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11화
제19장 균자난청(菌子難淸) (5)
사례감의 태감이란 말을 들은 군웅들은 화들짝 놀라며 가마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 애썼다.
사례감이라 하면 악명이 자자한 동창을 휘하에 둔 황실의 ‘높은 분’이었다.
군웅들은 금의위가 호위로 나와 있는 이유를 그제야 납득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네요, 소림 방장. 잘 계셨지요?”
왕진은 가마꾼들의 도움을 받아 가마에서 내려온 뒤, 섭선으로 부채질을 하며 각로 대사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손발이 길고 몸놀림이 나긋나긋하니 마치 경극 무대에 올라온 배우 같았다.
왕진은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몸동작, 얼굴 표정, 들이쉬고 내뱉는 숨소리마저도 군웅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왕 시주…….”
“호호, 원래는 조용히 지켜만 보려고 했는데 말이죠.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겠더군요. 그래서 제가 직접 부득불 나섰답니다.”
촤르륵―.
왕진이 몇 개 없는 손가락으로 섭선을 쓸자, 마치 모래알이 흐르는 듯 청량한 소리가 났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
살짝 분칠한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떠오르니 성숙한 기생 같은 염기가 서렸다.
“청성의 장문인. 적하 진인이라고 했던가요?”
“왕 공공.”
적하 진인은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짧게나마 포권을 취하며 예를 표했다.
“멀리서 들어 보니 그대의 말은 틀렸더군요. 당신의 사제는 무쌍귀가 죽이지 않았어요.”
“……!”
적하 진인을 비롯한 장내의 모두가 너무나 당혹스러워 일시 말을 잃고 눈만 끔뻑거렸다.
“왕 공공, 이해가 가질 않소. 어째서 무쌍귀가 무고하단 말이오?”
“어째서냐니.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에요. 낙양의 폐장원 사건 때. 그대의 사제가 무쌍귀에게 패퇴하긴 하였으나 죽지는 않았어요. 죽기는커녕 사지 멀쩡하게 걸어 나갔죠.”
적하 진인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왕진을 바라봤다.
“왕 공공께선 그걸 어떻게 아시오?”
“낙양 폐장원에 그들을 모아 놓은 게 저니까요.”
“……!”
점입가경이었다.
너무나 큰 충격에 적하 진인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대제자인 청벽이 그의 사부를 황급히 부축했다.
“대체 무슨……. 당신이 왜……? 설마 황실이……?”
적하 진인은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왕진의 말은 쉬이 믿기 힘들 만큼 충격적이었으나, 본인이 당당히 그리 말하니 이건 믿지 않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알아듣게 설명을 해 주시오, 왕 공공. 왕 공공께서 사제……그리고 그 외의 무인들을 다 모았단 말이오? 당신께서 직접?”
“맞아요.”
왕진은 산뜻하게 대답했다.
그가 빙글 몸을 돌리자, 치렁치렁한 관복이 펄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왕진은 군웅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북천의 난이 끝나고 온 천하가 혼란하던 시절. 무쌍귀는 부귀영화를 뒤로 한 채 조용한 마을에 은거하려고 하였지요. 천하 영웅이란 그런 걸까요. 자신의 천명을 다하고 나니 쉬고 싶었던 모양이지요? 그런데 무쌍귀는 자신이 떠나면서 무림 강호에서 유명한 자들을 몇 명 데리고 갔답니다.”
왕진이 이야기의 흐름에 맞춰 탁― 하고 섭선을 두드리는 모습은 마치 시장통의 이야기꾼처럼 능수능란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은거하려는 무쌍귀의 곁에는 범상치 않은 자들이 함께했답니다. 검선이라 불린 자, 장강의 용왕이라 불린 자도 있으며, 살수들의 신, 야장(冶匠)들의 전설, 강호에서 사라져 버린 신의(神醫)와…… 그리고 불법(佛法)을 떠난 승려도 있었지요.”
왕진의 목소리는 넓은 공간에 낭랑하게 퍼져 나갔다.
