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9화
제19장 균자난청(菌子難淸) (3)
청소라는 게 그리 재밌는 작업이 아닌데도 다행히 모든 아이들이 즐겁게 달려들었다.
소호가 시금치 물이나 싹이 튼 감자의 활용법을 가르쳐 줬기 때문이었다.
쓸고 닦고 치우는 귀찮은 작업에 불과했던 청소가 아이들에게는 놀이처럼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특히 마희희는 감자로 곰팡이를 긁어내는 작업을 좋아했다.
“곰팡이 치우는 건 재밌는데, 버섯은 물컹해서 만지기가 싫어. 이런 건 왜 자라는 거야?”
마희희는 손끝으로 버섯을 툭 건드려 보고는 탱글탱글 흔들리는 모습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야. 윤지관. 이건 네가 뽑아 줘.”
“아니, 먹을 땐 잘만 먹으면서 왜 만지는 건 못해?”
윤지관이 툴툴거리자 마희희의 아미(蛾眉)가 위로 치솟았다.
“그건 젓가락으로 집어먹잖아!”
“그럼 젓가락으로 뽑으면 되겠네?”
“뭐야?”
“아니면, 간식 먹는다고 생각하고 이로 물어서 뽑으면 어떨까? 독버섯은 아닌 것 같아.”
분기탱천한 마희희가 던지는 감자를 윤지관은 낭창낭창한 움직임으로 피해 냈다.
“하핫! 그 정도로는 태극권을 연마한 나를 맞출 수 없다고. 수련이 부족하군, 마희희.”
윤지관은 양팔을 쫙 펼치면서 절세 고수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자세는 우스꽝스럽게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소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마희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 이로 뽑으라고? 네 뻐드렁니로 뽑는 건 어때!”
“……진정해, 마희희. 농담한 거야. 버섯은……. 크억? 자, 잠깐.”
마희희는 감자를 돌칼처럼 손에 쥔 채 마보추장으로 윤지관의 머리를 후려쳤다.
“쿠엑.”
윤지관은 오징어 같은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넘어갔다.
마희희의 손에 들려 있던 감자가 반으로 쫙 쪼개졌다.
“흥. 힘도 없는 게.”
마희희는 그제야 분노를 가라앉혔다.
“너, 여기 주방에 있는 버섯은 다 네가 뽑아!”
“알았어. 알았다고. 감자로 때리지 말아 줘. 생각보다 아프다고.”
윤지관은 톡 튀어나온 이마의 혹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항복의 뜻을 밝혔다.
그러고는 구석에 난 버섯을 하나씩 뜯어냈다.
“저기, 갑자기 생각난 건데, 그거 알아? 균자(菌子:버섯)는 재밌는 글자야. 곳간 균(囷)자랑 비슷한데. 벼(禾)를 구(口)로 감싸고 있는 걸 곳간 균(囷)이라고 하잖아? 둥그런 건물에 초가지붕 같은 걸 얹은 곳간이랑 땅에서 난 버섯이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거기에 풀 초(草)만 얹어서 버섯 균(菌)자가 된 거야.”
뜬금없는 이야기긴 했지만, 꽤나 흥미로운 주제라 아이들은 윤지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그래서 버섯 균(菌)자랑 곳간 균(囷)이랑 비슷했구나?”
“맞아. 일반적으로 땅에서 나는 버섯을 통틀어서 균자라고 하고, 송균(松菌)이나 목균(木菌)이라고도 해.”
윤지관은 “에헴!” 하고 마을의 고명한 서생처럼 뒷짐을 지고 헛기침을 했다.
“그뿐이 아냐. 지(芝)자도 버섯을 뜻해. 영지(靈芝)버섯처럼 곳간을 닮지 않은 버섯에 지자가 붙어. 목이(木耳)버섯 같은 ‘이’도 많이 쓰는데, 중원에선 잘 안 쓰지만……. 녹용(鹿茸)에 쓰이는 용자를 ‘이’라고 발음해서 송이(松茸), 석이(石茸) 같은 식으로 쓰는 거야. 귀 이(耳)랑 구별하려고 그렇게 쓴다더라.”
“오오. 지관이 너 버섯에 대해 잘 아는구나?”
