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26화 (255/686)

6권 1화

제18장 무산 철공주 (11)

“뭐……?”

정호는 멍하니 굳어져 있었다.

소녀의 말은 둘째치고, 눈으로 보이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건가?

어린 소녀.

통통하고 뽀얀 손.

그리고.

깨지고 갈라지고 있는 대도의 칼날.

까드득―.

“……!”

앳된 손가락이 칼등을 파고들고, 새파랗게 잘 갈려 있던 칼날이 오래된 접시처럼 듬성듬성 이가 빠졌다.

튼튼한 대도가 소름끼치는 비명을 질러 댔다.

정호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맨손으로 쇠칼을 짓뭉개다니,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괴이(怪異)한 사건이었다.

그래도 무인의 본능이랄까.

정호는 무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칼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끄응……!”

정호의 목덜미와 팔등에서 힘줄이 솟구쳐 올랐다.

마치 땅에 깊숙이 박힌 기둥을 맨손으로 뽑으려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반적이지 않다.

상식 밖이다.

크고 무거운 자가 작고 가벼운 자보다 힘이 세야 한다.

이는 불변의 법칙 아니던가.

“너…… 뭐냐?”

정호가 대미미를 바라보는 눈빛에, 사람이 아닌 무언가를 보는 듯 생경한 감정이 담겼다.

“우우.”

꽃신을 신은 소녀는 볼이 부루퉁하게 부풀어 있었다.

동그란 눈을 치켜떴는데 어울리지 않는 당돌한 분노가 가득하다.

그녀는 한 손을 더해 우그러지고 이가 나간 칼날을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그러자 또다시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났다.

“컥?”

갑자기 정호 쪽으로 힘이 확 쏠려서 대도의 손잡이 끝이 명치를 때렸다.

그러고는 곧장 꼬치에 꿰듯 정호의 몸이 가볍게 위로 치솟은 것이다.

“어?”

정호는 칼을 양손으로 잡아당기려던 자세 그대로 허공에 떠올랐다.

어떤 무공을 쓴다거나 준비동작도 없이 가볍게, 그저 길가의 조약돌을 줍듯 정호는 그렇게 칼 한 자루에 꿰어진 채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얏!”

작고 귀여운 기합성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정호의 눈에 보이던 것들이 위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바람이 갈라졌다.

정호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의 동작은 무산학관의 신입생 실력 평가 때와 비슷했다.

기관 장치를 망치로 내려치던 그 때와 같은 자세, 똑같은 힘으로 정호는 번개같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꽈아아아앙―.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 같은 강렬한 충격이 탐화루 전체를 강타했다.

거대한 파도가 해안가를 덮치듯, 굉음이 주변 사람들의 정신을 휩쓸고 나갔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벽에 걸려 있던 장식품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단단한 오동나무 바닥 일부가 박살 나면서 발밑이 쩍― 하고 갈라지는 균열이 생겨났다.

“……!”

사람들은 입을 쩍 벌린 채 굳어 있었다.

정호와 대미미를 번갈아 응시하는 시선에 단순히 경악이 아니라 공포마저 새겨졌다.

대미미의 손에서는 빠직, 하고 대도‘였던’ 물건이 다섯 등분으로 조각나 바닥에 떨어졌다.

분위기를 장악한 채 악당의 매력을 발하던 정호.

그가 양팔, 양다리를 넓게 벌린 채 개구리처럼 바닥에 처박혀 피를 토하고 있었다.

***

“나빠.”

대미미는 화가 나 있었다.

홍원, 장광, 화인지.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할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툴툴거리는 장광을 보며 잠시 자신을 싫어하나 생각했었지만……. 결국 낙양 구경도 시켜 준 데다 위험할 땐 앞으로 나서서 막아 주려고까지 했다.

그런 사람들을 누가 괴롭혔나?

태산박이다.

처음엔 너무 놀라서 굳어 있었던 게 분했다. 더 빨리 나섰어야 했다. 그랬으면 사람들이 훨씬 덜 다쳤을 텐데. 그래도 칼을 들고 토막이니 뭐니 무서운 말을 할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나서야 한다는 확신.

강한 힘에 깃드는 책임감이라는 것을 소녀는 알아 버린 것이다.

“나쁜 사람들이야.”

대미미는 손을 팡팡 부딪쳐서 칼날에서 묻어나온 쇳가루를 털어냈다.

허리에 손을 척 하니 올린 채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짐승 가죽을 뒤집어쓴 사내들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녀에게선 나이와 상관없는 박력이 가득했다.

“아저씨들을 놓아주세요.”

태산박의 사내들은 움찔 몸을 떨며 그녀의 말대로 뒤로 물러섰다.

홍원, 장광, 화인지.

세 사람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대미미를 멍하니 바라본다.

“거화신녀……!”

대미미에게서 누군가를 겹쳐 본 것일까.

장광이 멍하니 그렇게 중얼거렸다.

