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4화
제18장 무산 철공주 (14)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탐화루의 아래쪽에서 수십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몸에 걸친 짐승 가죽 사이로 보이는 근육질 몸에 흉터가 잔뜩 새겨진 자들이다.
그들은 맹수라도 상대하려는 듯 제각각 철퇴나 쇠사슬 같은 흉악해 보이는 무기를 들고 기세등등하게 주변을 둘러쌌다.
입구와 창문 위주로 퇴로를 차단하고, 한 손에 상체를 겨우 가릴 만한 소형 방패를 든 자들이 가장 먼저 앞으로 나왔다.
한 동작, 한 동작을 미리 연습한 듯 조심성이 배어 나왔다.
“어?”
“뭐야?”
헌데 장내의 상황은 그들이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놀라고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혈수라는……?”
회색 늑대, 양종대는 소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버럭 소리쳤다.
“꼬마들을 붙잡아! 방심하지 마라. 두목이 다쳤다!”
“……!”
두목의 부상.
태산박 사내들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얼굴이 피범벅인 채 운기조식을 취하고 있는 두목의 모습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이 꼬마들이……?”
“감히 두목을!”
의아해하는 자도 있었으나, 다들 양종대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내들이 살기를 피워 올리며 조금씩 접근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으아. 이건 예상 못했는데…….”
소호는 올라온 적들의 숫자를 보고는 도망칠 수 있는 퇴로를 찾아보았다.
새로 나타난 사내들의 숫자는 대략 삼십여 명.
한 명, 한 명도 만만치 않은데 완전히 진형을 형성하고 있으니 퇴로는 보이질 않았다.
생각을 좀 더 해 보려고 했으나, 양종대에게서 지체 없이 칼이 날아왔다.
“우왓! 생각할 시간을 좀 주면 안 돼요?”
“허튼 소리! 장난치지 마라!”
쉬이익―.
섬뜩한 소리와 함께 양종대의 칼이 일격필살의 위력을 담아 아래로 내리꽂혔다.
호도팔법.
제 일 초식인 맹호와지(猛虎臥地)였다.
사나운 호랑이가 땅에 엎드리니 곧바로 뛰쳐나올 전조라.
쿵, 하고 양종대가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에 널브러져있던 집기와 음식들이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강력한 기세.
패력의 도법이 한 수, 한 수 위협적으로 소호가 있던 공간을 반으로 갈라 버리며 점차 다가왔다.
“큰일인데!”
소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위험한 상황인데도 소호는 스스로가 이상할 만큼 차분하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돌아가는 형세가 명확하게 느껴졌다.
퇴로가 보이지 않는다면 싸울 수밖에 없다. 맞서 싸우기로 생각을 바꾸자 이 상황을 타개할 최선의 방법이 떠올랐다.
“미미야! 밀어!”
소호의 몸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렸다.
일야회주 묵신(默神)의 신법.
신묘한 움직임으로 양종대의 공격 범위를 벗어난 소호가 오석 탁자를 밀면서 버티던 사내들의 뒤에서 훌쩍 나타났다.
소호가 그들의 무릎 뒤를 발로 걷어차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힘의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컥.”
“므어어!”
탁자를 미느라 양손이 묶여 있던 태산박 사내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다들 뒤로 엉덩방아를 찧거나 줄줄이 옆으로 쓰러졌다.
오석 탁자가 파도처럼 밀려들고, 사내들은 그에 휩쓸리듯 바닥을 굴렀다.
“이노옴!”
분노한 양종대가 소호를 향해 돌진했다.
쉬이이익―.
섬뜩한 소리와 함께 호도팔법의 일격이 날아왔다.
소호는 산 원숭이 같은 몸놀림으로 훌쩍 오석 탁자 위로 뛰어올랐다.
분기탱천한 양종대와 오석 탁자 위에 쭈그려 앉은 채 싱긋 웃고 있는 소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드드드드―.
오석 탁자가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왔다.
양종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가 양손으로 칼을 감아쥐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훅 뿜어지는 뜨거운 기세.
일도양단, 불꽃같은 도기(刀氣)가 정면을 반으로 갈랐다.
“우왓!”
소호가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뒤로 펄쩍 뛰었다.
허공에서 빙글 회전하며 팔을 뻗어 미미의 뒤 섶을 잡아챘다.
쿠구궁―.
“꺅!”
귀여운 비명 소리와 함께 대미미가 힘을 빼면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분다.
오석 탁자가 반으로 쪼개지고, 대미미의 한 발자국 앞까지 나무 바닥에 날카로운 도흔이 생겨났다.
섬뜩한 일.
대미미가 계속 오석 탁자에 붙어 있었다면 탁자가 잘릴 때 얼굴에 큰 상처가 생겼을 것이다.
옆에서 손을 보태던 섭주해도 창백한 안색으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끼기긱― 쿵.
“컥.”
“끄으으!”
불행 중 다행이랄까.
탁자를 밀던 태산박 사내들은 오석 탁자에 깔린 꼴이 되고 말았다.
양종대는 신음하는 수하들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가 오로지 지키는 것은 두목인 정호뿐인 듯했다.
쩍 갈라진 오석 탁자 사이를 오연히 걸어 나오는 회색 늑대 양종대.
