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12화
제19장 균자난청(菌子難淸) (6)
하늘은 푸르고, 햇살은 화창했다.
산들거리는 바람과 함께 지붕이 낮은 민가들이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왕진은 숙련된 가마꾼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기분이 좋을 때 가마가 위아래로 거칠게 흔들렸다면 풍류가 깨지지 않겠는가.
“너희가 가마를 잘 메니 내 마음이 이렇게나 편안하구나. 남경에 도착하면 너희 모두에게 상을 내리겠어요.”
가마꾼들은 나지막하게 “예.”라고만 대답하고는 묵묵히 가마를 움직였다. 마치 상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이 나라가 돌아가는 것이겠지요.”
왕진은 더욱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흘러가는 산들바람과 함께 콧노래도 흘러나왔다.
“공공…….”
왕진은 이렇게 즐거운 날, 우려가 가득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뽀얀 얼굴에 흑백이 뚜렷한 눈동자를 지닌 소년이었다. 나이는 십 대 초반, 장래가 기대될 만큼 예쁘장한 얼굴을 지녔다.
“선, 아까의 일을 걱정하나요?”
“……네.”
“내가 과했던 게 아닌가 생각하는구나?”
왕진은 선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필요한 일이었단다. 이제야 나의 계획이 중반에 접어들었어. 모든 게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으니 나는 기분이 아주 좋구나.”
“하지만…….”
선은 머뭇거리며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왕 공공이 위험하잖아요…….”
“후훗, 그럴지도 모르지. 자존심 강한 놈들의 벌집을 건드렸으니까. 허나 목숨에 연연해서야 큰일을 이뤄 낼 수 있겠니?”
“목숨을 잃으면 산해진미 비단 금침이 다 무슨 소용인가요?”
선은 평소와 달리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왕진은 그 또한 기꺼운 마음이 들어 크게 웃었다.
“후훗, 내가 죽는 게 싫더냐?”
“…….”
“선아. 너를 위해 알려 줄게. 그리고 이건 비밀이니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자, 왕진은 손가락을 뻗어 아무것도 없는 곳, 어두컴컴한 골목길 한편을 가리켰다.
“저곳에 날 지켜 주는 사람이 있단다.”
“네에?”
선이 가마 밖으로 떨어질까 걱정될 만큼 몸을 아슬아슬한 곳까지 내밀어 골목길을 응시했으나, 소년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도 없어요, 공공.”
“후훗, 아직 어려서 안 보이는 것뿐이란다. 아니, 어쩌면 나쁜 사람 눈에만 보이는 건지도 모르지.”
“근거가 전혀 없는 허황된 이야기네요.”
“이런이런, 선의 단점을 찾았네요. 꿈도 희망도 없는 성격은 큰 단점이야.”
왕진이 혀를 차자 선의 양 볼이 부루퉁해졌다.
“걱정 마렴. 나도 모사(謀士). 이래 봬도 많은 걸 준비해 놨으니 쉽게 당하지 않는답니다.”
그 말을 하는 왕진은 누가 봐도 자신감이 넘쳐 보여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제발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소림에 부담을 떠넘긴 보람이 없잖아요?”
“후훗, 역시 선은 영리하구나. 중요한 건 다 보았어.”
왕진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조금 전 있었던 일들을 복기해 보았다.
모든 게 생각대로 흘러갔다.
다만…….
“청성파, 둘째 제자였던가?”
당돌하게도 왕진을 향해 검을 빼려던 사내.
청성파의 둘째 제자, 청광이라는 이름을 지닌 젊은 도사였다.
“그가 어떻게 움직이냐가 관건이겠네.”
가마에 앉은 왕진의 시선이 저 멀리 북쪽을 향했다.
북경에 있을 어린 황제.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고지식한 늙은이들.
“어디 한번 지켜볼까요, 무림인들?”
왕진의 얼굴에선 냉혹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등봉현의 한적한 객잔 안, 침상에 쓰러지듯 누워 있는 적하 진인 앞에 푸른 도복을 입은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청성의 사형제들은 모두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장문인의 앞이라 말을 자제하고 있긴 하나, 다들 거칠게 한 소리 내뱉고 싶은 심정을 꾹 눌러서 참고 있었다.
“일단은…… 기다리자.”
그 말을 내뱉기까지, 청벽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인가.
하지만 대사형의 말은 다른 청성 제자들에게 위로를 주지 못했다.
“어째서입니까?”
“청광.”
“흉수는 밝혀졌습니다. 누군지도 알고 있죠. 참으로 당당하게, 우릴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코앞에서 당당하게 제 입으로 밝히지 않았습니까?”
“안 된다, 청광.”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까 장문인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사제의 혼백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고, 그 복수를 행하지 않으면 편히 쉴 수 없다고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청성파의 일대제자 중 둘째.
청광은 늘 그랬듯 성격이 과격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유약한 정론보단 과격한 선동에 끌리는 법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많은 사제들이 청벽보다는 청광에게 마음이 향하고 있었다.
“사제, 황실이다. 상대는 황실이라고.”
“그러면 어떻습니까? 칼에 베이면 피가 나고 쓰러지는 건 왕후장상이나 길거리 거지나 다르지 않습니다.”
“사제!”
