된 손바닥만 한 단검이 나왔다. 칼날 쪽은 비스듬하게 부러져 있는, 손잡이만 남은 단검이었다.

“……!”

주변 사람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대미미가 꺼낸 단검 손잡이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품 안으로 손을 넣어 황금칼날을 꺼내 들었을 때, 주변의 동요는 더욱 커졌다.

“우와!”

소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전설의 한 장면 같았다.

두 개로 부러졌던 단검이 십여 년 만에 다시 하나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노인은 대미미의 손에서 단검 손잡이를 받아 들더니, 자신이 갖고 있던 칼날과 맞춰 보았다.

마치 원래부터 한 몸인 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두 개의 조각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맞아떨어졌다.

노인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는 듯,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너였군.”

나직하게 내뱉는 그의 말에 십여 년의 회한이 담겼다.

“네가 내 손녀였어.”

노인은 자신의 손에 놓인 황금 단검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옆에 있던 공진표를 불러 그에게 건네주었다.

“……!”

공진표는 깜짝 놀라 양쪽 무릎을 꿇으면서 그 황금 단검을 받아 들었다.

“무상(武上)의 신물입니다. 어찌 저에게 맡기십니까?”

“신물은 무슨. 그냥 금덩어리에 불과하다. 무슨 구파일방마냥 호들갑떨지 마.”

“하오문 문도들에게 있어 무상은 구파일방 장문인보다도 높습니다.”

“허튼소리.”

노인은 손을 휙― 하고 내저었다. 불타는 것처럼 새빨간 비단 장포가 바람에 펄럭였다.

“그래도 이제 반으로 나뉘어져 있을 이유가 없으니 근처 대장간에 가서 그걸 붙여다오.”

“그 말씀은……!”

공진표를 비롯한 세 명의 심복들, 그리고 낙성다루의 루주까지 모두가 깜짝 놀랐다.

“드디어 반쪽짜리에서 벗어나 무상의 자리로 되돌아오시는 겁니까? 길었습니다. 전국의 모든 하오문 문도들이 무상의 귀환을 축복하며 거리마다 연등을 내걸 것입니다.”

“쓸데없는 소리. 앞서가지 마라. 난 그저 그게 부러져 있는 게 더는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노인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잘라 내고 대미미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노인은 대미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너는 내 손녀가 분명하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대미미가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었다.

“할……아버지?”

노인이 눈을 번쩍 뜨면서 화통하게 소리쳤다.

“그래! 내가 네 할아버지다!”

“힉!”

“연사독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들어 본 적 있느냐?”

“어, 어머니께 들었어요…….”

“그래. 그런가. 네 어미가 그래도 내 이야기를 했나 보군.”

노인은 대미미의 어깨를 잡았다.

대미미도 또래보다는 많이 큰 편인데도, 연사독 또한 육척 장신의 거구인지라 대미미의 머리가 연사독의 가슴까지밖에 닿지 않았다.

“네 나이는 몇 살이냐?”

“열한 살이에요.”

“열한 살? 태어난 지 십일 년이나 되었다는 건가.”

연사독은 대미미를 마치 갓난아기처럼 번쩍 들어 올렸다.

“대체 왜 이렇게 늦게 온 건가!”

“꺅!”

“십일 년이나 보지 못했다니. 왜 진작에 오지 않았냔 말이야!”

대미미가 당황해서 버둥거리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겨드랑이를 붙잡고 들어 올린 채로 대미미를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네 어미의 얼굴을 빼다 박았구나. 네 어미도 어린 시절에 너 같은 느낌이었지. 다만 눈, 순해빠진 그 착한 눈 하나만 그놈을 닮았군.”

“내, 내려 주세요오.”

“싫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손녀야.”

대미미는 당황하면서 대답했다.

“대…… 대미미요…….”

“미미. 그런가. 두 배로 이뻐서 미미(美美)인가.”

“네에?”

미미는 그 미미가 아니라고 설명했으나 연사독은 듣지 않았다.

“몸은 또 왜 이렇게 말랐나! 뼈밖에 없지 않나!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 것이냐!”

“무, 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대미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말랐을 줄이야. 밥부터 먹여야겠군! 진표야. 근처 객잔에서 사 올 수 있는 모든 요리를 다 사 와라.”

“싫어요. 안 먹어요!”

“어째서냐. 이렇게 가벼운데!”

“가, 가볍지 않아요. 조용히 좀 해요. 할아버지!”

어느새 당황한 대미미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히힛.”

소호는 웃었다.

사실 오랫동안 못 만난 가족이라 하여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직설적이지만,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대미미를 좋아하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으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소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섭주해와 조서인은 소호와 똑같이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공진표와 낙성다루의 루주도 감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세 사람.

