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24화 (253/686)

5권 24화

제18장 무산 철공주 (9)

“소호.”

조서인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떨리긴 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였다. 곧고 강직한 눈빛으로 흔들림 없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용기가 놀라웠다.

평소에 긴장하면 종종 말도 더듬는 친구라곤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였다.

“해볼까……?”

“아냐, 잠깐만.”

소호는 차분하게 서 있는 섭주해와 입을 살짝 벌린 채 당황하고 있는 대미미를 보고, 마지막으로 회색 늑대라고 불린 양종대를 살펴봤다.

마침 홍원과 이야기하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회색 늑대가 입꼬리만 살짝 끌어 올리면서 사납게 웃는다.

그 모습, 그 기세.

소호는 마주 웃어 주었다.

“다 괜찮은데 저 아저씨는 만만치 않아. 안 되겠어. 피해가 클 것 같아.”

“그래? 져?”

“지는 건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다칠 거야.”

“우린 이럴 때 쓰려고 무공을 배우는 거잖아?”

평소의 순하디순한 소년답지 않은 호전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사부들이 그랬잖아. 우린 산적 같은 무뢰배들로부터 민초들을 지키기 위해 무공을 배우는 거라고 했어.”

정의로운 성정.

‘협’의 기질이었다.

소호는 조금 놀랐지만 그 모습이 싫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서인이 말대로 한번 겨뤄 보고 싶기도 하지만…….’

소호는 뒤쪽을 힐끗 바라봤다.

낙양대로 쪽의 골목길에서 익숙한 그림자 하나가 황급히 사라졌다.

“중걸 사부가 했던 말이네? 하지만 서인아. 우린 싸울 때와 싸우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하라는 말도 배웠잖아?”

“……연홍 사부.”

“저 사람들은 대화를 하고 싶대. 좀 더 지켜보자.”

소호의 속삭임이 끝나기가 무섭게, 홍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항복을 선언했다.

장광과 화인지는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특별히 반발하지는 않고 순순히 무기를 내렸다.

양종대가 홍원의 어깨를 손으로 팡팡 두드렸다.

“잘 생각했군. 들어가자.”

태산박의 사내들은 삼인방의 무기를 뺏어가지도 않았다. 양종대가 먼저 성큼성큼 탐화루 안으로 들어가고, 그다음 홍원을 비롯한 소호와 대미미 일행이 밀려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사람들을 다 쫓아낸 것일까?

홍등만이 켜져 있을 뿐, 탐화루 안은 사람이 텅 빈 채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중간에 홍원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는 듯, 대미미와 아이들을 향해 고개만 살짝 저을 뿐이었다.

“오라버니.”

“응?”

“이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인 거지?”

소호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묻는 대미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일단 그런 것 같아.”

“그렇구나.”

대미미는 자그마한 입술을 굳게 다물면서 뭔가를 결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앙 계단을 통해 그대로 탐화루의 가장 높은 방으로 들어갔다.

탐화루의 이 층에 있는 가장 좋은 특실 안, 소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보란 듯이 펼쳐져 있는 주안상과 그 모든 것들의 주인인 듯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한 젊은 사내의 모습이었다.

사내는 ‘지배하는 자’였다.

비스듬하게 누워, 주변 모두를 하찮게 보는 눈빛이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저 사람도 강해.’

소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만 따져도 두 번째 충격이었다.

첫 번째는 대미미의 외할아버지인 무상.

두 번째는 지금 이 남자.

방만한 자세, 허리에 대충 호랑이 가죽 하나만 감았을 뿐 아무런 의복도 입지 않은 사내였다.

군더더기 없이 잘 단련된 몸이 만천하에 드러나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상체 곳곳에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배꼽 부근부터 목덜미 언저리까지, 거미줄처럼 온몸에 새겨진 자상이 그의 거친 삶을 증명했다.

“드디어 왔군.”

사내는 벌떡 일어나 입꼬리만 올려 씩 웃었다.

소호는 덥수룩한 수염에 씩 웃는 모습이 양종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다들 비슷해 보여.’

같은 ‘파’라서 그런 걸까? 저 젊은 사내와 양종대, 그리고 그 외의 사내들도 자세히 보면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부두목, 반항은 안 하던가?”

“하면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아쉬운 일이오.”

“카핫! 그렇지. 그렇지. 반항하면 죽여야지.”

듣는 사람의 모골이 송연해지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는다.

주변의 사내들은 그 말을 들으면서 껄껄 웃기까지 했다.

주안상 근처에 앉아 있던 십여 명의 기녀들이 창백한 얼굴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찌 이런 짓을.”

홍원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태산박의 주인!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요?”

정호는 싸늘하게 웃으며 코웃음 쳤다.

“뭘 새삼스럽게. 태산박의 젊은 호랑이와 척을 지고 그냥 넘어가려 했던 건가?”

차가운 말투, 드높은 자존심이 그 안에서 드러났다.

홍원은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척을 지다니. 지부장께서는 그저 여러 가지 사정상 알려 줄 수 없을 뿐이오. 그게 어찌 척을 지는 일이겠소?”

“그게 그거지. 우릴 우습게 보는 거잖아.”

