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6화
제18장 무산 철공주 (16)
“변방의 산적 떼가, 감히!”
한 올도 흘리지 않고 뒤로 당겨 묶은 백발과 깔끔하게 다듬은 백염이 여전히 눈에 띈다.
육척 장신에 강건한 육신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꿈틀거렸다.
원래부터 강렬한 호안(虎眼)이었으나, 분노로 가득 찬 지금은 마치 불꽃이 뿜어지기라도 하는 듯하여 누구도 감히 마주볼 수 없을 듯했다.
콰드득―.
연사독이 움켜쥔 창틀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 댔다.
금이 간 벽면에서 갈라진 나무 파편들이 낙엽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막강한 힘.
상상을 초월한 악력이었다. 대미미의 외할아버지라는 것이 새삼 와 닿았다.
‘그런데 할아버지 양팔이……!’
소호는 연사독의 팔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힘줄이 우툴두툴 튀어나온 팔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새빨간 팔 위로 푸르스름한 혈관이 쿵―쿵― 심장이 뛸 때마다 맥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껍질이 벗겨진 동물의 속살 같기도 했고, 화상을 입은 피부 같기도 했다.
대체 어찌하여 저런 모습인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소호의 본능이 저 빨간색 팔이 위험하다고 경종을 울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정호도 동일한 듯 보였다.
“혈수라께서 납셨군.”
입꼬리를 위로 끌어 올려 웃고는 있지만, 정호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해 보였다.
무릎을 살짝 굽힌 마보 자세에 잔뜩 긴장한 듯 마른침도 삼켰다.
“그게 그 유명한 혈수라 연사독의 혈룡조(血龍爪)인가? 쇠도 구부릴 만큼 위력이 천하 일절이라던데……. 그 기괴한 모습을 보니 마공(魔功)이군?”
“말이 많다!”
연사독이 버럭 소리를 치자 탐화루가 흔들리는 듯했다.
“죽을 각오는 된 거겠지!”
“하핫! 내가 뭘 그리 잘못했소. 사내놈들이 주루에서 술을 한잔하다 보면 싸울 수도 있는 일이지.”
“가당찮은 소리.”
쿵.
연사독이 장내에 발을 들이는 존재감은 매우 커서 모든 싸움이 일시적으로 멈춰 있었다.
“산적 놈들이 떼로 몰려와서 이곳 탐화루에서 우리 하오문의 문도를 상처 입혔다. 그리고……!”
연사독의 시선이 난장판이 된 탐화루 전체를 한 번 훑고 상처 입은 화인지를 지나 마침내 대미미에게로 향했다.
“할아버지……!”
금세 울상이 되는 대미미.
강한 척해도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이었다.
할아버지를 보자 울음이 터지기라도 할 듯 눈망울이 그렁그렁했다.
연사독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는 분기탱천한 심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숨길 생각이 없었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안 그래도 빨갛던 팔이 이제는 붉다 못해 검게 보일 만큼 피가 몰렸다.
“네놈이 감히, 내 손녀를 건드려!”
그 나이, 무림에서 높은 배분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손을 쓰길 주저하지 않는다.
연사독이 정호에게 날 듯이 다가갔다.
그 순간, 각자 십걸들을 상대하던 방패를 든 산적들 다섯 명이 일제히 몸을 날려 연사독의 앞을 막아섰다.
“두목을 지켜라!”
척, 척, 척.
쿠웅―.
정면을 가리는 소형 방패들 다섯 개가 첩첩이 겹쳐지며 단단한 벽을 세웠다.
“파핫! 그까짓!”
연사독은 코웃음 치며 다섯 개의 손가락을 모두 오므린 혈룡조를 옆으로 그었다.
빠드득―.
소형 방패에 다섯 줄의 긴 균열이 생기면서 막아선 산적들의 몸이 옆으로 기우뚱거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산적들이 들고 있는 방패는 철제.
그런데도 맨손으로 쇠를 꺾고, 우그리며 그들에게 절망을 주고 있는 것이다.
연사독은 양손으로 산적들의 소형 방패를 하나씩 움켜잡고 옆의 벽면을 향해 힘차게 내던졌다.
꽈직, 하고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산적들은 단단한 벽에 처박혀 그 뒤로 일어서지 못했다.
연사독의 기세가 막강했다.
혈룡조 일격을 막아 내는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을 정도였다.
“손녀? 손녀어?”
정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더니 무시무시한 얼굴로 대미미를 다시 한 번 노려봤다.
소호가 재빨리 그 사이를 가로막았다.