청벽이 노기를 드러냈다.
황실을 논하고, 칼에 베이는 것을 이야기 한다.
자칫 누가 듣기라도 하면 역모에 엮일지도 모르는 대죄였다.
“말을 조심하라 누누이 이야기했건만!”
“대체 이 이상 뭘 더 조심하란 말입니까!”
청광은 옆으로 손을 휘둘렀다.
청벽과 청광의 관계에 선이 그어지는 듯했다.
“사숙을 죽였다고 당당히 말하는 이상한 놈 하나를 혼내 주지도 못하고, 황실과 짝짜꿍이 맞아서 담합하고 있는 소림에도 시원하게 한마디 못하고. 이게 어찌 사람 사는 겁니까? 우리가 그러고도 무림 강호의 협객이냔 말입니다!”
“청광……!”
“대체 이 이상 어떻게 더 조심한단 말입니까. 사문 전체가 이렇게나 겁쟁이고, 비루한데!”
대사형 청벽의 두 눈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말을 가려하라. 네 발언은 너만의 것이 아니라 청성이 책임져야 할 수도 있다고 늘 말하지 않았느냐!”
“그렇게는 못합니다. 속이 터져서 못하겠어요!”
“이놈……!”
“청성이란 이름이 이렇게나 부끄러웠던 적은 처음입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차라리……!”
청광은 감정이 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말은 내뱉지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이는 청광.
꽉 움켜쥔 양 주먹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나가거라.”
“장문인!”
그때, 침상에 죽은 듯이 누워있던 적하 진인이 상체를 일으켰다.
침상 앞에 모여 있던 청성의 무인들이 당황하며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적하 진인은 자신을 도우려는 청벽의 손길을 뿌리친 채 꼿꼿한 자세로 앉았다.
“청광의 심정이 내 심정과 같고…….”
적하 진인은 불과 하루 만에 십 년은 더 늙은 듯이 보였다.
“청벽의 태도가 장문인으로서 내가 취해야 할 태도구나.”
눈가의 주름이 깊어진 채 거칠게 숨을 내쉬는 그는 마치 상처 입은 늙은 맹수 같았다.
그래도 마음의 정리는 좀 된 것일까?
적하 진인의 목소리만큼은 차분했다.
청벽과 청광은 아직 서로의 감정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서로를 흘깃 쳐다봤다.
“장문인. 나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상대는 사례감 태감인 왕진. 그는 지금 황제의 스승 같은 존재지. 그를 치기 위해서는…… 역적이 될 각오가 필요할 터. 청성은 멸문지화를 겪게 될 것이야.”
적하 진인은 청광에게 손짓했다.
청광이 다가가자, 주름진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청성을 나오면서 목숨을 버릴 각오로 장문지령도 내던졌으나…… 차마 사문이 멸문지화를 당하게 둘 수는 없구나. 내 한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청성에 남은 문도들은 어찌한단 말이냐. 나는 움직일 수 없을 것 같다, 청광아.”
“장문인……!”
“네 뜻이 그러하다면 청성을 나가라. 나는 말리지 않을 것이다.”
“……!”
묘한 말이다.
단순히 받아들이기엔 그 의미가 깊었다.
적하 진인과 눈을 지그시 마주하던 청광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장문인.”
성큼성큼 뒤로 물러선 그가 결연한 얼굴로 깊게 포권을 취했다.
“제자 청광. 장문인의 명을 받듭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된 절이 아홉 번을 채웠을 때, 비로소 청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등을 돌려 나가는 그에게서 더 이상의 번민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영향을 받았음인가.
청광의 사제 열 명이 마찬가지로 구배지례를 하고 떠나가니, 객잔 안에는 함께 온 일대제자들 중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허허.”
적하 진인은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청벽아. 나가자꾸나. 우리도 할 일이 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장문인.”
“대천문과 연루된 다른 문파들과도 이야기를 해 보아야지. 그들의 말을 듣고…… 청광의 이야기도 해 볼까 한다.”
“아…….”
청벽은 그 순간 깨달았다.
적하 진인의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심화는 가라앉지 않았음을.
그러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강하게 타올라 청성을 잿더미로 만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량수불.”
도문을 읊는 청벽의 안색은 어두웠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어두운 미래.
청벽은 그저, 청성파가 무사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
명 제국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꼭대기에는 황제가 있다.
하늘의 대리자.
신의 아들.
천자의 위에는 그 누구도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게 상식일 테지만.
작금의 황제가 아직 열 살에 불과하기에 이례적으로 황제를 대신해 천자의 업무를 처리하는 ‘섭정’이 존재했다.
태황태후 장씨.
그리고 그런 장씨가 신뢰하는 노(老)재상 양사기.
누가 뭐래도 현재 명제국의 실세가 양 재상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왕진. 자네가 올린 서류는 다 읽어 보았네.”
‘탁’ 하고 서찰이 탁자에 내던져지는 모습은 지난번의 대회의 때와 놀랍도록 똑같았다.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제가 그랬던가요?”
“왕진.”
백발의 노재상이 무심한 눈빛으로 왕진을 응시했다.
“자네는 뚝심이 강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것인가?”
왕진은 빙긋 웃었다.
“당연히 둘 다 아니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