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38화 (267/686)

6권 13화

제19장 균자난청(菌子難淸) (7)

“그렇다면 어째서 같은 주장을 반복해서 하는 건가?”

“마땅히 이뤄져야 할 일이라고 저는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지요.”

“마땅히 이뤄져야 할 일이라……. 황군과 흑시(黑矢) 부대를 이용해 무림 강호를 재편하는 것이 말인가?”

양사기는 일고(一顧)의 가치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차라리 전쟁을 하자고 하지 그러나? 남쪽의 대월이라든가, 북쪽의 야만인이라든가. 찾아보면 싸울 만한 곳은 꽤 있다네.”

“……재상께선 저를 놀리시는 군요.”

“놀리는 것으로 보이나?”

양사기는 조용히 왕진을 응시했다.

옅은 갈색을 띈 눈동자가 폭풍 전의 고요처럼 심상치 않은 기색을 품고 있었다.

“국가를 운영하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전쟁’이라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네. 왕진. 자네가 만약 왕이라면 근처에 있는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무엇을 할 텐가?”

“네?”

“무조건 병사들을 징용하여 쳐들어갈 건가?”

왕진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부(不), 대화가 통하는 나라라면 대화로 먼저 해결할 테지요.”

“잘 알고 있군. 싸움이라는 것이 꼭 칼을 맞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나. 돈을 써서 길목을 막아 버리는 수를 쓸 수도 있고, 미인계 같은 계략 하나면 충분할 수도 있지. 전쟁은 그러한 수단 중의 하나야. 나는 전쟁이란 마치 대장간의 용광로와 같다고 생각한다네.”

“용광로라고 하시면?”

“사람의 생명을 땔감으로 삼아 불꽃을 피워 내고 그 불꽃으로 쇠를 두드리는 게 전쟁이다. 즉, 그 용광로에서는…… 석탄값보다는 비싼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야.”

확실히 양사기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일국의 재상이란 그런 것인가?

사람의 생명을 용광로의 땔감으로 보며 계산을 하는 모습에 조금도 위화감이 없었다.

“헌데 아무리 봐도 무림인들을 상대로, 그것도 국내에서 싸운다는 게…… 값어치가 안 맞는 것 같단 말이야. 그뿐인가? 한 번 석탄을 써 버리면 그 뒤엔 땔감을 구하기가 어려워져. 이러다간 대장간이 망하게 생겼는데, 그래도 용광로에 불을 피워야겠는가?”

“예.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들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침상 밑에 화탄을 넣고 자는 것과 같습니다. 치우지 않는다면 평생 불안에 떨게 될 것입니다.”

“허어.”

양사기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속을 내보이질 않는군. 실리를 말하라는데 어찌하여 이상만을 말하는가.”

“제가 말하는 것은 실리입니다. 단순한 이상이 아니지요.”

“그럼 말해 보게. 뭐가 그리 실리적으로 위험한가? 강호인들? 자 여기 이곳을 보게. 명 제국을 움직이는 큰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곳일세. 우린 어째서 강호인들을 근심하지 않는가? 명 제국 곳곳에 퍼져 있는 그들이 진정 위험하다면 지금 이렇게 자네와 편안히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양사기가 주변을 가리키니 회장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동조하는 의견이 터져 나왔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재상.”

“지금과 같은 태평성대에 굳이 내부의 분란을 자초하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

“강호인들 또한 명 제국의 신민. 잘 다루기만 한다면 도리어 나라에 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왕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명제국의 거물들을 바라보며 이율배반적인 즐거움을 느꼈다.

‘저런 자들이 마음이 바뀌면 그때는 어떤 말을 할까?’

왕진은 절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아야만 했다.

양사기가 주최하는 대회의엔 황실을 좌지우지하는 많은 관리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왕진의 자리는 말석.

양사기 근처에 앉아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비단과 금실로 장식된 관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강렬한 눈빛을 지닌 자들뿐이었다.

최소한 백작(伯爵)의 작위 정도는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목소리가 크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확신을 갖고 일할 줄 아는 뚝심이 있는 자들.

그런 자들이 양사기를 중심으로 뭉쳐서 나라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다들 나와 의견이 비슷해 보이는군. 어떤가, 왕진. 자네는 마음이 바뀌었는가?”

“그 전에 다른 분들께 질문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재상?”

“좋도록 하게.”

양사기의 허가를 받은 왕진은 주변의 고관들에게 짧게 포권을 취했다.

“실례지만, 여러분은 강호 무림의 고수들을 제대로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강호 무림의 고수……?”

회장에 있던 스무 명이 넘는 고관들 중 자신이 강호에 대해 잘 안다고 대답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어전 대회 때 무인들의 검무를 보았네.”

“금의위가 강호인을 몇 명 데려와 대련을 하더군. 그때의 놀라움은 아직도 생생하네. 금의위는 강하더군.”

“대역죄인을 잡는 데 무림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소. 그들은 발이 빠르고 신출귀몰하오.”

그나마 자신감 있게 말하는 몇 몇의 이야기를 들으며 왕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이게 문제였다.

대부분 지방의 현령 자리조차 잘 안 거치고 황실로 올라온 인재들인 것이다.

명가에서 태어나, 글공부만 하다가 곧바로 황실에 입성한 도련님들이 어디 험악한 무림인들 구경이나 했겠는가.

“후훗, 그렇군요.”

왕진은 양사기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히며 예를 표했다.

