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3화
제18장 무산 철공주 (13)
장광이 애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니 왜! 왜 안 됩니까!”
대미미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삐쭉거리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왜 그런 걸 묻는지 이해도 안 되지만……. 설령 이해한다고 해도 답은 똑같다.
십일 세의 소녀가 머리카락도 없는 아저씨에게 누님이라 불리는 걸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꺄아!”
그런데 그 모습이 묘한 호감을 주었는지 반대쪽에 모여 있던 기녀들로부터 환성이 터져 나왔다.
“귀여운 누님이야.”
“새로운 거화신녀!”
“탐화루에 누님이 생겼어!”
까르르 웃으며 대미미를 응원하는 모습이 이미 싸움이 끝나기라도 한 듯한 분위기였다.
대미미는 너무 당황해서 눈만 깜빡거렸다.
“아, 아직, 안 끝났는데요……?”
드드드―.
집중이 풀린 탓일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탁자 저편에서 밀려오는 힘이 묵직했다.
“으햡!”
“으랏차차!”
건너 쪽에 모여 있는 사내들의 기세가 뜨거웠다.
기묘한 기합을 지르면서 전력을 다해 밀어붙이는 힘이 양 손바닥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드드드―.
안정적으로 버티던 균형이 무너졌다. 양팔과 허리가 슬슬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우우.”
대미미는 당장 자신의 발밑에서 우지직― 소리를 내며 뭉그러지는 나무 바닥을 보며 허둥거렸다.
“미미야! 당황하지 마. 명경지수(明鏡止水)를 떠올려 봐.”
“명경지수……?”
“응. 시원하고 차분한 연못. 흔들림 없는 평온한 모습. 외부의 간섭이 없는 절대적이고 조화로운 내부의 화합!”
“으응?”
소호가 쾌도난마로 진격하는 믿음직한 오라버니라면, 섭주해는 늘 인생의 격언을 가르쳐 주는 사서오경(四書五經) 같은 존재였다.
이해하기 어렵긴 하지만, 분명 도움이 된다.
“어, 어려워…….”
삐걱삐걱.
바닥이 비명을 질러 댔다. 마음은 조금 진정됐지만 아직 부족했다.
섭주해가 바닥을 보고 대미미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탁자를 함께 밀어 주면서 말을 이었다.
어느새 푸른 귀광(鬼光)은 사라지고 없었다. 본래부터 창백했던 얼굴이 더욱 창백해져 있을 뿐이었다.
“끄응! 저분들이 기뻐하는 거…… 나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정말……?”
“응. 저분들은 너를 보면서 안심하신 거야.”
“나를 보면서 안심했어……?”
“응.”
대미미는 그제야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걱정되는 일이 있을 때면 늘 소호가 거침없이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심하곤 했었다.
그런데 기녀 언니들은 자신을 보면서 안심한다고 한다.
“소호 오라버니처럼?”
“응. 소호 형처럼.”
섭주해가 창백한 얼굴로 웃었다.
대미미는 마침내 깨달았다.
즉, 저 언니들에게 있어서는 대미미가 소호 오라버니다.
“헤헤.”
대미미는 웃으면서 양손에 힘을 더했다.
동그랗고 순박한 눈동자에서 황금빛 기운이 살짝 머물다가 사라졌다.
발밑의 나무 바닥이 으적― 소리를 내며 좀 더 아래로 무너지고, 거대한 오석 탁자가 서서히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얍!”
쿠구궁―.
“크헉.”
“뭐, 뭐야!”
“갑자기 더 세졌…… 큭!”
건너편의 사내들이 괴성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툭.
대미미가 정갈하게 땋아 놓은 머리카락이 풀리며 옆으로 흘러내렸다.
양발.
양다리.
허리에서 어깨로.
타고난 천생신력(天生身力)에 무산학관에서 배운 천근갑의 묘리(妙理)가 더해졌다.
단단한 오석 탁자 안으로, 대미미의 도톰한 손바닥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오라버니도 힘내.’
대미미는 탁자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소호를 향해 미소 지었다.
