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21화
제18장 무산 철공주 (6)
소호와 섭주해가 그 말을 듣고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본 뒤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대석 삼촌!”
“그런가. 너희는 그를 삼촌이라 부르는 건가.”
공진표는 씁쓸한 얼굴이었다.
“역시 미미 어머님이 맞았어!”
“그러게요, 소호 형. 큰 꽃을 그려 넣고 싸우는 거화신녀라고 해서 아닌 줄 알았어요.”
“맞아. 내가 아는 미미 어머님은 현모양처인데……. 잘못 찾아온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소호는 다행이란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앞에 있던 공진표와 주변의 모두가 눈이 동그래진 채 굳어 있었다.
“뭐라고? 뭔 처?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현모양처라고 했어……. 누가? 거화신녀가?”
“기방에서 난동 피우는 놈들을 용조수로 얼굴만 잡고 패대기치던 사람이……?”
심복 삼인방이 수군거리는 동안 공진표는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석상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이상하네. 반응이 왜 이렇지?’
소호는 미미네 집에 놀러갈 때면 늘 부드러운 미소로 자신을 맞아 주던 연 부인을 떠올렸다.
미미가 깜돌이와 씨름을 하며 노는 사이 과일을 정갈하게 잘라 내어 주시던 어머님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안 돼. 내가 해명해야겠어.’
함께 나눠 먹던 과일의 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소호는 미미 어머님을 변호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다.
“미미 어머님은 현모양처가 맞아요!”
“어…… 뭐라고?”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저렇게 여성스럽고 참한 사람 별로 없다고. 요리도 잘하시고, 미미한테 꽃꽂이도 틈틈이 가르쳐 주셨어요.”
사람들의 표정은 더욱 오묘해졌다.
소호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당황한 소호를 구제해 준 것은 낙성다루의 루주였다.
“이 사람들 참, 거화신녀는 원래 귀여웠어요. 어릴 때는 그렇게 순한 애가 없었다니까? 아까 본 미미랑 똑같이 수줍음도 많았고, 얼마나 소녀다웠는지 모르죠?”
루주의 말에도 삼인방의 반응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소녀다워……?”
차마 반론을 제기하지는 못했으나 삼인방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그사이, 충격에서 벗어난 공진표는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으음, 어쨌든 종려 누이는 잘 지내고 있나 보군.”
“네. 잘 지내고 계세요. 행복해 보이셨어요.”
“그런가…….”
공진표가 생각에 잠기자 분위기가 다시 무거워졌다. 소호는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뭔가를 질문해야 함을 느꼈다.
“궁금한 게 있어요.”
“어떤 게 궁금하지?”
“그럼 대석 삼촌은 그때 미미 어머님이랑 친해지고 나서…… 아까 그 할아버지에게 혼례를 올리겠다고 허락을 받은 거예요?”
“…….”
“어? 아니에요?”
소호는 공진표가 또다시 말문이 막힌 채 얼굴색만 휙휙 바뀌는 모습을 보며 당황했다.
“그게 아니에요, 꼬마 손님. 청혼은 거화신녀가 했답니다.”
“……!”
“무상께 혼례를 올리겠다고 ‘선언’하러 온 것도 거화신녀였죠.”
소호와 섭주해는 말 그대로 깜짝 놀랐다.
“우와!”
“미미 어머님이?”
소호와 섭주해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대석이 워낙 순박해서 어떻게 구혼을 했나 했는데, 연 부인이 했던 거라니! 두 사람은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지 않은가.
당장 은자촌으로 돌아가서 대석과 연 부인에게 물어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루주!”
“왜요, 지부장님. 사실이잖아요?”
“그건……! 그래도……!”
“후후, 지부장님답지 않네요. 멋있지 않나요? 본인이 맘에 드는 사람은 본인이 직접 고른다는 게?”
공진표가 입을 꾹 다물어 버리자, 루주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그를 다독였다.
“무림인들이 자유롭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혼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답니다.”
“으음…….”
“거화신녀 님은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골라서 사랑받으면서 살고 있어요. 그건 조금 전에 본 미미 소저를 보면 알 수 있다고요. 아이가 얼마나 순수해요? 사랑이 없는 집에서 큰 애들은 그렇지 못하죠.”
“루주. 나도 알고 있소.”
“그러니까 그만 마음을 비워요. 거화신녀는…… 아니, 종려 누이는 그 당시에 옳은 선택을 한 거예요. 가족인 우리가 그 선택을 응원해 줘야죠.”
하오문의 하남 지부장으로서 늘 냉철한 선택만을 해 온 사내 공진표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십여 년의 세월.
온갖 일이 다 있었던 그 억겁 같던 시간들을 가만히 돌이켜본 뒤,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애초에 무상께서 아무 말 없으신데 우리가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인 거예요.”
“알았소. 잘 알겠소.”
공진표는 그만하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는 마음의 전환이 빠른 사람이었다.
소호와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에, 더 이상 분노나 회한이 담겨있지 않았다.
“과정이야 어쨌든, 종려 누이는 다른 사내를 선택했고, 무상은 그런 누이를 말리지 못했다. 떠나면 하오문과는 다시는 못 볼 생각을 하라고 외치던 무상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군.”