공진표의 심복 세 사람만큼은 오묘한 표정으로 감격적인 조손상봉을 보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걸까?’

소호는 나중에 주해와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네 이야기를 해다오. 너는 무엇을 좋아하느냐?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하면서 살아왔느냐?”

“저는…….”

할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은 대미미는 이제야 가족이라는 실감이 남는지 조곤조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만의 가족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변에 있던 모두는 오랜만에 만난 할아버지와 손녀만을 남겨둔 채 조용히 일 층으로 돌아왔다.

***

“무상은…… 하오문도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는 분이시다.”

연사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공진표는 진실되고 열정적이었다.

“하오문은 약자들의 문파다. 마방, 기루, 객잔, 다루……. 보다시피 전부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들이고, 강자들에게 희생당하기 너무나 쉬운 사람들이지.”

공진표는 창밖을 가리켰다.

다루와 기루를 전전하는 온갖 사람들이 보였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위대한 생각을 떠올린 거다. 그래, 모이자. 하나로 뭉쳐서 정보를 팔자. 마방, 기루, 다루, 객잔에서 얻는 비밀스러운 정보를 갖고 우리의 살길을 도모하자고 말이야. 당연히 처음엔 오히려 더욱 위험해졌다. 무림인들은 무공이 하찮은 하오문 따위는 위협해서 빼앗으려할 뿐 아무도 우리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소호와 섭주해, 조서인은 공진표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너희들은 어리지만 그래도 무림인이니 알고 있겠지. 강자존이야말로 무림의 법칙이다. 그래서 항상 멸시를 받고 무시를 당한다. 아까 씩씩거리면서 나가던 청성과 태산박을 보았나? 그들도 똑같았다. 그저 힘을 보여 주고 협박하여 원하는 걸 뺏으려고만 들지. 우리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진 않아.”

공진표는 아련한 눈빛으로 과거를 회상했다.

“그런 우리를 묵묵히 지켜 준 것이 무상이다. 그분은 언제나 약한 자가 위험하면 나타났다. 객잔에서 사악한 자들이 행패를 부릴 때? 마방에서 말을 죽이고 도망칠 때? 기루에서 기녀들이 얻어맞을 때? 얼핏 보면 별거 아닌 것 같고 어디 협객이 되겠다는 무림 초출이나 해야 할 일 같지 않나? 그런데도 무상은 했다. 고수가 손을 쓰면 안 될 것 같은 일이 벌어져도 무조건 직접 나서서 막아 주셨다. 상대가 누구든 하오문을 건드리면 박살이 났다. 구파일방, 오대세가. 몽골 놈들까지. 무상이 있었기에 우리는 무사했다.”

그러니 하오문 문도 모두가 존경하는 거라면서, 공진표는 자신의 이야기라도 되는 양 뿌듯하고 자랑스러워했다.

“말하자면 하오문의 수호신이다. 하오문주가 영웅이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지만, 무상이 없었다면 중간에 죽었을 거다. 지금은 하오문이 필요할 때는 소림사 방장과도 대담을 나눌 수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지. 이만큼이나 명성이 올라간 건, 우직하고 강력하신 무상 덕분인 거다.”

공진표는 열렬한 찬사를 늘어놓은 뒤, 잠시 숨을 골랐다.

“종려 누이는…… 그런 분의 여식이었다. 아름다웠고, 또한 그분을 닮아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여걸이셨지. 등과 양팔에 커다란 꽃문양을 그려 넣고 기녀들을 지키던 거화신녀(巨華神女)라고 하면 낙양은 물론이고 하남 전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

소호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꽃문양? 여걸? 거화신녀?’

소호가 알던 현모양처 연 부인의 이야기가 전혀 아니었다.

혹시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걱정도 되었지만, 그럴 리 없다고 마음을 다독이며 계속해서 경청했다.

옆을 쳐다보니 섭주해도 입을 살짝 벌린 채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도 다들 기억하고 있다. 하오문의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다.”

공진표의 얼굴에서 무상을 이야기 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열기가 피어올랐다.

“자세한 것은 이야기할 수 없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무상과 하오문주 사이에 혼약이 있었다. 하오문주 입장에선 반드시 해야만 하는 혼약이었다. 무상의 명성이 하오문주보다 높았으니까. 잘못하면 하오문이 둘 이상으로 찢어질지도 몰랐지. 그런데 혼례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그가 나타난 거다.”

공진표의 얼굴에서 열정이 사라졌다.

무심한, 오래된 원망이 그의 얼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믿기지 않을 만큼 덩치가 큰 주제에, 순박한 촌민 같던 그 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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