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14화
제19장 균자난청(菌子難淸) (8)
“기륭!”
양사기의 비통한 외침이 회장을 뒤흔들었다.
핏대가 선 목, 하얗게 질린 얼굴이 그가 얼마나 경악했는지를 보여 주었다.
늙은 재상은 거구의 기륭이 손목과 혀가 잘린 채 피를 토하며 고꾸라지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노옴―!”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그가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본인의 집에 괴한이 나타나 아끼던 수하를 벨 줄이야.
“멈춰라!”
그때 사방에서 몰려든 양가부의 병사들이 복면인에게 창을 겨누었다.
채챙―.
십여 개의 화살이 날아왔으나, 복면인은 협봉검을 휘둘러 몇 개는 쳐 내고 몇 개는 피해 냈다.
고관들은 도망가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몰려온 병사는 수십 명이었다. 황군처럼 두꺼운 갑옷을 입었고 커다란 창과 칼을 하나씩 갖고 있어 자객 한 사람 정도는 금방 잡아 버릴 것만 같았다.
헌데 그 기대는 복면인과 병사들이 부딪치기 시작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채채챙―.
“으악!”
피를 흘리며 나가떨어지는 것은 번번이 양가부의 병사들이었다.
복면인은 몸놀림이 구름처럼 가벼웠다. 병사들이 창으로 찌르면 유연하게 허리를 굽히면서 피해 냈고, 병사들이 검을 휘두르면 손목만 살짝 꺾어 맞대는 것 같은데도 강한 힘으로 검을 쳐 냈다.
그러다 틈을 노려 검첨으로 갑옷 사이를 가볍게 푹 찌를 뿐인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병사 한 명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한 명, 두 명, 세 명.
쓰러지는 병사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다른 병사들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양가부 병사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쓰러지는 숫자보다 더 많은 병사들이 튀어나와 주변을 채웠다.
“숫자만 많다고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복면인은 벼락같이 외치더니, 회오리처럼 몸을 돌리며 두둥실 몸을 띄웠다.
복면인이 허공에 손을 흩뿌리자 푸른색의 벌침 같은 철정(鐵釘)이 번개처럼 날아가 주변 병사들의 손등에 꽂혔다.
복면인은 고통스러워하며 물러나는 병사들에게 날카로운 검술을 선보였다.
기륭을 벴던 검술.
날카로운 검격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병사들의 몸에서 붉은색 핏물이 안개처럼 뿜어졌다.
“저럴 수가……!”
고관대작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동안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검무(劍舞)로나 봤지, 피가 튀고 검이 난무하는 모습을 언제 코앞에서 봤겠는가.
“무공이 엄청나군……!”
“저자는 대체 누구인가!”
고관들은 긴장과 공포, 그리고 새로운 것을 보는 설렘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부운약표(浮雲躍飄), 청봉정(靑蜂釘), 청운적하검(靑雲赤霞劍).”
그때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사내가 있었다.
피가 튀고 비명이 터져 나오는 이런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분하게 뒷짐을 진 채 입가엔 미소를 머금고 있기까지 했다.
왕진은 분칠한 듯 새하얀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여성스러운 몸놀림으로 복면인을 가리켰다.
“저것이 구파일방이라 불리는 정도의 무공입니다. 저런 자야말로 진정한 무림 강호의 무림인이지요.”
“허어.”
주변의 고관들이 감탄하며 탄식했다.
“……!”
한편, 양 떼 속의 늑대처럼 날뛰던 복면인은 왕진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더욱 분노하며 날뛰었다.
허나 병사들도 명가를 지키는 정예 병사들이다. 슬슬 요령을 깨우쳐서 서로 몸을 붙인 채 복면인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장내에는 예상치 못했던 원군까지 등장했다.
“비켜라!”
“우리가 막겠다!”
검은색 비단 무복에 가슴에 새겨진 황실의 문양.
금의위 다섯이 나타나 복면인의 주변을 둘러쌌다.
채엥―.
“흠!”
처음으로 복면인의 검이 중간에 가로막혔다.
착(捉)과 반(反)이 기묘하게 얽히며 복면인의 검을 놓아주지 않았다.
“흥!”
복면인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더니 검을 한 손으로 잡고 똑바로 세운 뒤, 손가락 두 개를 세운 검결지로 검 날을 쓰다듬었다.
우웅―.
검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검명(劍鳴)을 토해 냈다.
복면인이 척― 하니 검을 겨누자, 검에서 푸른색 빛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
“으음……!
한 걸음을 물러서니 검명, 자세를 낮추자 검기다.
