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권 25화
제18장 무산 철공주 (10)
“음?”
정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데 감히 어떤 놈이 방해를 하느냐는 듯한 분위기였다.
대번에 노려보는 눈빛이 무척이나 살벌했다.
소호는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거기서 왜 아버지가 나와!’
무쌍귀라니!
태산박 우두머리의 입에서 왜 아버지의 별호가 튀어나온단 말인가.
소호는 얼마 전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금 떠올렸다. 가면철왕이라든가 환관 왕진, 유준 선배 같은 사람들도 아버지와 엮여 있지 않았던가.
도대체 아버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어딘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질문해 봐야…… 답은 똑같소.”
한편 질문을 받은 홍원은 그 누구보다도 진지한 표정이었다.
화화공자답게 깔끔했던 외모는 어디로 갔는지 머리는 봉두난발에, 옷은 온통 먼지투성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코와 입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데 기이하게도 눈빛은 더욱 비범해졌다.
“그 사람에 대해선 알려 줄 수 없소. 쿨럭, 오히려 내가 묻고 싶소. 알게 되면 뭐가 달라지는 거요?”
“뭐라?”
정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뭐가 달라지냐니?”
“알게 되면? 그에게 찾아갈 거요?”
“당연한 일 아닌가!”
정호가 버럭 소리쳤다.
“아버지가 당했다. 태산박의 우두머리였던 녹림마왕께서 당했어! 그런데 우리보고 병신처럼 가만히 있으라는 거냐!”
“후후훗.”
홍원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웃어?”
정호의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 홍원이 결연하게 외쳤다.
“아비가 당했다고, 자식도 죽으러 간단 말인가. 태산박도 오래가긴 틀렸군.”
“뭐라……?”
정호의 두 눈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검고 칙칙한 불꽃.
명백한 살의가 끈적하게 타올랐다.
“다시 한 번 지껄여 봐라. 태산박이 뭐가 어째?”
명부(冥府)에서 흘러나오듯 섬뜩한 목소리였다.
“몇 번이든 말하겠소. 멍청하기 짝이 없군. 무쌍귀가 누구인지 대체 알고는 있는 거요?”
홍원은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십몇 년 전이니, 내가 한 창 꿈이 많던 시절이군. 그 때 남경을 지배했던 북천맹과 그 안에서 내로라하던 사도(邪道)의 거파(巨派)들도 무쌍귀 한 사람을 당해 내지 못해 패망의 길을 걸었거늘. 고작 태산박의 젊은 우두머리가 대체 뭐라고 그를 잡는단 말인가.”
“이놈……!”
“심지어 그가 지금 은거한 그 마을에 어떤 인물들이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거요? 이쯤 되면 오만도 병이라고 아니 말할 수 없겠소.”
껄껄 웃어 대는 홍원은 이미 목숨에 연연하는 것에서 초월한 듯한 영웅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놀라운 일.
첫인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비범한 모습이었다.
“다 지껄였느냐?”
“아직 다 못했소. 말이야 바른 말이지, 녹림마왕이 가만히 있다가 억울하게 칼을 맞았던가? 아니지. 특히 녹림마왕은 장강용왕한테 져서 녹림채를 다 뺏긴 일로 원한을 품고 있었다는 걸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지 않던가.”
홍원은 비웃음을 머금었다.
“대천문인지 뭔지, 옛날 은원을 갚겠다고 모인 과거의 망령들이 큰일을 획책하다 도리어 당한 것뿐 아니냔 말이야.”
“이놈……!”
“강호의 도리로 따지자면 그야말로 강자(强者)가 살아남았을 뿐이니 구구절절 따질 필요도 없을 터! 도리어 그걸 다시 복수하겠답시고 이렇게 떼를 쓰니 그야말로 소인배의 행태! 힘이 없는데 명분조차 없으니……. 소림에서 문전박대당하고 돌아온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오.”
홍원은 진심을 담아 일갈(一喝)한 뒤 허허롭게 웃었다.
“가르쳐 주지 않는 게 오히려 당신들의 목숨을 살려 주는 것이오. 고맙게 여기고 이만 돌아가시오.”
냉랭하면서 도도한 말투로 홍원이 코웃음 치자,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정호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카하하핫!”
정호는 광인처럼 웃어 대다가 주안상에서 펄쩍 뛰어 내려가 홍원과 마주했다.
“입만 살았구나. 소인배라니. 내가 평생 들어 본 말 중에 제일 큰 욕이었다.”
“그깟 게 큰 욕이라니. 생각보다 귀하게 자랐구려.”
“카하핫! 재밌는 놈이야. 맘에 들어. 하지만 이제 내가 말할 차례니까…… 그 혀를 뽑아 버리기 전에 그만 입을 다물어라.”
번뜩이는 눈빛에 분노와 광기가 뒤섞였다.
홍원이 영웅(英雄)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면, 정호는 진정한 악당(惡黨)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정호는 홍원의 머리채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큭, 하고 억눌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얼굴만 쳐들리도록 한 채, 정호는 홍원의 두 눈을 숨이 닿을 만한 거리에서 노려보았다.
