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10화
제19장 균자난청(菌子難淸) (4)
“왕진……?”
불온한 이름, 불길한 예감이 하나로 합쳐졌다.
“아미타불.”
계원은 나지막하게 불호를 내뱉었다.
부처를 유혹했다던 마귀의 이름을 들은 듯했다.
단지 이름을 하나 들었을 뿐인데 온갖 번뇌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구파일방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던 청성과 구파일방에 들지 못하던 세력들이 무쌍귀를 핑계 삼아 불만을 터뜨린 지금…… 소림이 대화를 하려 하자 거기에 왕진이 참여한다?’
정리하면 할수록 불길한 느낌은 강해져만 갔다.
겨우 이런 일에 사례감태감이 어째서 오는가?
만약 참석한다면 또 어떤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군웅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하려 할까.
아니, 그 이전에 황실의 인물이 이런 일에 나서서 얻을 것이 있던가?
‘무쌍귀를 노린다고 생각하기엔 상황이 묘하게 꼬여 있다. 군웅들은 강호의 일에 황실이 끼어드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을 터.’
계원은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한 채 합장을 하며 일어서야만 했다.
“비법, 비비법(非法, 非非法).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은 법이 아니며 법이 아님도 아닐지니. 나머지는…… 방장께서 결정하실 일.”
계원이 금강경의 일문을 중얼거리자, 밖에서 기다리던 정각이 당황하며 무슨 말씀을 하셨냐고 되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가 보자, 정각아.”
“예. 뒤따르겠습니다.”
계원은 묵묵히 자리를 털고 밖으로 나섰다.
상황은 이미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 화살이 어느 곳에 맞을지는 그야말로 여래만이 알고 있으리라.
***
숭산(嵩山) 소실봉(少室峯)으로 들어가는 산문 근처에 수백 명이 넘는 무림인들이 각자의 꿈과 기대를 안고 모여 있었다.
그만한 인원이 모여 있으니 시끌벅적할 법도 하건만, 기이하게도 장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상석에 앉아 있는 무림 명숙들이 드문드문 살기까지 내뿜으며 잔뜩 날이 서 있었던 탓이다.
특히 가장 사나운 것은 청성파의 일대제자 중 청광이었다.
그는 항상 심각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청성파에 거슬리는 발언을 하는 무림인이 있으면 곧바로 검을 뽑을 기세로 노려보곤 했다.
상상 이상으로 성격이 사납다면서 군웅들이 수군거리는 것도 당연한 일.
한데 이상하게도 평소엔 냉철하던 청성의 장문인 적하 진인은 그런 청광을 말리지 않았다. 대사형인 청벽도 그저 인상만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림 방장께서 오십니다.”
미리 자리하고 있던 계원의 선언과 함께 산문 너머에서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느릿한 걸음으로 장내에 나타났다.
각로 대사가 나타나자 장내의 모든 이들이 조용히 입을 다물며 침묵을 지켰다.
일부 군웅들은 작게 합장을 하기까지 했다.
불법무한이라고 했던가.
소림사의 방장은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에 안정을 심어 주었다.
“아미타불, 열반에 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납(老衲)을 보러 이렇게나 많은 분들이 찾아오시다니. 고맙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구려. 흘흘, 노납은 각로라고 하오.”
허리를 굽혀 가며 정중하게 양손으로 합장하는 소림 방장을 향해 군웅들 중 절반 가까이 되는 이들이 마주 합장을 하였다.
각로대사는 눈썹과 수염이 모두 백색으로 물든 노승이었다. 깡마른 체구에 딱히 겉모습만으로는 보잘것없는 모습이었으나, 그가 침중하게 미간을 좁히자 마치 후광이 비추듯 기이한 존재감이 장내를 은은하게 뒤덮었다.
청성의 장문인인 적하진인과 제자인 청벽과 청광이 일어서서 예를 표했다.
모두가 기묘한 장갑을 끼고 있는 기갑문과 짐승 가죽을 옷처럼 몸에 두른 태산박은 그저 자리에서 일어섰을 뿐 아무런 예도 표하지 않았다.
“적하 진인. 이 노납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소. 나는 소림 방장께 꼭 묻고 싶은 게 있소이다.”
청성파의 장문인, 적하진인의 목소리는 쇠를 두드리는 것처럼 카랑카랑했다. 과히 듣기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그가 하는 말만큼은 선명하게 귀에 쏙쏙 들어왔다.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나, 청성의 장문인인 적하는 소림 방장께 한 마을의 장소를 묻고 싶소.”
“마을이라 하면?”
“무쌍귀 장기린이 몸을 숨기고 살던 그 마을을 말함이외다.”
무쌍귀 장기린.
그 이름이 나오자 무림 군웅들의 안색이 급변했다.
십여 년 전의 이야기라 꽤나 오래된 일이지만, 강호인들 중에 그 이름을 잊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쌍귀……!”
“북천맹의 난 때 활약했던 절세 고수가 아닌가.”
“쉿, 그걸 대놓고 말하면 황실에 잡혀 간다고.”
나이가 있는 무인들일수록 반색했다.
무쌍귀 장기린의 이름은 십여 년 전의 강호를 아는 자들에게는 신화와도 같았다.
“적하진인께선 어찌하여 그걸 물으시나?”
“간단하오. 사제의 원수! 청성의 검이 부러졌으니, 그 검을 부러뜨린 자를 우리가 벨 것이오!”