소호가 감탄하며 박수를 치자, 곰팡이를 닦아 내던 마희희가 톡 쏘아붙였다.
“세상 쓰잘데기 없는 걸 어디서 하나 외워 놓고 잘난 척하기는.”
“크흠! 이게 왜 쓸모가 없어? 너 나중에 서찰 쓰다가 이게 균을 써야 하는지 지를 써야 하는지 헷갈리면…… 안 가르쳐 준다!”
“그러시든지.”
마희희와 윤지관은 끊임없이 티격태격했다.
사이가 나쁜 건 아닌 것 같은데 서로 가까이 두면 싸움부터 하니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진짜로 많이 있네.”
마침 바닥에 떨어진 그릇 파편들을 치우던 소호는 구석의 그늘진 곳에 길쭉한 버섯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특별히 흙이 있거나, 먹을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신기한 일이었다.
버섯은 대체 뭘 먹고 자라는 것일까?
“균자는 습하기만 하면 어디서든 자라난다고 했지……”
소호는 나중에 어디선가 또 균자가 자라겠다고 생각하면서 청소를 계속했다.
***
하남.
무림 강호의 영원한 태산북두인 숭산 소림사가 있는 곳이며, 큰일이 있을 때 백도의 무림맹(武林盟)이 열리는 지역이 바로 하남이었다.
현재 등봉현(登封縣)의 숭산(嵩山) 인근에는 무림맹이 열리는 시기가 아닌데도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강호의 소문은 빨랐다.
무림의 현 세태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하남으로 속속 모여들어 광장에서 떠들썩하게 토론을 행한다는 소문이 강호 무림 전체에 퍼져 나갔다.
토론에 참여하는 것에는 아무런 자격도 필요 없다고 했다.
소속된 문파가 어디든, 무공의 수준이 얼마나 높든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했다.
강호 무림을 떠도는 협객이라면 누구든 토론장에서 한마디를 할 수 있다니.
명성을 떨치고 싶은 협객이나, 재밌는 일이라면 천릿길도 가는 호사가들이 이런 일을 마다할 리가 없을 터.
소문이 소문을 부르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몰려들었다.
등봉현 인근의 객잔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사람이 너무 많아 지낼 곳을 구하지 못한 무림인들을 위해, 숭산 인근의 민가에선 주인이 밖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손님을 집 안으로 들이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더군다나 자존심이 강한 무림인들이 몇 천 명이나 모여 있는데 조용할 수 있겠는가.
조그마한 시비 하나가 큰 싸움으로 번지고, 그러다 보면 위명이 쟁쟁한 무인들이 서로 무공을 겨루기도 했다.
하남 등봉현.
마치 무림맹이 다시 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 성(城)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자네, 그 이야기 들었나? 오늘 소림에서 직접 답을 주겠다는군. 무림맹이 열렸을 때처럼 회합을 열어 대대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모양이야.”
“좋군. 좋아. 이 기회에 소림의 명성 높으신 분들을 다시 한 번 보겠어.”
“사실 당연한 일이지. 강호인들이 이렇게나 모여서 떠들썩한데. 거리마다 꽉 찬 무림인들 좀 보게나. 대충 세어 봐도 수천은 될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도 묵묵부답(黙黙不答)으로 침묵을 지키다니. 강호 무림을 이끄는 태산북두 소림이 해선 안 될 행동이야.”
“그렇긴 한데……. 크흠, 이리 가까이 와 보게나. 사실, 여기서만 하는 말이지만 좀…… 명분이 약하지 않나?”
“그, 청성파랑 기갑문 말이지?”
“맞아. 이야기를 들어 보니 청성의 장로랑 기갑문의 문주……. 그 밖에도 태산박이니 뭐니 사파들도 많이 엮여 있던데. 단순히 습격당했다고 불만을 말하기엔 좀 불온한 모임이지 않은가?”
“그렇지. 게다가……. 습격자는 한 명이었다는 말이 있어.”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 그 많은 인물들을 다 죽인 게 한 사람이라고?”
“죽였는지 단순히 쓰러뜨렸는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소문엔 단 한 명한테 다 당했다는군. 청성파 때문에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긴 하네만. 사실 여기 모인 자들 중의 많은 이들은 그 ‘한 명’이 누군지가 더 궁금해서 모인 사람들일세.”