***
“와아. 탁자에 묶인 게 아홉 명이나 되네. 일곱 명일 줄 알았는데……. 미미가 더 강해졌나 보다.”
소호는 저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미미와 주해는 강하다. 홍원, 장광, 화인지 삼인방도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태산박의 산적이 세 명뿐이라면 그들만으로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소호가 ‘보기엔’ 그랬다.
“꼬마야.”
“네?”
“너는 나이를 감춘, 반로환동의 고수라거나 그런 것이냐?”
회백색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중년의 사내.
태산박의 부두목 양종대는 침중한 표정이었다.
“히힛, 제가 그렇고 하면 여기서 얌전히 물러나 줄 거예요?”
“……그럴 리가.”
“그럼 아니라고 할게요.”
소호는 빙긋 웃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양종대는 두려운 무언가를 보듯 섬뜩한 눈으로 소호를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한가요?”
“너는…… 그런가. 그래. 그런 거군.”
연륜이 느껴지는 외모와 온몸에 새겨진 흉터 때문일까.
양종대는 눈빛이 더욱 깊어 보였다.
“천하일실(天下一失).”
“응?”
“가끔 너 같은 녀석이 나타나지. 하늘의 실수 같은 녀석.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을 도전해서 겨우 넘어서는 벽을…… 그런 게 있었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넘어서 뛰어가 버리는 얄미운 놈.”
“네? 제가요?”
“그래.”
소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양종대의 말을 듣자마자 생각나는 거대한 ‘벽.’
가면을 쓰고 겨뤘던 아버지와의 대련.
그리고 유준을 상대로 진노하던 아버지의 진짜 기세.
‘안 되지. 상상도 안 돼.’
그런 벽을 쉽게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잘못 아신 것 같아요. 제 벽도 너무 높은데요?”
“흥. 네가 생각하는 ‘벽’과 우리의 ‘벽’은 다르다.”
“네?”
“너는 두려움이 없다. 보면 알아. 이제껏 실패해 본 적이 없어서, 세상을 우습게 보는 종자의 눈빛이다. 그런 눈은…… 다른 사람의 나약함을 이해하지 못해. 두고 봐라. 넌 고독해질 거다.”
소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양종대의 말이 왠지 모르게 저주처럼 느껴져서 섬뜩했다.
“마침내 그런 놈이 우리에게도 생겼다. 절대로 뺏길 수 없어.”
양종대는 여전히 소호에게 칼을 겨눈 채로, 눈동자만을 돌려 힐끗 뒤쪽을 바라보았다.
소호도 그의 시선을 따라 뒤쪽을 바라봤다.
태산박의 젊은 두목이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취하고 있었다.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놀랍도록 길었다.
거세게 들이쉬고 내쉬는 숨결 사이로, 머리 위에 희미하게 빛의 고리가 보이는 듯했다.
“으음, 가만히 두면 안 될 것 같네요.”
소호는 이제 공격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후우.”
가라앉는 호흡.
포근한 역근경 진기가 소호의 두 눈을 맑게 해 주었다.
상대방의 무공 기수식을 똑같이 따라한 채로 상상해 보았다.
평범한 크기의 칼.
이 칼을 들고, 칼끝을 반 보 정도 앞으로, 그리고 살짝 비틀면서 상단으로 치우친 기수식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어떤 동작을 할까?
본인을 양종대의 모습에 겹쳐 보면서 생각했다.
‘상단 일격. 횡타 일격. 대각선으로 참(斬).’
새하얀 종이에 먹으로 그림을 그리듯.
붓을 세게 찍어 눌렀냐, 가늘게 살짝 대기만 했냐에 따라 필체를 짐작할 수 있듯이.
양종대의 기수식에서 시작된 움직임이 굵은 필체를 남기며 텅 비어 있던 공간에 선을 그렸다.
‘이거야.’
소호는 곧바로 상상해 냈다.
공격적이고 호쾌한 칼.
세상만사 두려울 게 없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단순하게 해결해 버리는 강력하고 묵직한 공격일변도의 도법.