군웅들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내용을 듣기 위해 숨죽이고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인물들이었어요. 허나 원래 밝음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빛나는 명성 뒤엔,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어두운 자들도 많았지요. 그래서 저는 그들을 모아 봤답니다. 무쌍귀의 마을에 원한이 있는 자는 모두 모여 힘을 모아 보자고. 그랬더니…… 어찌 되었을까요?”
왕진은 뒷짐을 진 채 몇 걸음을 옮기다가 짝! 하고 박수를 쳤다.
“놀랍게도 생각보다 많은 인원들이 모였어요. 저는 그들에게 대천문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하늘의 천벌을 대신하는 문파! 서로의 원한을 대신 갚아 주는 문파! 대천문!”
촤르륵―.
섭선을 다시 펼친 왕진이 살랑살랑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그 대천문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바로…… 여기 이분들의 지인(知人)들이랍니다. 애꿎은 소림사를 괴롭히면서 희생자라고 말하고 있지요?”
왕진은 싱긋 웃는 얼굴로 신랄한 말을 내뱉었다.
그는 웃는 낯 그대로 청성파, 기갑문, 태산박을 차례대로 응시했다.
그러던 중에 왼쪽 어깨와 오른쪽 허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사내, 태산박의 젊은 두목, 정호를 특히 지그시 응시했다.
“저런, 아팠겠네요. 이곳까지 오는 길이 험했나요?”
“……운이 나빠. 잠시 넘어졌을 뿐이오.”
정호가 휙― 하니 손을 내저으며 절도 있게 부정했다.
“호홋!”
왕진은 의외로 호탕하게 웃었다.
“그랬군요. 좋아요. 이야기를 계속하죠. 아! 혹시 내 말에 이의가 있는 사람이 있나요?”
청성, 기갑, 태산.
다들 어딜 가도 큰소릴 치는 문파들이었지만, 그들 모두 침묵을 지켰다.
왕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니까, 결국 그날 모인 자들은 무쌍귀와 그가 은거한 마을을 부수기 위한 작당 모의를 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무고한 희생자라기엔 좀 그렇죠? 그러니까 벌을 받았어요. 무쌍귀에게, 한 방에 통쾌하게!”
왕진은 해맑게 웃음을 터뜨리며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재밌었어요. 진실로 재밌는 경험이었답니다. 무쌍귀의 강함도 다시 확인하고, 무림인들이 얼마나 은원 관계가 얽히면 앞뒤를 안 가리는지도 알게 되었구요. 후훗. 정말 재밌었지요.”
왕진은 아끼는 장난감을 자랑하듯,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웃음을 터뜨리는 왕진의 앞에서, 결국 지금껏 온갖 감정들을 꾹 눌러 참던 적하 진인이 폭발하고 말았다.
“재미? 재미라고……?”
적하 진인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부들부들 덜었다.
노쇠한 얼굴.
허옇게 새어 버린 머리카락과 수염 사이로, 분기탱천한 눈빛이 왕진을 쏘아봤다.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사제는 단순해서 간단한 말에도 쉽게 홀리는 성정이거늘. 그런 자를 데려다가…… 대체 왜!”
버럭 소리치는 적하 진인의 목소리엔 절절한 한이 배어 나왔다.
왕진은 혀를 찼다.
너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좋게 봐도 장문인의 그릇은 아니었다.
“도를 닦는다는 양반이 이렇게나 쉽게 흥분해서야……. 언성이 너무 높아요, 적하 진인.”
“끄응.”
왕진은 탁― 소리가 나게 섭선을 접은 뒤, 섭선으로 적하 진인을 가리켰다.
“왜 그랬냐니……. 그런 게 필요한가요?”
“뭐요……?”
“강호의 일개 무림인 주제에 황실 사례감 태감이 하는 일에 어딜 감히 토를 다느냐는 말이에요.”
“……!”
왕진은 길가의 더러운 개를 바라보듯 차가운 눈빛으로 적하 진인을 응시했다.