확― 하고 살기가 쏟아져 내렸지만 소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호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그럴 줄 알았지. 당신 손녀는 요괴다.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 날 이 몰골로 만든 게 저년이야!”
척, 하니 대미미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정호는 마치 정의의 협객처럼 소리쳤다.
대미미의 표정이 흐려졌다.
소호는 대미미의 어깨를 짚어 주었다. 연사독도 웃음을 터뜨렸다.
“잘했다, 손녀야. 망나니 같은 놈에겐 매가 쥐약이다.”
다섯 명의 산적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연사독이 마침내 정호와 손을 맞댔다.
까앙―.
호도팔법의 참격과 혈룡조의 조법이 만나자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렬한 파공음.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공격들이 서로에게 쏟아졌다.
“못난 놈이, 저 조그마한 손녀에게 당한 걸 자랑이라고 떠드는구나!”
요괴라고 불렀는가?
연사독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과연 내 손녀라며 오히려 웃음을 터뜨릴 뿐이다.
대미미의 얼굴에 안도가 떠올랐다.
소호와 대미미, 심지어 칼날이 겨눠져 있던 부두목 양종대까지 멍하니 지켜볼 만큼 두 사람의 대결은 수준이 높았다.
연사독이 양팔을 벌리니 어깨에 걸치고 있던 붉은색 비단 장포가 불꽃처럼 휘날렸다.
그와 동시에 치솟는 막강한 기파.
시뻘겋게 달아오른 연사독의 양손이 눈에 보일 만큼 선명한 붉은빛 강기에 뒤덮였다.
정호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를 악물고 기운을 끌어 올리니 칼끝에서부터 녹색 빛의 강기가 서서히 덮여 나갔다.
쩌저정―.
콰득―.
실리적인 두 사람이기에 허례허식은 전혀 없었다.
번뜩이는 시선, 의도가 교차하는 순간 곧바로 공격이 날아왔다.
번쩍거리는 강기(剛氣)들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팽팽하게 맞섰다.
“이노옴!”
하지만 먼저 파탄이 난 것은 정호였다.
진기를 끌어 올려 겨우 강기를 형성한 정호는, 숨 쉬듯이 자연스레 융통무애한 진기를 두른 연사독을 상대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큭……!”
정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금껏 호도팔법의 묵직함으로 버텨 왔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착의 묘리로 칼을 끌어당긴 연사독이 반의 묘리로 칼날을 옆에서 두드렸다.
쩌적―.
“……!”
안 그래도 힘을 못 이겨 깎이고 금이 가던 칼이 결국 제 수명을 다한 채 반으로 뚝 부러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치솟는 기파.
연사독의 양손에 각각 용이 한 마리씩 생겨난 것만 같았다. 쾅― 하고 내딛는 진각, 허리에서 시작된 회전력이 양손의 혈룡조에 실렸다.
두 마리의 용이 정호의 왼쪽 어깨와 오른쪽 옆구리를 동시에 물어뜯었다.
“크헉……!”
실제로 짐승에게 물어뜯긴 것 같은 깊은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살점이 너덜너덜해질 만큼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정호는 낯빛이 창백해지면서 울컥, 입에서도 피를 토해 냈다.
승부는 났다.
더 이상의 싸움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정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하오문…… 하오문……. 시류를 탔어야지……. 언제까지고 구파일방의 시대일 것 같은가. 그들의 종노릇이 지겹지도 않은가.”
“뭐라?”
“시대는 바뀐다……. 그리고 시대를 바꾸는 건, 너희 같은 늙은이가 아니라…… 우리야……!”
정호는 사경을 헤맬 상처를 입었음에도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게선 비틀린 신념마저 느껴졌다.
“무슨 소릴 하는 건가 했더니.”
연사독은 피식 웃으며, 옆에 있는 아이들을 바라봤다.
뒤집힌 채 반으로 쪼개진 오석 탁자를 보고, 외할아버지의 승리에 기뻐하는 대미미를 봤다.
그리고 힘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손녀의 앞을 지켜선 소호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래. 시대는 바뀌겠지. 하지만, 그 주역은 네가 아니다.”
담담하게 가라앉은 연사독의 눈과 격렬하게 타오르는 정호의 눈이 서로를 바라봤다.
“두목!”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일까.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양종대가 자신의 목숨도 도외시한 채 달려 나가 정호를 잡아챘다.
“무상! 여기서 우릴 죽이면 하오문이 곤란해질 거요. 우린 소림사 앞에 모인 대천문 회합에 서명을 하고 왔소.”