“그렇구만. 청성의 장로에 기갑문의 문주, 거기에 광살부마를 한 명이……. 이거, 대단하군. 대단해. 그 정도면 무림 십대고수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실 십대고수로도 부족하지. 별호에 존(尊) 정도는 들어가야 가능한 일이야.”
“궁금하구만. 진정 궁금하네.”
“그리고 이것도 소문인데…….”
“자네는 참 아는 게 많군. 이 이상 또 숨겨진 게 있단 말인가?”
“크흠, 내가 소문에 좀 빠르긴 하지. 이번 일…… 소림도 엮여 있는 모양이야. 불요신승의 이름이 종종 나오던데. 청성은 그걸로 소림을 압박하고 있다는군.”
“불요신승이라니. 세상에, 전대의 그……?”
“그래. 전대 고수이자 이미 생불(生佛)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그분일세. 이것 참. 일이 재밌게 돌아가지 않는가?”
“재밌군. 재밌어. 다 밝혀지면 무림의 일대 사건이 되겠구만 그래.”
“그렇다네.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호사가들은 다들 집중하고 있어. 그래서 오늘이 중요하다네. 소림이 어떤 답을 내놓을지 궁금한 거야.”
“기대되는군. 어서 가 보세나. 늦으면 자리를 놓칠 수도 있어.”
***
숭산 소림.
지객당주의 직책을 맡고 있는 계원은 자그마한 향로를 앞에 둔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손에 든 백팔개의 염주 알을 끊임없이 굴렸다.
어느새 이립을 훌쩍 넘어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
불세출의 기재 소리를 들으며 소림 삼십육방을 최연소의 나이로 통과하고 나한전에 입성했던 게 바로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세월은 흘러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그는 소림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지객당주가 되었다.
“아미타불, 인연은 인연이구려.”
계원은 죽간(竹簡)에 쓰인 이름들을 다시 한 번 눈으로 찬찬히 읽은 뒤, 가장 위에 적힌 이름을 입으로 되뇌어 보았다.
“무쌍, 장기린.”
시대의 영웅.
한 시대를 풍미하고, 나라를 구한 자.
십삼 년 전, 북천맹의 난(亂) 때 지다화라 불리던 모용소희와 무림행을 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금 돌이켜 보면 성품이 여물지 못해 여러 가지 실수도 많이 했던 그였다.
허나 그때의 경험이 계원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소림 무승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팔대호원(八大護院)에 들어가 소림 방장을 호위하는 일을 포기한 것은 무쌍귀라 불리던 장기린의 역할이 컸다.
그때 함께 싸우면서 느꼈던 충격이 너무 커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 년간이나 기약 없는 무림행을 했던 것이다.
헌데 그때 생긴 인맥을 잘 살려 보라면서 지객당주라는 높은 자리를 받았으니……. 세상일은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시주만 한 인물이 화전촌에서 촌장을 하고 계셨다니. 아직 만나 보지도 못했건만, 이름만으로도 충격을 주시는구려. 거기에 각요 선사까지 모시고 함께 지냈다니.”
장기린이 촌장 일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오는 건 계원이 특이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헌데 정작 엮여 버린 소림은 웃음으로 넘어갈 수가 없으니……. 참으로 어렵소. 어려워. 세태가 얽히고설킨 이때. 하필 이런 일이 생기다니……”
계원의 손에서 염주 알이 굴러가는 소리가 점점 더 빨라졌다.
고민을 깨듯 문밖에서 조심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주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정각(正覺)아. 군웅들은 많이 모였느냐?”
“광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당주님.”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굴러가던 염주 알이 움직임을 멈췄다.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지만, 어찌되었거나 내친걸음이었다.
방장의 지시는 명확했다.
사실 계원이 고민할 일도, 그럴 만한 자격도 없는 일이었으나, 어째선지 아침에 해가 뜰 때부터 마음이 가만히 놓이질 않았다.
“그리고 서찰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당주님. 오늘 회합에 시간이 맞으면 잠시 참석하겠다는 분이 계신데…….”
“누가 말이더냐?”
정각은 앳된 목소리로 답했다.
“사례감태감 왕진이라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