“주변에서 장문인이라 치켜세워 준다 해도, 당신은 한 명의 무인에 불과합니다. 황실에서 죽으라면 죽어야지요. 제 주제를 알도록 하세요.”
적하 진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모욕이었다.
진실로 강호 무림의 무림인들을 눈 아래로 보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하찮군요. 하나같이 수준 미달이에요. 내친김에 하나 더 말해 주지요. 대천문에 소속된 무인들은 무쌍귀에게 죽지 않았습니다. 내가 죽였어요.”
“……!”
충격을 넘어서 공황에 빠진 적하 진인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군웅들의 머리 위로 누군가 얼음물을 끼얹은 것만 같았다.
군웅들 중 눈치가 빠른 자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곧바로 몸을 돌려 도망치기까지 했다.
“왕 공공…….”
적하 진인의 목소리는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진실로 당신이 죽인 것이오? 내 사제를…… 당신이 죽인 것이오?”
“그래요.”
왕진은 담담하게 답했다.
“당신의 사제, 기갑문의 젊었던 문주, 태산박의 녹림마왕. 전부 내 명을 받은 살수들이 죽였어요.”
사람이 화가 극에 이르면 도리어 화가 나지 않고 차분해지는 법이다.
적하 진인은 극도의 화로 손발이 뻣뻣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을 반복했다.
왕진은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서, 어쩔 건가요?”
왕진의 말의 의미를 모두가 알아들었다.
내가 너의 사제를 죽였다.
그래도 어쩔 것이냐?
왕진이 웃으면서 묻자, 적하 진인은 결국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다리의 힘이 풀렸다.
무공의 고하와는 상관없는 심적인 충격이었다.
대사제 청벽이 다시 사부를 부축했다.
“사부님!”
“큭…….”
그때 앞으로 나서는 자, 청성의 둘째 제자 청광이었다.
그는 곧바로 칼에 손을 얹었다.
당장이라도 청성일절 청운적하검이 튀어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멈춰라!”
그런 청광의 앞을 단상 아래에서 뛰어오른 금의위들이 가로막았다.
안정된 자세, 강인한 눈빛.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다.
청광은 이를 악물었다.
금의위의 가슴에 새겨진 황실의 문장이 그렇게나 거슬릴 수가 없었다.
‘저것만 없는 놈들이었다면……!’
청광은 이를 갈았다.
그랬다면 사파의 마두 취급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검을 휘둘렀을 텐데.
“안 된다, 사제!”
그사이, 적하 진인을 근처의 의자에 앉힌 대제자 청벽이 청광의 앞을 가로막았다.
청광은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왕진을 노려보다가 다시 청벽을 노려본 뒤, 휙― 하니 몸을 돌렸다.
“호호호.”
왕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과 똑같았으나, 이번에 군웅들은 섬뜩함을 느꼈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나, 바쁜 몸인지라 시간이 없군요. 나는 이번 ‘대회의’에서 주제를 모르고 방자한 무림인들을 상대할 방도를 논해 볼 겁니다. 불만이 있는 자가 있다면……. 거기서 뵙도록 하죠.”
왕진은 가마꾼들에게 손짓을 해 그 위로 올라타면서 깜빡했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아! 소림 방장. 역근경과 뛰어난 무공들을 제공해 줘서 고마워요. 무산학관에서 차세대 무관들을 길러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무당에서 내준 태극권도 그렇고……. 참으로 감사한 일이네요. 역시 몇몇 문파는 일반 무림인들과 달라요. 명황실의 홍복입니다.”
청성, 기갑문, 태산박.
대천문과 연관된 문파들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군웅들의 시선이 소림 방장과 그의 곁에 있는 소림승들에게로 몰렸다.
사나운 기색.
군웅들의 시선이 무거웠다.
“아미타불…….”
각로 대사는 그저 시선을 밑으로 향한 채 염주만을 굴렸다.
계원을 비롯한 소림승들은 일시 당황하여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호호호, 그럼 이만.”
왕진이 낭랑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떠나갔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그를 붙잡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