기녀들의 반응은 더욱 극적이었다. 한쪽 구석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그녀들이 ‘거화신녀’라는 단어에 눈을 빛낸 것이다.

“거화신녀……!”

“천하제일 여장부(天下第一 女丈夫)……!”

“침모님께 말로만 들었던 그분의……!”

그녀들은 수군거리면서 대미미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얘들아, 지금!”

그 와중에 대미미의 괴력을 이미 알고 있던 아이들은 행동이 빨랐다.

소호를 비롯한 소년들은 잠시의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달려가 얻어맞은 세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런 젠장.”

회색 늑대 양종대가 정신을 차린 것은 바로 그 때쯤이었다.

그는 허옇게 샌 수염을 꿈틀거리며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이 병신 같은 것들아! 두목은 쓰러지지 않았어!”

“……!”

모두의 시선이 다시 정호에게로 쏠렸다.

그는 바닥에서 꿈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마치 고장 난 목각 인형처럼 양팔이 따로 놀았다.

그는 허리의 근력만으로 꿈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키더니, 퉤, 하고 입에 잔뜩 고여 있던 핏물을 거칠게 내뱉었다.

“방심했군…….”

정호의 목소리는 섬뜩하리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칼을 놓지 않았다면…… 양팔과 다리로 충격을 분산시키지 못했다면……. 죽었을지도.”

죽음.

즉, 살인.

대미미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정호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눈을 끔뻑거리더니. 클클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그는 양팔을 바닥에 턱하니 올려놓고 자력으로 빠진 어깨를 끼웠다.

우득거리는 뼈 소리와, 억눌린 신음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확실히, 정호는 악당의 매력이 있는 사내였다.

그는 감각을 확인하는 듯 양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러져 버린 콧대도 자기가 직접 똑바로 세웠다.

“킁. 카악, 퉤!”

콧대에 고여 있던 피를 입으로 뱉어 냈다. 정호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기어이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온몸이 저릿저릿해……. 뼈에 금도 많이 갔군. 피부가 팅팅 붓는 것 같은데.”

그는 우둑거리면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마침내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멀쩡히 버티고 섰다.

피투성이에 정상적이지 않은 몰골이지만, 오히려 위압감은 처음보다 더 강해졌다.

“잠깐 방심한 대가가 너무 큰데…….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겠어.”

팅팅 부은 눈으로도 번뜩이는 살기가 강렬했다.

그는 비틀비틀 걸어가,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태산박 사내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그가 노려보는 사람.

대미미였다.

“두목! 잠깐, 잠깐.”

“말리지 마, 부두목.”

“안 말려. 그래도 지금은 일단 조금이라도 더 회복해라. 한숨이라도 더 운기조식을 취해. 여긴 적진이야.”

“저것들은…….”

“우리가 있잖아.”

부두목, 양종대는 확실히 나이를 먹은 만큼 현명했다.

그는 혈기왕성한 두목을 달래면서 올바른 길로 조언할 줄을 알고 있었다.

정호는 이를 악물고 잠시 고민하더니 씹어 뱉는 듯한 말투로 외쳤다.

“저년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인 척하는 요괴다! 하지만 힘만 세지 별거 없어.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죽여 버려라.”

정호의 말은 마치 어둠 속을 밝히는 신호탄과 같았다.

침묵을 지키던 태산박 사내들이 일제히 돌변하며 살기를 내뿜었다.

말에는 묘한 공능이 있다.

아무런 이름이 없을 때는 이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괴이한 소녀였으나, 요괴라는 이름이 붙은 순간 죽여 없애야 할 천인공노(天人共怒)의 대적일 뿐이다.

사방에서 내뿜는 살기에 대미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무리 강한 척해도 고작 열한 살의 소녀.

산전수전 다 겪은 사내들의 진심 어린 살기를 맞으며 멀쩡할 리가 없다.

‘무서워…….’

대미미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가다듬으며 다부지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랑스러운 부모님의 가르침이 떠올렸다.

선하게 살며 웬만하면 참고 살되, 한번 싸우면 물러서지 말라고 하던 아빠.

뒷일은 책임질 테니 가족들을 무시하거나 괴롭히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응징하라던 엄마.

“내 가족들을…… 괴롭히지 마!”

공기가 웅웅 떨렸다.

그녀가 마음이 시원하도록 크게 소리쳐 보니 사내들의 살기가 더 이상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혼자가 아니었다.

“잘했어, 미미야. 대단한데?”

“고생했어. 이제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

“충격적이야. 미미가 이렇게 용감했다니…….”

소호, 섭주해, 조서인.

“아……!”

어느새 다가온 소년들이 대미미의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대미미는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 소년들만 함께 있다면 그녀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일단 저 사람, 운기조식 할 틈을 주면 안 돼.”

소호가 태산박의 두목, 정호를 가리키면서 씩 웃었다.

“이번엔 우리 차례야. 공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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