‘호흡은…….’
소호의 시선이 지그시, 양종대를 바라봤다.
들숨과 날숨.
그 길이와 깊이를 이해해 본다.
호흡을 내쉴 때마다 들썩이는 어깨와 시선의 흐름을 칼과 한 몸이 되어 자연스레 느껴 본다.
“아하.”
소호의 얼굴에서 염화미소(拈華微笑)가 꽃처럼 피어올랐다.
시작은 상단 일격.
내가 칼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정해진 경로에, 칼을 올려 둘 뿐.
쉬이익―.
바람이 갈라졌다. 호쾌한 내려 베기가 양종대의 어깨를 노렸다.
“……!”
쩡!
쇳덩이와 쇳덩이가 부딪치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평생을 익혀 온 초식으로 똑같은 공격을 겨우 가로막은 자.
양종대가 눈을 부릅떴다.
“호도팔법……?”
한계까지 치켜뜬 눈.
소호를 바라보는 얼굴엔 불신의 빛이 가득하다.
쩡! 쩌정!
상상 이상이었던 것일까?
거기에 횡타 일격과 대각선 참격이 이어지니, 양종대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놀랐다.
‘부족하네.’
반면에 소호는 아쉬움을 느꼈다.
상상해서 급조한 공격은 상대방을 놀라게 하는 데는 충분했지만 급조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반 박자가 느렸다.
힘도 생각만큼 못 실었다.
공격하면서 밀어붙여서 팍! 뒤로 밀어내야 하는데, 막히자마자 도리어 칼이 튕겨져 나왔다.
아쉬웠다.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육체 탓이었다.
힘의 부족을 절실하게 느꼈다.
‘바꿔 보자.’
이번엔 반대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상대방의 도법은 알았다.
그런 강하게 밀어붙이는 호쾌한 도법엔 어떤 공격이 효과적일까?
질문을 떠올리자마자 번뜩 생각나는 무공이 있었다.
조서인의 창술.
무기는 다르지만 운용이 섬세하고 움직임이 바람 같다는 점에선 응용할 수가 있다.
생각하자마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앞으로 한껏 발을 뻗어 크게 내딛고, 탄력을 살려 뛰어오르며 들고 있던 칼을 앞으로 강하게 내찌른다.
마치 창술 같은 도법.
날카로운 칼끝에 조가창의 묘리가 담겼다.
쩡!
간결한 찌르기가 연이어 이어졌다.
상대방의 손목, 어깨, 무릎 근처를 섬세한 손놀림으로 찌르듯이 얇게 베어 본다.
양종대는 이번에도 당황했다.
다섯 번의 공격.
다섯 번의 방어.
하지만 횟수가 거듭될수록 양종대는 안정을 되찾았고, 마지막엔 강하게 내려치는 호도팔법 일격에 소호가 한 발 물러섰다.
“와, 안 뚫린다. 아저씨 강하네요.”
소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슥―.
“……!”
미처 피하지 못했던가.
양종대의 뺨이 살짝 베여서 피가 배어 나왔다.
“하!”
양종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한 발을 훌쩍 물러나서 칼끝을 아래로 향했다.
“꼬마야. 너나 아까 그 여자애 같은…… 특이한 존재들이 왜 세상에 별로 없는지 아느냐?”
“응? 왜 그런 거예요?”
“다 죽기 때문이다.”
“네?”
“평범한 놈들이 가만히 놔두질 않거든.”
소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졌다.
“폭죽을 너무 많이 넣은 화약 같은 거지. 순식간에 환하게 빛나다가, 잔상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그게 너희 같은 족속이다.”
“으음…….”
소호는 양종대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백색 수염 사이로 입술을 굳게 다문 표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소호를 보고, 뒤쪽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태산박 사내들을 보더니 뭔가를 결심한 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두목. 계획을 바꿔야겠어.”
양종대는 갑자기 목에 걸고 있던 짐승의 뼛조각 같은 것을 입으로 불었다.
삐이익―.
“……!”
강렬한 호각 소리가 탐화루를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