“……!”
소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대석 삼촌은 허락을 받지 못한 거예요?”
“정식으로 허락은 못 받았지.”
“네에? 정말요?”
“하지만 그자를 모른 척 가만히 뒀다는 게 허락이라면 허락이랄까.”
“어어?”
소호는 미간을 좁히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어렵네요. 허락하진 않았지만 허락이라니.”
“그럴 테지. 너희에겐 이른 이야기다.”
“으…….”
“너의 말 한마디, 네가 누군가를 대하는 태도만으로도 너를 따르는 사람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책임감은…… 아직은 알 수 없는 것이야.”
사람들이 그걸 알아주지 않으니 더욱 슬픈 거라면서, 공진표는 그저 먼 곳만 바라봤다.
“모든 인연을 끊어 버리면서 떠나는 누이의 손에…… 무상이 자신의 신물을 반으로 쪼개어 건네주는 게 그분께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지.”
공진표는 마치 그 시절 그 때로 돌아간 듯 씁쓸해 보였다.
소호는 그 모습을 보면서 궁금해졌다.
무상 연사독과 거화신녀 연종려가 뜻이 달라 헤어질 때, 그 때 두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 이야기에 대해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지?”
소호는 섭주해와 서로를 한 번 쳐다보고, 이번엔 있는 듯 없는 듯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이야기만 듣고 있던 조서인을 바라봤다.
소호가 빙긋 웃으면서 눈짓을 하자, 조서인은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어…… 머, 멋진 것 같아요.”
“어떤 점이?”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과 혼례를 올리기 위해 도망쳤다는 점이……?”
뒤쪽에서 쳇,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조서인은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졌다.
“장광.”
공진표는 소리를 낸 장광을 날카롭게 응시하여 주의를 주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가. 아마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테지.”
공진표는 모든 일이 거기서 끝난다면 무림 영웅록의 한 장면처럼 멋진 사랑이야기가 맞을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현실은 원래 화려한 이야기 뒤편에 있는 법이다. 종려 누이가 떠나 버리면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몇 개 생겨 버렸지. 하오문주와의 갈등이라든가……. 그런 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게 해결되지 못한 채 십여 년이 흘러 버린 것이야.”
“그랬구나…….”
“내가 어린 너희를 붙잡고 이렇게나 장황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너희가 우리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알아줬으면 해서였다.”
“저희가요?”
“어린아이들이 친구 한 명의 개인적인 일을 위해 무산학관에서 이곳까지 먼 길을 찾아왔다. 너희는 아마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미미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일 테지?”
어느새 대미미를 이름으로 부르는 공진표를 보며, 소호와 섭주해, 그리고 조서인은 이번엔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미는 내 동생이에요.”
“미미는 저의 가족입니다.”
“미미는…… 더 친해지고 싶은 치, 친구예요.”
소호와 섭주해, 조서인이 차례로 대답했다.
그 마음에 거짓은 없었다.
공진표의 진지한 시선에도 세 사람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무상께서는 손녀를 보고 그저 기쁘실 테지만, 하오문 입장에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을 거다. 물론 내가 최대한 막아 볼 테지만 그 어떤 것도, 가까운 사람의 위로만큼 도움이 되는 건 없지.”
공진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건 미미에게는 직접 이야기하기는 힘든 일이다. 앞으로…… 미미를 잘 부탁한다.”
어찌 보면 오늘 처음 본, 피도 안 섞인 여자아이를 위해 다른 아이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생각보다 더욱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것만 해도 공진표는 대단한 남자였다.
소호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무상과 공진표, 그리고 낙성다루의 루주까지. 미미를 진심으로 아껴 주는 좋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소호는 미미를 데리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벌떡 일어나 자신감 있게 외쳤다.
“걱정 마세요! 미미는 우리가 지킬게요!”
공진표는 처음으로 진심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
“오라버니!”
꽃무늬가 그려진 분홍색 비단 무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해맑은 표정으로 뛰어왔다.
발갛게 상기된 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그녀가 지금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를 말해주었다.
“나 할아버지랑 이야기 많이 했어. 할아버지는 듣는 걸 좋아하셔. 엄마랑 아빠 이야기를 다 하니까 사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다고 하셔. 그래서 내가 나중에 은자촌에 가 보자고 말했어.”
소호는 대미미가 아기 종달새 같다고 생각했다.
“그랬어? 할아버지랑 만나니까 좋아?”
“응!”
대미미는 할아버지가 무산학관에도 오시기로 했다면서, 무산제전 때도 방문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다른 아저씨들이랑 이야기하시더니 할 일이 좀 있다고 루주에게 낙양 구경을 시켜 달라고 말하라고 하셨어.”
“그래? 바쁘신가 보구나.”
“응. 할아버지도 많이 아쉬워하셨어. 일이 끝나고 우릴 직접 데려다주시겠대.”
대미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할아버지가 있을 위층을 힐끔 바라봤다.
그사이 홍원을 비롯한 공진표의 심복 삼인방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낙양 구경은 저희가 시켜 드리게 되었습니다. 소저, 그리고 도련님들.”
홍원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그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