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8화
제19장 균자난청(菌子難淸) (2)
철표의 쌀쌀맞은 말투를 들으니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들이 다시 밑으로 숨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하기에, 소호가 앞으로 나섰다.
“사실은…….”
소호는 숨김없이 사실대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대미미가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했던 것부터, 그래서 찾아간 탐화루에서 벌어진 일들까지.
교관들의 반응은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철표와 연홍 사부는 중간에 몇 번이나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태산박과 정호의 이름이 나올 때 특히나 더욱 그랬다.
“그런가. 일의 전말은 알겠다.”
철표는 항상 무표정한 얼굴이라 속을 짐작하기가 힘들다.
판결이 어찌될까?
잠시간의 침묵이 아득히 길게 느껴졌다.
“너희들.”
“네!”
아이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본래 무산학관의 관도가 밖에서 사사로이 사람을 상하게 하면 퇴학까지도 고려해야 할 중죄다. 하지만 이번엔…… 하오문의 서찰을 보면 어쩔 수 없이 휘말렸다는 말이 맞겠지.”
소호와 아이들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철표의 뒷말을 기다렸다.
“……그러니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한다. 단,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아무 처벌 없이 넘어가면 교육이 되질 않겠지. 나쁜 선례로 남을 수도 있고. 그러니 벌칙을 주겠다. 현무방 아이들, 너희는…… 이태산이 기다리고 있더군. 지금 곧바로 찾아가는 게 좋을 거다.”
“……!”
퇴학이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던 아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전상을 포함한 십걸 아이들은 없었던 일로 해 준다고 했는데도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굳어졌다.
‘이태산이라는 분이 그렇게 무서운가?’
소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현무방의 방장 이태산.
네 개의 기숙사를 통틀어 가장 강한 학생 중의 한 명이라는 걸 소호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전상이 그 커다란 덩치로 어깨를 움츠리며 위축된 모습은 탐화루에서의 그 영웅 같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으음.”
그 모습이 안타까웠던 모양이었다.
대미미가 총총걸음으로 다가가 전상의 손을 양손으로 꾹 붙잡으며 속삭였다.
“이번에 도와줘서 고마워요.”
“철공주……!”
“안 잊을게요!”
“공주우……!”
전상과 십걸아이들이 감격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장소호, 대미미, 섭주해. 조서인.”
“네!”
“너희는 앞으로 한 달간 ‘서편 주방’의 청소다. 알겠나?”
“……?”
소호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들을 쳐다봤고, 아이들 또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모두의 눈에는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청소라니.
심한 처벌이 아닌 듯했지만, 그들 중엔 서편 주방이라는 곳이 어딘지 아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어라?’
그 와중에 소호는 연홍의 반응에 주목했다.
항상 예쁘장한 표정을 유지하던 연홍이 당황하면서 철표를 쳐다봤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반응은 순식간에 다시 사라졌고, 연홍은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네. 없었던 일로 해 주셔서 감사해요, 교관님.”
소호의 포권을 시작으로 아이들 모두가 포권을 취하면서 예를 표했다.
***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어? 뭐라고? 소호야?”
소호는 조서인으로부터 세 걸음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다시 한 번 ‘서편 주방’의 몰골을 살펴보았다.
축축하고 습한 공기.
특히 바닥과 벽면을 뒤덮은 곰팡이와 기름때가 가장 큰 문제였다.
“벌레도 있고, 으왓, 구석 그늘에 버섯도 났네……. 벌레도 있고.”
벌레는 중요하기 때문에 두 번 이야기했다.
소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의지를 다졌다.
“좋아. 여기를 깨끗하게 만들어 보이겠어! 바닥에 누워서 잘 수도 있을 만큼! 철표 교관님도 깜짝 놀라게!”
“그렇게까지……?”
의문을 표하는 조서인의 뒤로 나머지 아이들이 차례차례 주방에 도착하고 있었다.
소호와 조서인은 반가운 마음에 마중을 나갔다.
대미미와 섭주해, 그리고 마희희와 윤지관도 함께 있었다.
“희희랑 지관이도 왔네?”
“흥, 너희가 벌을 받는다니. 도대체 어떤 벌을 받나 궁금해서 찾아왔어.”
“조금이라도…… 후우. 도와주려고…… 왔어. 후우…….”
항상 말은 퉁명스럽게 하지만 지나고 보면 늘 도움이 되는 행동만 했던 통통한 소녀, 마희희가 들고 있던 나무 상자를 바닥에 쿵― 하고 내려놓았다.
단단한 나무 상자 안에는 살짝 시든 시금치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녀의 뒤에서는 빼빼마르고 주근깨가 있는 소년, 윤지관이 자신의 몸통만 한 포대 자루를 낑낑거리며 겨우 내려놓았다.
“헉, 헉, 후우. 밀가루가 너무 무거워…….”
윤지관은 밀가루를 내려놓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으며 숨을 헐떡였다.
“야! 그렇게 허약해서 어떻게 군사가 될래? 뭐든지 체력이 생명인 거 몰라?”
“그렇긴 한데…….”
