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15화
제19장 균자난청(菌子難淸) (9)
“무쌍귀라……. 후훗, 어때요? 도철. 상처입고 돌아와선 한동안 두문불출 했는데, 다음번엔 무쌍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요?”
“당연!”
호기롭게 외쳤던 도철이지만, 잠시 후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쳇, 당연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아직은 아냐. 일단은 집혼기를 다 채워야 해. 쓰러뜨리는 건 그 다음이지.”
“호오, 그래요?”
왕진은 흥미롭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도톰한 입술을 두드렸다.
“사흉의 도철이 겸손한 모습을 보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요?”
“겸손은 무슨. 그냥 사실일 뿐이지. 아직은…… 그래, 아직은 아닐 뿐이야.”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도철은 마치 먹잇감을 잡기 위해 몸을 낮추고 있는 늑대 같았다.
이를 드러내면서 눈을 날카롭게 치뜨는 얼굴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왕진은 도철이 바라보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알 것만 같았다.
“정상의 높이를 보았는데도 올라갈 마음이 들다니. 그렇다면 올라갈 자신이 있는 것이겠지요. 훌륭해요.”
왕진은 흡족하게 웃으며 검은색 섭선을 흔들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궁기(窮奇)?”
궁기라고 불린 자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정상적일 만큼 두껍고 커다란 손이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그는 핏줄이 퍼렇게 보일 만큼 새하얀 손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열 개의 손가락이 모두 엄지발가락만큼이나 굵고 단단해 보였다.
복장도 특이했다.
새카만 무복에 새카만 장포를 걸쳤다. 거기에 얼굴을 가리는 죽립까지 쓰고 있으니 마차 안이 더욱 어두워 보일 지경이다.
“도철, 이 저렇게까지 말, 한다. 특, 이, 하다. 만나, 보고 싶다.”
“무쌍귀를 말인가요?”
“그렇, 다.”
궁기라 불린 자는 어딘가 말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단어 이상을 말할 때는 반드시 중간에 틈이 있었다.
“만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요?”
“…….”
“하긴 궁기는 확실하지 않는 것은 약속하지 않는 성품이지요.”
“하지만, 도철, 이 이길, 수 있다면 나도, 이긴다.”
도발적인 언사에 도철의 고개가 옆으로 확 돌아갔다.
“뭐라고 지껄였냐, 손만 큰 오랑캐 놈아.”
“사실, 을 말할 뿐.”
궁기는 두꺼운 손으로 도철을 한 번 가리키고, 그 다음엔 자신을 가리켰다.
“너의 발톱, 은 내 손, 을 못 뚫는다.”
“개소리.”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 으르렁거리는 도철과 말은 없어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궁기가 첨예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그만들 해요. 그대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싸우는군요. 같은 사흉인데 친해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도철과 궁기는 서로 고개를 팩 돌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불가.”
왕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혼돈은 조만간 법당에서 나올 것이고 도올은 집혼기를 받아들이는 중이죠. 곧 사흉의 자리가 다 채워지면 같이 큰일을 해야 할 테니 서로 잘 좀 지내보도록 해요.”
도철과 궁기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큰일이라…….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뭐죠?”
“이번 일이 잘 될 것 같아?”
왕진이 도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런 건 왜 묻죠? 잘 안 될 것 같나요?”
“그럴 리가.”
도철은 보기보다 영리한 편이었다. 그는 양손을 머리 뒤에서 깍지 낀 채 왕진을 옆 눈으로 힐끔거렸다.
“왕 공공의 계획은 항상 맞아떨어졌잖아. 무서울 만큼. 이번에도 청성파 놈들이 약이 잔뜩 올라서 회의장으로 덤벼들 걸 예상했던 거잖아? 그러니까 우릴 불러놓은 거 아니야?”
“그래요.”
왕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무림 강호에 대해 무지한 고관대작들이 무림인의 위험성을 알 테니까요.”
“항상 궁금했는데, 도대체 왕 공공이 원하는 게 뭐야?”
“현 무림 강호의 멸망.”
왕진은 거침없이 답했다. 도철이 눈을 크게 뜨자, 왕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후훗, 뭘 그리 놀라나요. 그럼 말을 좀 바꿔 볼까요? 무림 강호의 ‘재편’ 정도로 해 두죠. 황실을 주체로 강호 무림 문파들을 재편하고 우리가 통제권을 쥐는 것이지요. 천하 무공의 종파를 무산학관에 다 모아 놓을 것입니다.”
황실의 사례감 태감이자 동창의 이무기가 그림자 속에서 짜 놓은 판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쳐 낼 것은 쳐 내고, 살릴 것은 살려야겠지요. 그때가 바로 사흉이 활약할 시점이랍니다.”
“그런 거였군.”
도철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그래서? 어딜 먼저 쳐 낼 건데?”
“후훗, 지켜봐야지요. 뭐 시작은…… 청성일 테지만.”
“그놈들도 불쌍하구만.”
도철은 혀를 찼지만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그때의 싸움이 기대되는 듯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이번 일 말인데. 원래는 잔뜩 성이 난 양사기가 흑시부대를 움직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흐지부지하고 가도 되는 거야?”
“도철은 영민하군요.”
“당연! 고관들 몇 명은 죽였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쉬운데.”