“그래서 너희 하오문 놈들이 안 되는 거야. 정보로 장사나 하는 놈들이 우리 산(山) 사나이들의 협의(俠義)를 알 리가 있나. 명분? 승산? 개소리 집어치워라. 그런 건 계집애 같은 선비놈들이나 따지는 거다. 꼭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우는 걸 누가 못 해?”
정호가 짐승처럼 이를 드러냈다.
“장강용왕? 무쌍귀? 다들 천하무림에서 열손가락에 꼽히는 고수들이지. 알아. 다 안다고. 그런데 말이야, 꼭 그런 초절한 고수들일수록 별거 아닌 일에 죽는 법이야. 호랑이라도 진흙탕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으면 돌멩이만 던져도 죽일 수 있다는 거지. 카하핫, 내 말이 틀리냐, 얘들아?”
정호가 의견을 묻자 짐승 가죽을 뒤집어쓴 사내들이 일제히 큰 소리를 내지르며 환호했다.
“두목 말이 맞다!”
“강한 놈들일수록 의외로 쉽게 죽는 거지!”
“계집애 같은 놈들 말 듣지 마쇼, 두목.”
“강한 놈 잡으면 우리가 강한 거야!”
왁자지껄하게 외치는 목소리에선 하나같이 광기와 패기가 함께 느껴졌다.
홍원은 머리채가 잡힌 채로 눈알만을 굴려 그런 그들을 살펴보고, 침중한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정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웃었다.
“봐봐.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아. 잘 들어 봐라, 화화공자야. 내가 배운 건 없어도 눈치가 빠른 편이거든?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까 지금 무림강호에는 비범한 악당이 없고 특출한 영웅도 없어. 너무 평온하잖아! 그래서 다들 막! 이렇게! 분노랄까, 격한 감정이 쌓여 있는 거야. 이런 게 뛰쳐나갈 틈만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정호가 홍원의 머리채를 잡지 않은 나머지 한쪽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웃통을 벗고 있던 정호의 가슴에 본인의 손바닥 자국이 벌겋게 남았다.
“난세라는 거지. 그리고 난세에는 뭐가 난다?”
정호가 자신을 가리키면서 씩 웃었다.
“영웅이 난다. 그게 바로 나야.”
정호가 웃으니 태산박의 사내들도 다 같이 웃어 댔다.
명분도 없고 실리도 약하다.
하지만 광기와 패기가 넘치는 매력이 있으니, 그게 바로 태산박의 우두머리 정호였다.
“하오문은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소림도 지금 골치를 썩고 있어. 무쌍귀랑 은자촌을 내놓으라고 떼쓰며 모인 것들이 우리만은 아니거든.”
“……!”
홍원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청성이니, 기갑문이니. 은자촌 잡겠다고 모였던 인간들의 문파가 다 소림사 앞에 모여 있어. 다 모이니 숫자만 해도 천 단위야. 다들 속내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걸? 어때, 좀 진흙탕처럼 보이나?”
“당신……. 도대체 어쩌려는 것이오?”
“간단해. 호랑이를 잡아야지. 아니면 최소한 호랑이가 산 밖으로 나오게 만들어야지. 그게 내가 녹림수로맹의 맹주가 되는 제일보(第一步)야.”
킬킬 웃는 정호는 절대로 우둔하지 않았다.
말하는 것처럼 복수에만 눈이 먼 살인귀도 아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
자신의 영달을 위해 얼마든지 잔혹해질 수 있는 간웅(奸雄)이다.
“자, 그럼 대화는 다 나눴고, 다시 묻자. 무쌍귀와 그놈이 은거하는 마을이 어디에 있지?”
“…….”
“말 안 할 거지?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네 친구들의 몸을 한 토막씩 자르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이야기하겠지? 아니면 혈수라가 열 받아 뒈지게, 저 애들에게도 좀 칼맛을 보여 주든가.”
“…….!”
홍원이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놀라 굳어 버렸다.
다혈질의 장광이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안 된다! 애들은 건드리지 마! 쉬벌, 내가 괜히 데리고 나왔어. 차라리 날 베라, 이것들아!”
정호는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든가.”
어느새 대도(大刀)를 뽑아 든 정호가 살기를 뿜어내며 몸을 돌린다.
가만히 지켜보던 소호는 다급해졌다.
따지고 보면 소호와도 관계가 있는 일이었다. 여기서 조용히 입 다물고 있는 건 비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무쌍귀의 아들이라고 밝혀야 할 것인가?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고 외칠 것인가?
고민은 잠시, 소호가 소리치려던 그 순간이었다.
“내가……!”
“안 돼요!”
생각지도 못한 인물, 의외의 목소리.
정호는 자신의 대도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그의 대도를 통통한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분홍빛 비단 무복을 입고 꽃무늬 신발을 신었다.
많이 봐 줘야 십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꼬마 소녀가 그의 대도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저 사람들…… 괴롭히면 안 돼요.”
동그란 눈망울로 조금은 수줍은 듯, 하지만 화가 나서 단호한 얼굴로 대미미가 대도를 붙잡고 있었다.
쩌적―
대도의 칼날에 지진이 난 듯 균열이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