금의위들이 얼굴을 굳히며 제각각 자세를 낮췄다.
“검기……!”
“팔진(八陣)을 짜라! 어서!”
복면인은 곧바로 무서운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채채챙―.
한 명이 전면에서 검을 받으며 물러서는 것과 동시에 사방에서 금의위들이 협공을 했다.
복면인의 무공은 뛰어났다.
검기를 뿜어내기 시작하자, 금의위들은 방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입고 있던 무복과 가죽으로 된 비구들이 찢어지면서 상처가 났다.
파라락―.
넓은 소맷자락에서 날갯짓을 하는 듯한 바람소리가 났다.
복면인은 그렇게 금의위 다섯 명과 오십 합이 넘게 겨룬 뒤, 그의 동료로 보이는 두 명의 복면인이 더 나타나자, 그제야 뒤로 물러났다.
쿵.
복면인은 강하게 발을 구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로 가득한 외침을 토해 냈다.
“고관들에게 묻는다! 관과 무림은 서로 관여치 않을지니! 이는 오래전부터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어찌하여 관에서는 무림을 핍박하는가!”
복면인은 사나운 눈빛으로 고관들을 노려보았다.
“민초들을 괴롭히고 패악질을 부리는 부패한 관리가 아니라면 무림인들과 만날 일도 없을 터. 더 이상 무림 강호에 관여치 마라! 만약 관여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우리 무림인들이 단죄하러 나타날 것이다!”
복면인들은 일제히 검을 꼿꼿하게 세우며 큰 소리로 외쳤다.
“군자무소쟁(君子無所爭), 필야사호(必也射乎)!”
복면인들은 결연하게 외친 뒤, 마치 한 자루 검에 몸을 맡긴 듯 날카로운 기세로 제각각 주변을 둘러싼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쒜에엑―.
“……!”
특히 가장 앞에 있던 복면인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금의위 다섯과 수십의 병사들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는데도, 목숨을 도외시한 사람처럼 달려드니 금의위들이 긴장하며 방어를 준비했다.
“막……!
팡―.
“헛!”
복면인은 공격을 할 것처럼 검을 내미는가 싶더니, 금의위의 무릎을 밟고, 어깨를 밟으며 허공으로 힘차게 뛰어올랐다.
파라락―.
소맷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짓밟힌 금의위가 다급하게 올려다보았으나, 복면인은 이미 저 멀리 화살처럼 쏘아지는 중이었다.
복면인의 검은 한 사내에게로 향했다.
뒷짐을 진 채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 사례감 태감 왕진이 그 목표였다.
피슉―.
“……!”
헌데 왕진에게 검을 찌르기 직전, 복면인의 몸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퍽― 하고 떨리더니 날개 잃은 새처럼 바닥으로 추락했다.
“컥…….”
바닥으로 추락한 복면인이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의 가슴엔 어느새 검회색의 화살 깃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럴 수는…….”
어느새 쫓아온 금의위 두 사람이 복면인의 양쪽에서 각각 다리와 옆구리에 검을 푹 찔렀다.
쿨럭, 기침을 한 복면인의 턱 밑에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파르르 떨리는 육신.
집요하게 치켜뜬 눈동자는 여전히 왕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륵…….”
그는 피가래가 끓는 입으로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끝까지 검을 앞으로 뻗었으나, 왕진에겐 닿지 않았다.
“이런이런.”
왕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쉽네요. 화살만 아니었어도.”
“크륵…….”
“군자무소쟁 필야사호라. 자객 주제에 논어를 읊다니. 군자는 싸울 일이 없으며, 굳이 다툴 만한 일이 있다면 활쏘기뿐이다? 싸우려하지 말고 군자로서 처신을 잘 하라는 건가요?”
왕진이 코웃음 치며 금의위에게 손짓을 해 복면을 벗기도록 시켰다.
복면을 벗기자 의외로 젊어 보이는 얼굴이 보였다.
기껏해야 이십 대 중후반으로밖에 안 보이는 얼굴이었다. 콧대가 뭉툭해서 사내답긴 하나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자객은 숨이 쉬어지지 않는지, 피가래를 계속 내뱉으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는 원망을 가득 담아 왕진을 노려보았으나……. 이내,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흐음…….”
왕진은 자객의 얼굴을 유심히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청광이 아니군요…….”
왕진은 관심을 다른 이들에게로 돌렸다.
함께 온 나머지 두 명의 자객들도 비슷한 최후를 맞고 있었다.
화살에 맞고, 금의위의 검에 베이고, 병사들의 창에 몸이 꿰뚫렸다.
바닥엔 핏물이 진하게 흘렀으며, 자객들은 배가 갈라져 내장을 쏟아 냈다.