“후훗, 그건 아니에요. 양사기가 화가 나서 흑시부대를 움직인다라……. 그게 최상책이긴 했지요. 뭐, 안 되면 할 수 없지만요. 원래 뛰어난 책사는 항상 상책부터 하책까지 방책을 여러 개 준비해 놓는 법이랍니다.”
왕진은 그러니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모든 것이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고 말했다.
“그랬군. 그런데 내가, 느낌이 좀 이상하더라고.”
“어떤 점이 말이죠?”
“아까 고관대작 놈들을 유심히 봤었는데. 왠지 그놈들 하나같이 겁쟁이들이더란 말이야. 왕 공공의 예상과 다를 것 같더란 말이지.”
“겁쟁이들이라…… 그렇군요. 알겠어요.”
도철은 왕진만큼 생각이 깊지는 못하지만, 천기(天氣)를 느끼는 게 아니냐고 묻고 싶을 만큼 감이 좋은 편이었다.
본래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하지 않던가.
사람이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남는 것은 하늘이 내리는 운(運)에 달린 법이었다.
“후훗, 깊이 새겨듣지요.”
왕진은 그 후 옆에 앉혀 놓은 선과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바람은 선선했고, 잘 정비된 길 덕분에 마차는 흔들리지 않았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한 시진쯤 지났을까, 갑자기 그들이 탄 마차가 급하게 멈춰 섰다. 마차를 몰던 마부가 급박하게 외쳤다.
“대인! 급전입니다!”
“급전이라니?”
왕진이 마차에서 나와 보니 동창의 교위 하나가 무릎을 꿇은 채 양손으로 공손하게 서찰을 받쳐 들고 있었다.
왕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벌써 결과가 나온 건가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양 재상의 행동이 빨랐습니다. 현재 양가부와 황실이 떠들썩합니다.”
“난리가 났다면?”
“양사기 재상과 그 자리에 있던 고관들이…… 무림에 성명서를 내겠다고 합니다. 내용은 서찰 안에 있습니다.”
왕진은 서찰을 펼쳐 읽기 시작했고, 이내 침묵에 빠지고 말았다.
“관은 언제나 군자의 태도를 유지할 것이며, 청렴한 관리가 많아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관은 무림과 서로 상관하지 아니한다.”
왕진은 코웃음 치며 서찰을 내던졌다.
동창 교위가 황급히 바닥을 기어 서찰을 다시 주워서 양손으로 들었다.
왕진은 마차 안을 향해 소리쳤다.
“그대의 말이 맞았어요.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겁쟁이들이로군요.”
마차 안에서 나지막하게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왕진은 작게 한 숨을 내쉬며 섭선을 흔들었다.
“그 수모를 겪고, 수하를 잃기까지 했는데 패배자처럼 순순히 물러서서 양보를 해?”
왕진은 혹시 이런 상황이 될까 봐 계책을 짜 놓긴 하였으나, 정말로 이렇게 되어 버리니 한숨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는 머릿속으로 양사기가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의 다른 의도가 있을지 계산을 하는 한편, 역시 그가 추진하는 일을 옳은 것이라고, 또 한 번 확신을 했다.
“결국 삼책(三策)을 꺼내야겠군요.”
왕진은 품에서 서찰 세 개를 꺼내서 그중 붉은색 비단으로 싸여 있는 화려한 서찰을 동창 교위에게 건넸다.
“수고했어요, 교위. 이건 황제폐하께 전해 주세요.”
“……!”
“그리고 이 죽간은 하북의 ‘그곳’으로 보내면 된답니다.”
동창 교위는 잔뜩 긴장한 채 양손을 모아 서찰과 죽간을 받아 들었다.
“존명!”
그는 곧바로 말에 올라 질풍처럼 달려 나갔다.
그가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한 뒤, 왕진은 다시 마차에 탑승했다.
“우리도 목적지를 바꾸도록 하지요.
“어디로 가세요?”
또랑또랑하고 순수한 눈동자로 되묻는 선을 보며, 왕진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무산학관으로 가죠.”
***
고도(古都) 낙양의 남방, 중원 최초의 사찰 중 하나인 백마사와 더불어, 불자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불문의 성지가 하나 있었다.
단단하고 높은 바위벽에 인간의 한계를 훌쩍 넘은 듯 거대한 불상이 있으니 이는 불법무한의 상징이며, 크기와 상관없이 놓여 있는 수만 개의 불상들은 불자들의 신심(信心)의 상징이라.
특히 빈양동(賓陽洞) 외벽 좌우에 있는 반육조(半肉彫)의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는 걸작이었다.
자세는 역동적이었고, 표정과 눈빛은 강렬했다.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이며 부처를 믿지 않는 자들을 때려죽일 것 같은 석상 앞에, 정갈하고 깨끗한 백창의를 입고 뒷짐을 진 채 허허롭게 서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용문석굴은 북위 선무제 때 처음으로 시작되었대요. 그때까진 그냥 석굴에 불과했던 거죠. 그랬던 것이 선무제 때 공사를 시작해서…… 북위가 망할 때 잠시 멈췄다가, 당송 시대에 되살아났어요. 지금은 여기 용문석굴에 있는 불상이 전부 몇 개 인지 아시나요?”
“글쎄. 모르겠군.”
“십만 개가 넘어요. 어쩌면 그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다네요. 대단하죠?”
생글생글 웃으면서 설명하는 진휘연은 몹시 즐거워 보였다.
장기린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