“재상.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지요? 많은 이들이 주장한다 하여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허허, 그런가.”

삼인성호.

세 사람이 모이면 거짓말로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의 고사성어였다.

“허어.”

“크흠!”

주변의 고관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으나, 양사기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럴 줄 알았네. 그리 쉽게 마음이 바뀌면 왕진이 아닐 테지.”

“맞습니다.”

“너무 이상적인 면이 있긴 하나, 난 자네를 높이 보고 있다네. 그래서 폐하의 곁에 자네를 두고 보는 것이야.”

“……감사한 말씀.”

왕진은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양사기는 그런 왕진을 꿰뚫어보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응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자네의 말뜻은 알겠으나, 이번에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답은 똑같네. 흑시 부대를 그리 가벼이 움직여서는 안 될 터. 진실로 긴급한 상황에만 움직여야 황실의…….”

“재상! 재상!”

양사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회장 바깥에서 다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뭉툭한 주먹코를 지니고 눈이 작은 거한이었다.

본래 금의위였으나 관직에서 물러나 양사기의 휘하에 들어간 무장(武將)이었다. 검은색 투박한 무복에 윤기가 흐르는 가죽 재질 갑옷을 통으로 걸쳤다.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만도를 이미 뽑아 들고 있었다.

“기륭. 무슨 일인가?”

“습격입니다. 몸을 피하십시오!”

“뭐라?”

침묵은 잠시, 회장에 모여 있던 고관들이 얼굴을 굳힌 채 일제히 일어섰다.

그들은 뛰어난 두뇌로 제각각 현재의 상황을 판별했다.

“습격이라니. 지금 남경에 움직일 수 있는 군이 있었던가? 어느 군이 움직였지?”

“남경 한복판에서 군이 움직이다니. 제정신이란 말인가? 도독부에 사람을 보내야 한다!”

“아닐세. 북경에 파발마를 보내는 게 먼저일세. 역모일지도 몰라. 황실에서 먼저 명이 내려와야 해!”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그들에게 양사기는 버럭 소리쳤다.

“그만! 조용히 하라!”

늙고 노쇠하였으나 그래도 호랑이는 절대로 개가 되지 않는다.

양사기의 두 눈이 호안(虎眼)이 되어 감히 감당하기 힘든 눈빛을 뿜어냈다.

“기륭, 습격자는 누구인가?”

“그것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복면을 쓴 괴한인데. 셋 다 하나같이 몸이 날래고 무공이 뛰어나 잡기가 힘듭니다.”

“셋?”

양사기가 믿을 수 없어 되물었다.

“셋이라니. 고작 셋이서 이곳 양가부에 쳐들어왔단 말이더냐!”

“예. 그보다 빨리 피하십쇼! 그자들이 지리를 몰라 헤매고 있어서 시간을 벌었습니다. 어서 뒷문으로……!”

기륭은 충심으로 조언을 하였으나, 노쇠한 양사기는 물론이고 다른 고관들의 움직임은 굼뜨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고관들은 기륭의 말을 듣고는 위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셋밖에 안 되는데 우리가 도망쳐야 하는 건가?”

“재상, 양가부의 병사들을 모아 붙잡아 버리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저희가 오면서 함께 온 하인들 중 무공에 조예가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불러 모으겠습니다.”

고관들이 제각각 떠드는 사이, 침입자는 담장을 넘어 회장에 내려섰다.

특징이 없는 검은색 무복에 눈 밑을 가리는 복면까지 한 사내였다. 피부가 팽팽하고 눈매가 또렷한 것으로 보아 꽤나 젊은 나이로 보였다.

한 손에 폭이 좁은 협봉검을 들고 있었는데, 누구의 것인지 모를 새빨간 피가 뚝뚝 흘러내려 모두의 눈을 사로잡았다.

“저, 저……!”

“웬 놈이냐!”

소리라도 지른 것을 높게 평가해 줘야 할까.

당황하는 고관들을 제치고 기륭이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이놈!”

기륭은 복면인의 앞을 가로막으며 칼을 겨눴다.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칼을 휘두르느냐!”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우렁찬 목소리로 기륭이 버럭 소리쳤다.

헌데 복면인은 기륭에게 잠시 시선만 머물렀을 뿐, 그는 훨씬 뒤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놈……!”

기륭은 침입자의 목을 향해 최선을 다해 칼을 날렸다.

쉬이익―.

이미 서로 피를 본 상황이었다. 살수를 자제할 이유가 없을 터.

기륭은 자신을 쳐다도 보지 않던 침입자가 손목을 뒤집어 칼날을 휘두르는 것을 알아챘다.

마치 높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검술이었다.

눈앞에서 검광이 번뜩인다 싶더니, 기륭의 손에서 칼이 사라져 버렸다.

툭 하고 뭔가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기륭은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평생을 보아 온 손이 단단하게 칼을 움켜쥔 채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푸확―.

손목에서 뿜어진 핏물이 허공에 안개처럼 흩뿌려졌다.

차르릉―.

협봉검 검 날이 허공에서 몸을 떨며 울었다.

푸른 하늘의 구름(靑雲)처럼 자유로운 검술 아래 안개처럼 은은히 퍼지는 혈향(血香).

일천한 지식이었으나, 기륭은 상대의 검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청……!”

슥―.

피부가 갈라지는 듯 섬뜩한 소리와 함께, 기륭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청성……!’

울컥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기륭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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