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41화 (270/686)

6권 16화

제19장 균자난청(菌子難淸) (10)

“이제 보니 휘연은 역사에 밝고 유적을 좋아하는군. 만난 지 십오 년이 되어 가는데 그런 사실을 처음 알았어.”

“후후, 아무리 남편과 부인 사이라도 모르는 건 있는 법이죠. 아직 당신이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나요?”

“그렇게나 많다니. 앞으로 알아야 할 것이 많겠어.”

“물론이죠. 아마 평생 걸릴 거예요.”

장기린은 잔잔하게 웃었고, 휘연은 그런 장기린의 소매를 붙잡으며 살며시 몸을 기댔다.

“알면 알수록 많은 것이 보이고, 그만큼 재미있는 게 유적과 유물들이에요. 예를 들면 여기에 불상들이 많죠? 그중에 당 고종 때 세워진 대불은 측천무후랑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자신이 사랑했던 부인의 얼굴을 장인(匠人)을 통해 대불로 조각한 거죠.”

“그래?”

“네. 그러니까 이따가 불상을 볼 때 확인해 봐요. 측천무후랑 닮았는지.”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지.”

장기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진작 여행을 올 걸 그랬군.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는 걸 알겠어.”

“바빴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북천맹이랑 싸운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았었나요?”

“그때는……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지.”

“하긴, 그랬겠네요. 우리 낭군님이 얼마나 당황해 있었을까요? 내가 쓰러져 있는데.”

“맞는 말이다. 정신이 없었어.”

장기린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때의 아픔들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과거의 추억일 뿐이었다.

“세월은 이길 수가 없는 것이군.”

“네?”

“많은 것들이 변했다 싶어서.”

“후후, 그렇죠. 우리 꼬맹이, 호아도 생겼구요.”

“그렇지. 사고뭉치 녀석.”

휘연은 소리 내어 웃었다.

“당신 닮아서 그래요.”

“……나를?”

“네.”

“……”

“아니라고 생각하는 표정인데요?”

장기린은 역시 속일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헛기침을 했다.

“날 닮았군.”

“맞아요.”

꼬옥.

휘연이 장기린의 소매를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장기린은 눈을 부릅 뜬 채 강렬한 인상을 주는 금강역사상을 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그가 자신의 반려와 나란히 서 있을 수 있게 되기까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어야 했던가.

“나는 작은 존재였어.”

거대한 금강역사상과 대불을 보면 느낄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얼마나 티끌 같은 존재인가.

“휘연.”

“네?”

“요즘 사실 고민이 있었어.”

장기린은 금강역사상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심스레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내가 사는 마을,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이 위협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두려웠던 것 같군. 평화촌에서의 삶이 너무 행복했으니까. 항주 때처럼 잃어버리는 일은 절대로 없도록 만들겠다고 생각했었지.”

“그랬군요.”

휘연은 그저 조용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헌데 막상 나와 보니 그런 건 아니었어. 적이긴 하지만 마을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는 적은 아니었고, 그 때문에 밖으로 나가게 된 소호는 친구들을 사귀면서 스스로 잘 살아가고 있어. 오늘 나는…… 내가 정말 쉬어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군.”

원래 아무리 복잡한 생각도 막상 입 밖으로 꺼내다 보면 단순하게 정리되는 법이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다. 다들 나를 공격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도 아니야. 오만했어.”

복잡했던 속마음을 꺼내 놓은 장기린.

그는 훨씬 가벼워진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 이젠 정말로…… 쉬어도 될 것 같아.”

“당연하죠.”

장기린에게 있어선 큰 깨달음이었으나, 휘연에겐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오히려 이제야 알았냐는 듯, 불만스럽게 눈이 가늘어지기까지 했다.

“그동안 당신이 세상에 해 준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나라를 구했으니 이젠 그만 편하게 쉬라구요.”

“으음.”

“나랑 같이 여행도 더 자주 다니고요. 알겠죠?”

빨리 대답하라는 듯한 휘연의 재촉에 장기린은 웃으며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행복하군. 이렇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게.”

장기린과 휘연, 두 사람은 용문석굴을 천천히 구경했다. 불법에 매진하는 승려와 불자들이 많았다. 연등을 걸기도 하고 향을 태우기도 했다. 구석에서 손수 불상을 깎는 사람들을 보며 한 팔을 보태기도 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었다.

용문석굴을 나와 그들의 앞에 기품 있는 문양으로 장식된 고관(高官)의 마차가 멈춰 설 때까진 말이다.

“대형, 형수님.”

마차에서 내린 사내는 잘생긴 얼굴로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양손으로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기다렸습니다. 용문석굴은 즐거우셨습니까?”

“즐거웠다, 운화. 휘연이 역사에 대해 잘 알아서 더욱 즐겁더군.”

“그랬군요. 식견이 뛰어난 부인을 얻으셨으니 대형의 홍복입니다.”

자신을 칭찬하는 부운화의 말에 휘연은 그만하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얕은 지식을 말해 본 것뿐이에요. 너무 띄워 주지 마세요.”