마희희의 송곳 같은 지적에 윤지관은 씁쓸하게 웃었다. 숨을 헐떡일 때마다 양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고생했어, 얘들아. 너희들까지 고생하게 되어서 미안해.”
“됐어. 고생은 무슨. 은씨 싸가지는 안 온다고 했지만, 우리는 같은 백호방이니까 도와는 줘야지.”
은씨 싸가지.
은위군을 말하는 마희희의 목소리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다.
“사실 우리 잘못이니까. 괜찮아. 바쁘면 못 도와줄 수도 있지.”
“흥, 걔는 너무 혼자만 살아가는 애라 분명히 힘든 일이 생길 거야.”
“희희가 많이 화가 났구나.”
“내가 왜 도와줘야 하냐면서 지 볼일 보러 낙양에 가 버렸는데 그럼 화가 안 나?”
“히힛, 진정해.”
소호는 마희희를 진정시키면서 미미를 응시했다.
“어떻게 됐어? 내가 부탁한 건 다 가져온 거야, 미미야?”
“응!”
한편 혼자서 두 개의 상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온 소녀.
대미미는 커다란 나무 상자 두 개를 한 손에 하나씩, 마치 돌멩이 하나 내려놓듯이 가볍게 바닥에 두었다.
쿵, 하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나무 상자 안에 가득 들어 있던 푸르스름한 감자들이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오라버니. 영웅객잔에 갔더니 왕오 아저씨가 어디에 쓸 거냐고 자꾸 물어봤어.”
“히힛, 그래? 하긴 궁금하셨겠다. 먹지도 못하는 거니까.”
“응. 대신 얼마든지 편하게 가져가래. 그래서 일단 두 상자 다 들고 와 봤어. 시금치도 두 상자. 그리고 밀가루 한 포대야, 오라버니.”
“잘했어, 미미야. 역시 최고야.”
배시시 웃는 소녀의 옆에서 섭주해도 본인이 들고 온 나무 상자를 내려놓았다.
마희희의 것과 같은 시들시들한 시금치가 상자 안을 채우고 있었다.
“후우, 오랜만에 이런 대청소를 하는 것 같아요, 소호 형.”
“그러고 보니 주해는 객잔에서 청소하는 거 몇 번 봤었지?”
“네. 객잔에 놀러 가면 종종 청소 중이었으니까요.”
“그렇구나. 그럼 주해는 다 알겠네.”
“일단 끓여야 하죠?”
“맞아.”
부처님의 염화미소가 이런 모습일 터였다.
소호가 씩 웃으니, 섭주해도 씩 웃음 짓는다.
“자세한 건 직접 보여 주면서 설명할게. 얘들아.”
소호는 짝! 소리가 나게 박수를 쳐서 시선을 모은 뒤 작업을 시작했다.
“시금치를 데친 물은 벽이나 책상 위를 덮은 기름때를 쉽게 지울 수 있게 해 줘. 잘 봐봐?”
소호는 끈적끈적하게 기름때가 말라붙은 주방 벽면에 시금치 데친 물을 조심스레 국자로 떠서 뿌려 주었다.
미미의 도움으로 안에서 꺼내온 커다란 솥으로 시금치를 데친 물이었다.
막 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소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잠시 후, 다른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천 조각으로 그곳을 비비니 놀랍게도 예전의 광채가 되살아났다.
“우와아―.”
“뭐야. 아까는 저 색이 아니었는데?”
“시금치를 데치라고 한 이유가 있었구나?”
소호는 마희희와 윤지관의 반응을 보면서 뿌듯하게 웃었다.
“히힛, 신기하지?”
“넌 대체 그런 걸 어디서 안 거야?”
“집에서 많이 했었거든.”
소호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싹이 난 감자의 차례였다.
“자, 이걸 봐봐. 여기에 곰팡이가 있지?”
“으, 더러워.”
마희희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쳐다도 보기 힘들어했다.
“감자는 갈거나 잘라서 써야 해. 가는 건…… 미미야!”
소호는 대미미에게 감자를 몇 알 건네주었다.
살짝 싹이 피어나 푸르게 변한 감자였다.
대미미는 받아 들자마자 감자를 양손으로 꽉 쥐어짰다.
빠드드득―.
“으음, 이게 맞아, 오라버니?”
“응. 맞아!”
감자에서 짜내진 물이 바닥에 줄줄 흘러내렸다.
소호는 대미미의 손에서 건네받은 감자 덩어리를 곰팡이가 가장 많이 뭉쳐 있던 곳에 덕지덕지 붙였다.
“자, 이제 반각 정도 기다리면 돼.”
기다리는 동안 밀가루에 물을 섞어 연한 반죽으로 만든 뒤, 좁은 공간에 있는 묵은 때를 벗겨내니 반각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반각 후, 소호가 감자 덩어리를 긁어내자 곰팡이가 상당수 떨어져 나왔다.
거기서 이미 감탄하고 있던 마희희와 윤지관은, 소호가 작게 자른 감자 덩어리로 곰팡이를 흔적도 없이 긁어내는 모습을 보자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오오―!”
“청소왕, 장소호!”
소호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은 뒤에 환하게 웃었다.
“자, 이제 다 같이 작업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