무성한 수염 사이로 거친 숨을 내쉬며, 살기 어린 눈빛으로 소호를 노려보았다.
“놓치지 않겠다.”
그 집요한 모습에 소호는 난감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소호는 힐끔, 그런 양종대의 등 뒤에서 여전히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태산박 두목을 바라봤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모두 이리로 모여요!”
홍원, 장광, 화인지 삼인방과 대미미, 섭주해, 조서인이 모두 소호의 주변으로 와서 둥그렇게 원진을 형성했다.
수적 열세는 분명했다.
서른이 넘는 태산박 산적들이 흉흉한 무기를 든 채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심지어 어설픈 자들도 아니었다.
방패와 철퇴를 번갈아 든 모습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더했다.
‘전력이 부족해. 아쉽다. 몇 명만 더 있었어도…… 관심이 좀 분산되면……. 어라?’
안타까운 소호의 바람을 누군가 들은 것일까.
탐화루 아래쪽에서 뭔가가 우직― 하고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가 이 층에 진입했다.
“어?”
소호는 그들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무산학관에서 매일 보던 얼굴이었다.
마치 아직 덜 자란 곰 같은 소년.
오 척을 훨씬 넘는 큰 키에 턱은 사각형으로 각이 졌고, 코 밑에선 거뭇거뭇한 수염이 나기 시작한 덩치 큰 청년이다.
아니, 청년 같지만 사실은 소호와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소년이다.
올해 신입생 중 대미미에 이은 용 시험 차석의 인재.
대련이 있는 수업이면 항상 대미미의 대련 상대를 자처하는 추종자 중 첫 번째 인물.
자신이 현무방에 배정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항상 대미미의 곁을 맴도는 소년을 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전상……?”
소호가 당황하는 만큼 다른 아이들도 크게 놀라고 있었다.
특히 대미미의 놀라움은 컸다.
화들짝 놀라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멍하니 굳어져 있었다.
쿵, 쿵.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전상을 시작으로 정확히 열 명의 덩치 큰 소년들이 얼굴이 상기된 채 등장했다.
긴장과 불안, 그리고 쑥스러움.
소년다운 감정이 가득하지만 거기에 공포는 없다.
특히 가장 강한 감정은 분노였다.
그들의 맨 앞에 서는 자.
전상은 땋은 머리가 풀려 산발이 된 대미미의 모습을 보더니,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면서 소리쳤다.
“무산(武山) 철공주(鐵公主)를 구하자!”
“오오오―!”
덩치 큰 소년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영혼을 담아 포효했다.
“구한다! 우리가 구한다!”
“감히 무산 철공주를 건드리다니!”
그들의 공주님을 향한 마음이 탐화루에 울려 퍼진다.
무산학관에서 장난삼아 시작된 애칭.
목 인형을 들어서 메치고, 철로 된 기관을 망치로 박살 내 버리면서 시작된 호칭이 밖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순간이었다.
“우와!”
소호는 두 눈을 반짝이면서 미미를 쳐다봤다. 대미미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소녀는 차마 쳐다보지 못하겠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말았다.
“철공주?”
“무산 철공주래.”
“거화신녀! 꼬마 누님이 무산 철공주인가 봐! 공주님이었어!”
기녀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수군거렸다.
반면에 태산박 산적들은 이게 무슨 짓거리냐는 듯한 얼굴들이었다.
특히 전상 쪽에 가장 가까이 있던 산적 한 명이 바닥에 침을 퉤 뱉으면서 한 손에 들고 있던 철퇴를 들어 올렸다.
“이것들이 쳐돌았나? 저리 안 꺼져? 철공주는 무슨 철공주……!”
그 산적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무가(武家) 출신 소년, 소녀들의 수많은 경쟁을 뚫고 들어온 무산학관의 신입생.
그중에서도 힘 하나로 대미미의 뒤를 이어 차석으로 합격한 사람이 바로 전상이었다.
위협하는 철퇴를 왼손을 이용해 바깥으로 밀어내는 동작은 태극권의 교본 같았고, 우보를 내디디며 내뻗는 마보천충의 정권 일격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뻐억― 하고 북치는 소리와 함께 산적이 허리가 급격히 휘면서 뒤로 나가떨어졌다.
“커헉!”
산적은 바닥을 구르면서 거품을 토해 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은 쉽사리 회복될 것 같지가 않았다.
산적들의 안색도 급변했다.
비록 방심했다고는 하나 태산박에서 구를 대로 구른 경험 많은 사내였다.
그런 사내를 일격에 쓰러뜨렸다?
범상치 않은 힘이었다.
지금 나타난 열 명의 소년들이 마냥 우습게 볼 아이들이 아니라는 걸, 전상의 한 수로 깨달은 것이다.
“십걸(十傑)들이여! 가자!”
“우오오―!”
거센 함성과 함께 전상을 위시한 십걸들이 태산박 산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위기의 빠진 무산 철공주와 그녀의 추종자 십걸들.
낙양 암흑가에 회자될 전설의 시작이었다.
“좋아.”
소호는 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소년의 두 눈이 다시 양종대와, 그의 뒤에 앉아 있는 태산박의 두목 정호를 향했다.
“길이 생겼어.”
소호의 몸이 비호처럼 뛰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