“내 알 바 아니다. 그리고 이건 네놈들이 시작한 일 아닌가?”
“맞소. 어쨌거나 그쪽의 피해는 두목에게 베인 저 사내 한 명. 그리고 이쪽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도 없지. 그러니 이쯤 하는 게 어떻겠소?”
노회한 회색 늑대는 과연, 능수능란한 면이 있었다.
피해만 놓고 따지면 태산박이 더 큰 손해를 본 면이 있었다.
여기서 더 손을 쓴다면 무림은 무상의 잔혹함을 비난할지도 몰랐다.
허나 연사독은 그런 평판을 신경 쓰는 위인이 아니었다.
“웃기지 마라. 네놈들이 시작한 일. 대가를 받아라.”
정호를 완전히 죽이기 위해 다가가는 연사독.
양종대는 발악하듯 소리쳤다.
“도망친다! 시간을 끌어라! 안 되겠다 싶으면 아이들을 인질로 잡아!”
움찔.
손녀에 대한 마음으로 연사독의 발걸음이 무뎌지는 그 찰나에 생사가 갈렸다.
양종대는 정호를 들쳐 업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마치 다른 놈들은 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다.
태산박의 사내들도 허둥지둥 달아나기 시작한다. 싸울 때는 악착같더니, 도망치는 모습은 오합지졸 겁쟁이가 따로 없었다.
연사독은 어이가 없어져서 웃고 말았다.
“나머진 진표가 알아서 하겠지.”
하오문 낙양 제일지부장 공진표.
지금 가장 분노하였을 그가 뒤를 맡을 것이다.
연사독이 홍원과 장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화인지의 가슴 상처를 천으로 둘둘 감으면서 소리쳤다.
“살아 있습니다! 의원에게 데려가야 합니다!”
“그래. 어서 데려가라.”
연사독은 홍원과 장광이 황급히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 뒤, 대미미를 안아 들었다.
“손녀야, 괜찮은 거냐.”
“괜찮아요. 할아버지, 강해!”
“하핫, 그래! 할아버지는 강하다!”
연사독은 키가 오척 가까이 되는 대미미를 어깨에 앉혔다.
그러고는 소호에게 다가와 머리를 헝클어 놓았다.
“어엇?”
“잘했다, 꼬마야. 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소호, 장소호예요, 할아버지.”
“소호라. 그랬군. 미미가 많이 이야기했었다.”
연사독은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어색한 말투로 말했다.
“잘했다. 미미를 지켜 줘서 고맙다.”
“히힛, 뭘요. 미미는 제 동생이에요.”
“그런가.”
소호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걱정스럽게 흘깃거리는 전상과 아이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저 친구들이야말로 미미를 지켜 줬어요. 가장 위험한 상황에 달려와서 도와줬거든요. 학관에서도 늘 미미를 챙기고 지켜 줘요.”
“저 아이들이?”
소호의 말이 들렸던 것일까.
전상을 포함한 십걸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들이 보였다.
“이대로 끝내면 안 되겠군. 너희 모두 이 연사독의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지금은 뒤처리 때문에 정신이 없다만……. 조만간 감사의 마음을 표할 자리를 만들도록 하지.”
연사독이 가까이 가서 직접 감사를 표하니, 전상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우물쭈물했다.
“아, 아닙니다. 무산 철공주를 위해서라면. 당연한 일…….”
“철공주?”
구석에서 지켜보던 기녀들이 또다시 수군거리며 눈을 빛냈다.
다행히 연사독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치하만 하고 돌아섰다.
그는 대미미를 옆에 내려 두고, 아이들을 한데 모았다.
섭주해도, 조서인도, 모두가 모여 연사독의 앞에 섰다.
“시간이 늦었다. 마차를 보내 줄 테니 다들 일단 학관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다시 한 번 이야기하마. 우리 하오문과 내 손녀를 도와줘서……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
포권을 취하면서 고개를 숙이는 하오문의 일대 거인.
소호를 비롯한 아이들 모두 마주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여 예를 받았다. 아이들은 싸움이 끝난 것에 대한 감동과 여운에 휩싸였다.
아이들이 하오문의 배웅을 받아 돌아간 뒤 학관은 무단이탈과 낙양에서의 싸움으로 한 바탕 시끄러워지지만 그건 또 다음의 이야기.
무산 철공주와 십걸의 시작으로 평해지는 아이들의 비밀스러운 낙양 모험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무산 철공주의 탐화루 난투
―태산박 패퇴(敗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