“사제의 원수라……”
“그자를 베지 않고 어찌 내가 구천을 떠도는 사제의 원혼을 달랠 수가 있겠소! 원수를 멀쩡히 놔둬서야 어찌 강호에서 청성의 장문인이라 가슴 펴고 말할 수 있겠냔 말이오.”
핏발 선 눈으로 각로대사를 노려보는 적하진인의 목소리엔 원한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적하진인의 외모는 상당히 초췌했다.
쓰고 있는 도관 옆으로 잘 빗어 내린 머리카락은 빗자루처럼 푸석푸석했고, 입술은 건조하게 갈라졌다.
“아미타불.”
각로대사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불호를 내뱉었다.
“적하진인, 사제의 일은 안타까운 일이오. 하지만 원수가 누구인지는 확실한 것이오?”
“확실하오! 무쌍귀 장기린이오!”
군웅들의 웅성거림이 커지기 전에, 옆에 있던 계원이 앞으로 나섰다.
계원은 눈빛으로 각로대사에게 허가를 구한 뒤 질문을 던졌다.
“지객당주 계원입니다. 아미타불,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적하진인.”
“말하시게.”
“외람되지만 그리 확신을 하실 만한 증좌가 있습니까?”
“있소.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증인은 아주 많소. 얼마 전 낙양 외곽의 폐장원이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무너지고 큰 싸움이 나는 소동이 있었지. 그 일은 그날 폐장원을 찾은 흑마를 탄 한 사내로 인해 벌어졌는데…… 그걸 본 낙양의 주민들이 수십 명은 될 것이오.”
“아미타불.”
계원은 고개를 저었다.
“싸움은 났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 여기 모인 군웅들 사이에도 다툼은 많이 일어났을 터. 허나 생사에 관한 문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적하진인의 사제를 죽인 자가 무쌍귀라 불리는 장기린이 확실한지요?”
“……”
“혹시 그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적하진인?”
적하진인은 버럭 소리쳤다.
“흉수는 장기린이 명백하다! 폐장원에서 사제와 뭇 무림인들을 쓰러뜨린 자가 무쌍귀가 분명하거늘,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적하진인이 내 말이 틀렸냐며 뒤를 돌아보니, 기갑문의 사람들과 태산박의 사내들도 옳은 말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진인. 살해에 대한 증좌도 없이 상대를 핍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그날, 적하진인의 사제와 기갑문, 태산박의 사람들이 모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째서 무쌍귀가 폐장원을 공격한 것입니까.”
“……”
“이유는 모르십니까?”
“제자를 살해한 흉기가 어떤 것입니까. 무쌍귀는 창만을 사용하는 걸로 아는데. 혹시 흉기도 창입니까?”
계원은 시종일관 정중하고 무심한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그 내용은 점차 적하진인의 목을 죄어 가고 있었다.
적하진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평소였다면 냉철하게 대처했겠으나, 사제를 잃고 분노와 절망에 사로잡힌 적하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버럭 소리쳤다.
“보자보자 하니, 소림의 처사가 참으로 비겁하다! 누가 봐도 무쌍귀가 흉수거늘, 어찌 이리 트집을 잡는가. 이는 무쌍귀가 살았던 촌락에 불요신승도 함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적하진인의 일갈에 장내의 분위기가 변했다.
지객당주 계원을 비롯한 장내의 소림승들이 차갑게 표정을 굳혔다.
군웅들도 입을 꾹 다물고 침음성을 삼켰다.
장내의 긴장감이 극으로 달하고 있었다.
“소림이 비겁하다……? 말씀이 심하십니다, 적하 진인.”
“심하다? 심한 것은 누구인가! 끝까지 무쌍귀를 감춰 주겠답시고 이리 일을 키우는 소림이 방자하고 심한 처사가 아닌가!”
“장문인! 억지를 부리십니다!”
결국 계원조차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딜!”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적하진인의 앞으로 나서는 자가 있었다.
푸른색 도복을 입고 건장한 체격으로 주변을 위압하는 자.
적하진인의 둘째 제자, 청광이었다.
“억지는 당신이 부리고 있다! 대청성의 장문인에게 방장님도 아니고 고작 지객당주가 고함을 지르면서 가르치려 드는가! 소림은 청성이 그리 우습던가! 소림의 지객 당주쯤 되면 우리 청성의 장문인보다 높다 여기는가!”
청광은 언변이 교묘한 구석이 있어서 어떻게 대답을 하든 약점을 파고들 것만 같았다.
계원이 일시 말문이 막히는 순간, 각로대사가 다시 나섰다.
“아미타불, 진정하시게. 소림이 그리 오만한 문파가 아니라는 사실을 청성은 물론이고 이곳에 계신 많은 군웅들께서 모두 아시리라 믿네.”
군웅들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자들은 장내의 인원들뿐이었다.
“장문인. 미안하지만 요청한 사안은 답해 주기 어려울 것 같군.”
“도대체……!”
적하진인을 비롯한 청성파의 모두가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였다.
뭉쳐 있던 군웅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양쪽으로 갈라졌다.
검은색 비단 무복에 가슴에 새겨진 황실의 문양, 날카로운 기세의 금의위들이 한 사람을 호위하고 있었다.
사인(四人) 가마 위에 앉은 그는 검은색 섭선으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가마를 매고 있던 시종 하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사례감 왕진 태감께서 납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