“제가 아는 대형은 얕은 지식에 칭찬을 하지 않습니다.”

“천하호걸도 부인에겐 약해지는 법이에요.”

“그렇습니까?”

부운화는 더는 부정하지 못하고 웃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운화?”

“그게…….”

부운화가 힐끗 바라보는 방향에는 휘연이 있었다.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서려는 그녀를, 장기린이 손목을 붙잡고 말렸다.

“괜찮다. 같이 듣도록 하자.”

“……!”

휘연이 놀라고, 부운화도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동안 대천문과 관계된 바깥일은 장기린이 혼자 처리하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두 사람은 못내 궁금해졌다.

“그렇군요. 하긴 맞습니다. 부부란 일심동체(一心同體)이지요.”

부운화는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그가 알아낸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첫 번째로 왕진이 소림사에 나타났습니다.”

“……그러고는?”

“대형은 대천문에 참가했던 자들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한다.”

장기린은 낙양의 폐장원에서 싸웠던 자들을 떠올렸다.

녹림 출신의 강했던 노인.

폭약이 섞인 암기를 자유자재로 쓰던 젊은 무인이 특히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들이 모두 죽은 일로 각 문파의 사형제들이 소림 앞에 모여 있었습니다. 원수를 갚겠다면서, 무쌍귀와 무쌍귀가 은거한 마을을 알려 달라고 떼를 쓰더군요. 사실 저는 언제 끼어들지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만……. 거기에 왕진이 나타난 겁니다.”

부운화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왕진은 무림인들이 다 모여 있는 곳에서 말했습니다. 대천문 사람들을 죽인 건 무쌍귀가 아니다, 대천문은 내가 만든 곳이기 때문에 가장 잘 안다, 그자들을 죽인 건 나다, 라고 외치더군요.”

“뭐라고……?”

장기린은 머릿속으로 왕진을 떠올렸다.

목숨을 내놓은 사람처럼 무모하게 굴던 자.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장기린을 도발하던 이상한 인물.

그자가 무림인들을 상대로 똑같은 일을 벌인 것이다.

“거기서도 죽일 테면 죽여 보라고 한 건가?”

“비슷합니다. 내가 죽였다. 그런데 어쩔 거냐? 그런 느낌이더군요.”

“이상한 자야. 일반 사람들과는 달라. 그런데 그자가 거기서 내 편을 들었다는 것이지?”

“예. 대형의 편을 든 겁니다.”

장기린은 지그시 눈을 감아 버렸다.

“무림인들은 안 좋아할 것 같은데. 맞나?”

“예. 무쌍귀가 황실과 연관이 있을 줄 알았다느니. 조사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느니 말은 많지만……. 마지막에 다른 게 터져서 지금 군웅들은 저희 쪽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터졌기에?”

“이야기를 끝내고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그때 갑자기 왕진이 무산학관에 ‘소림’과 ‘무당’이 무공을 절반 가까이 제공해 주어서 고맙다고……. 많은 군웅들이 다 듣는 곳에서 크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하하.”

장기린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웃음이 의외였던 것일까.

부운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대형……?”

“왕진 그자는 태생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이상한 자이지만……. 배포 하나는 인정해 줘야겠어. 휘연, 어떻게 생각하지?”

휘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군웅들이 모여 있는 천금(千金)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부러 무산학관을 언급해서 무산학관의 존재를 알렸네요. 소림과 무당을 굳이 끌어들인 건 무산학관에 이만큼 대단한 게 있다! 고 자랑한 셈이고. 굳이 무림 군웅들이 다 모인 곳에서 그렇게 말하다니. 상재(商才)예요. 장사를 했어도 잘했겠어요.”

“일개 환관에서 시작해서 사례감 태감까지 간 자니까. 특출하긴 하겠지.”

“소림과 무당은 좀 피해를 봤겠지만……. 그런 상황이면 소문이 구름처럼 퍼지고, 무산학관에 사람들이 몰려들겠는데요? 어때요?”

부운화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수의 말이 맞습니다. 그날 이후 소문은 순식간에 대륙 전역으로 퍼졌고, 무산학관 앞에는 입관하고자 하는 자들이 줄을 서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장기린은 저 멀리, 무산학관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때는 정오.

뿌연 안개가 걷히고, 화사한 햇볕이 산봉우리 인근을 비추었다.

“그런 걸 원하는 거였나.”

문득 드는 깨달음이 있어, 장기린은 왕진이 원하는 바를 알아챘다.

“여러 개의 원한을 단지 오해를 풀어 줬다는 은(恩) 하나로 갚았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좋은 일은 좋은 일이지.”

장기린은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고, 그 뒤에 결론을 내렸다.

“운화.”

“예. 대형.”

“난 이만 돌아가려고 한다.”

장기린은 부운화와 시선을 맞추고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부운화의 차분했던 눈빛이 흔들리더니, 이내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섞여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렇습니까.”

부운화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대형이 그렇다면 그렇겠지요.”

“운화.”

장기린은 부운화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왕진은 죽일 만하면 죽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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