모두가 피거품을 내뱉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 참혹한 모습을 본 고관들 중 일부는 토할 것처럼 헛구역질을 했다.
“흐음.”
둘의 복면을 벗겼으나 기대하던 얼굴은 나오지 않아 왕진은 조금 실망하고 말았다.
“왕진.”
그때, 기륭의 시신을 수습한 양사기가 활활 불타오르는 듯한 시선으로 왕진을 노려봤다.
‘지금껏 보아 온 중에 가장 분노한 모습이군요.’
왕진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며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
“재상.”
“일단은 물어보지. 이 일, 자네가 계획한 일인가.”
“그럴 리가요.”
왕진은 바닥에 쓰러진 복면인을 가리켰다.
“저자가 집요하게 저를 노리던 모습을 못 보셨나요? 누군지 몰라도 화살을 쏜 병사가 없었다면 저는 죽었을 거랍니다. 너무 위험했던 순간이었어요, 재상.”
“그렇긴 했지. 헌데, 찝찝하군. 자네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마지막엔 자객이 왠지 몰라도 자네를 노렸지. 게다가 자네는 저들의 무공을 아는 것 같던데?”
한 치의 거짓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양사기는 날카로운 시선을 왕진에게서 떼지 않았다.
허나 왕진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청산유수로 답하였다.
“제가 올렸던 상소는 기억하시나요?”
“물론.”
양사기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 주변에 모여 있던 고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래서 더욱 의심스럽군. 늙은이의 호들갑이래도 좋네.”
“이해해요. 하지만 아닙니다. 저자들은 그저 얼마 전에 소림사 앞에서 본 적이 있어서 알 뿐이랍니다.”
“본 적이 있다? 그럼 정체도 알고 있나?”
“네. 구파일방 중의 청성파의 문도 같군요.”
“허어.”
양사기는 물론이고 그나마 무림 강호에 대해 들은 게 좀 있는 자들은 탄식을 토해 냈다.
“청성파라…….”
나직하게 중얼거린 양사기는 하인들을 시켜 자객들의 시신을 잘 닦아 한쪽에 보관하라 지시했다.
“왕진. 만약 이 일과 관계가 있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재상. 그렇게 하셔야지요.”
왕진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으나 양사기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크흠, 이런 상황이라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왕진은 주변 고관들을 쭉 둘러본 뒤 말했다.
“저의 상소문에 대한 생각은 아직 변함이 없으신가요? 이제 뜻이 바뀌시진 않았나요?”
고관들은 수군거리며 떠들긴 했으나 왕진에게 따로 답을 하는 자는 없었다.
그저 양사기가 축객령을 내렸을 뿐이었다.
“아직도 놀라서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재상. 여러분의 좋은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보셨다시피…… 이들은 위험합니다. 흑시부대를 통해 고삐를 쥐어야 해요.”
왕진은 포권을 취했고, 다른 고관들 또한 형식적이나마 마주 예를 포하며 왕진을 보내 주었다.
그렇게, 양사기와 고관들에게 일대 충격을 준 왕진은 그 후 양씨 가문의 밖으로 빠져나왔다.
***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칙칙한 색깔의 마차 안, 넓고 푹신푹신하게 깔린 보료 안에서 왕진은 꼿꼿이 앉은 채 화살을 하나 들어 올렸다.
십(十)자 형으로 갈라진 화살촉에 길쭉한 화살, 그리고 그 끝에 달린 화살 깃은 청성파 복면인의 가슴에 꽂혔던 화살과 똑같이 검회색이었다.
“잘했다, 도철. 덕분에 오늘도 사지 멀쩡하게 하루가 끝났구나.”
“흥. 알긴 아는구만.”
마치 독이 잔뜩 오른 야생 늑대처럼 볼이 움푹 들어가 음습한 느낌을 주는 청년이 안 어울리게 싱긋 웃고 있었다.
“나서서 싸우지 못하니 화살이라도 쏴야지. 그 청성파 놈은 꽤나 물어뜯는 맛이 있을 것 같았는데 말이야. 아쉬워.”
사흉의 일원, 도철이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욕망은 넣어 두세요. 조만간 큰 기회가 있을 테니까.”
“빨리 달라고. 속이 터질 것 같으니까.”
“후후, 그러지 않아도 그 집혼기를 활용해야 하지 않겠나 싶네요.”
그제야 반색을 한 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 빨리 힘을 채워 넣어서……. 기린 놈을 쓰러뜨려야 한다고.”
도철의 두 눈은 과거의 싸움을 떠올리며 사납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