“전혀 다르오. 우습게 보았다면 애초에 만나지도 않았을 터.”

“흐흐, 만나지도 않는다고?”

훅, 하고 노려보는 기세에 홍원의 다리가 휘청 흔들렸다.

바로 뒤에 있던 소호는 홍원의 등을 손으로 살짝 받쳐 주었다.

홍원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이내 정호의 기세를 버텨 냈다.

“거봐라. 너희 하오문 놈들은 여전히 우릴 우습게 보고 있어. 소매치기랑 창녀들이나 데리고 일하는 주제에, 감히 우릴 우습게 보는 꼬락서니라니.”

정호는 주안상을 짓밟으면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뭐라고 할 틈도 없이 홍원의 뺨을 후려쳤다.

“컥.”

홍원은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몸이 붕 떠서 나가떨어졌다. 기녀들이 “꺅!” 하고 비명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사나워졌다.

뒤에 있던 장광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앞으로 나섰다. 화인지는 단검을 뽑기 위해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뽑지 마!”

그런 장광과 화인지를 소리치며 말린 건 옆으로 나가떨어졌던 홍원이었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왼쪽 볼을 손으로 붙잡은 채 장광과 화인지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무기는 뽑지 마!”

“……!”

그제야 뭔가를 깨달은 장광과 화인지가 이를 악문다.

정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카하핫! 낙양지부에 공진표 지부장이 있고, 그다음으로 뛰어난 자는 홍원이라더니. 소문이 틀리지 않았군.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다.”

“우리 ‘하오문’은 태산박을 절대 먼저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래? 너희가 우연히 술집에서 말싸움을 하다가 맞아 죽어도?”

“…….”

“재밌네. 그럼 한번 해 볼까?”

홍원이 이를 악물었다.

“당신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거요.”

“글쎄다? 여태껏 내 맘대로 안 된 적이 별로 없는데.”

정호가 허공에 대고 손을 까딱거리자, 주변에 서 있던 태산박 사내들이 삼인방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 산적 놈들!”

그나마 평소에 주먹을 쓰던 장광이 두어 명을 때려눕히면서 강골(强骨)다운 면모를 보였지만, 그걸로 끝이다.

그는 이내 태산박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채 홍원이나 화인지처럼 바닥을 나뒹굴면서 짓밟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무기를 들고 대결했다고 하더라도 아마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태산박의 사내들은 보기와 달리 꽤나 강했다.

“컥!”

“으윽……!”

가죽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정호는 자신이 밟고 있던 그릇에 놓인 회과육(回鍋肉) 몇 조각을 손으로 집어 우적우적 씹었다.

“두반장이 맛이 잘 들었네. 매콤해. 난 역시 사천 쪽 음식이 좋단 말이지.”

정호는 손가락에 남은 양념까지 쭉쭉 빨아먹은 뒤,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정면에 서 있는 소호와 눈을 마주쳤다.

“내가 궁금한 건 너야. 아까 홍원이 쓰러지려는 걸 몰래 받쳐 주던데. 정체가 뭐냐? 왜 이놈들이 너희 꼬마들을 데리고 이 동네를 구경시켜 주는 거지?”

무심한 듯 사나운 눈빛.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성정으로 호기심을 표한다.

소호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정신없이 얻어맞던 홍원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그, 아이들을, 컥, 건드리지. 마시오……!”

“내가 왜?”

“무상의 아이들……! 컥! 분명, 후회할……!”

“잠깐.”

정호가 손을 들어 올리자 구타가 멎었다.

“무상? 혈수라(血修羅) 연사독?”

“쿨럭, 쿨럭. 그렇소……! 그분이 낙양에 와 있소. 그 아이들은 무상의 아이들이오.”

“호오?”

정호가 씩 웃었다.

“하오문은 우스워도 혈수라는 우습게 볼 수 없지.”

“그럼 아이들은…… 보내 주시오.”

홍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닥을 구르던 장광이 벌떡 일어나 입에 고인 피를 퉤! 하고 내뱉었다.

“그래! 아이들은 보내 줘라! 우리는 상관없지만 애들은 건드리지 마!”

“시끄럽군.”

“애들은 놓아줘! 산적 두목아!”

정호가 다시 한 번 손짓을 하자, 사내들이 장광의 입을 틀어막고 옆으로 질질 끌고 갔다.

정호는 자신의 턱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혈수라의 조법이 천하일절이라던데. 한번 보고 싶긴 하군. 그치만 싸우면 손해가 있을 것 같긴 하고…….”

정호는 놀랍게도 무상을 무서워하기보단 호기심이 더 강해 보였다.

“그럼 묻겠다, 홍원. 아까 공진표에게도 물었던 건데 그놈은 대답하지 않았었지.”

“그건, 나도…….”

“이걸 대답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상을 죽여서라도 답을 찾아내겠다.”

놀랍도록 패도적인 발언이었다.

정호가 두 눈을 번뜩이며 홍원을 노려보았다.

“무쌍귀는 어디에 있나? 그놈이 은거하는 마을은 어디에 있지?”

콜록, 콜록.

소호가 기침을 터뜨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