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43화 (272/686)

6권 18화

제19장 균자난청(菌子難淸) (12)

“올해를 끝으로……?”

그 순간 소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어째서?’였다.

입관식 때 설명 들은 바에 의하면 무산학관은 칠 년간의 교육을 다 받고, 마지막에 출관 시험을 통과해야 무산학관 출신이라는 걸 증명하는 증표를 준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걸 삼 년만 하고 나간다?

절반 가까이 하고 나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까운 일이다.

‘친구도 있을 텐데 아쉽지 않을까?’

얼마 전 아버지와 다퉜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소호는 떠나기 싫어서 생전 처음으로 떼까지 썼던 것이다.

“으음…….”

그런 소호의 시선을 느꼈던 것일까.

유준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대인께서 내게 주신 은(恩)이잖아? 그러니 불만은 없어.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러 가는 것일 뿐이야.”

소호는 유준의 담담한 모습에서 어째선지 약간의 슬픔과 외로운 듯한 거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소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미 두 사람의 길은 각자 갈라져 버렸는데.

‘나랑은 환경이 많이 다르구나.’

그저, 서로의 삶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었다.

“이제 다 왔다. 이곳이야.”

유준은 학관 중앙에 있는 넓은 연무장을 지나 동북쪽에 있는 전각으로 향했다.

북쪽의 현무방과 동쪽의 청룡방 사이.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무산학관의 학관장이 거주하는 ‘철왕루(鐵王樓)’가 나오는 방향이라 학생들은 잘 안 오는 지역이었다.

“여긴……?”

소호는 호기심을 느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낮은 담 너머로 훤히 드러난 전각 내부였다.

높이가 삼 척 정도밖에 안 되도록 담장이 낮아, 고개만 좀 위로 빼도 전각 주변의 마당이 보였다.

전각 자체는 정갈하고 고급스러웠다. 지붕에 얹은 기와에선 윤기가 흘렀고 목재 대들보는 땅바닥을 단단하게 움켜쥔 채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인상적인 건 창문인데, 전각의 창문이란 창문은 온통 다 활짝 열려 있으니 전각을 살펴보던 소호는 내부에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소호는 화들짝 놀란 심정을 감추기 위해 표정을 관리해야만 했다.

전각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창문과 담장을 넘어 소호에게로 몰려들었다.

“우릴 봤나 보네. 전각 안의 기운이 요동쳐.”

두 사람이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각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유준.”

“여러분, 별일 없었나요? 이렇게 ‘사신회(四神會)’가 모두 모이는 건 오랜만이네요. 잘들 지냈죠?”

백태가 낀 눈을 감아 버린 채 방긋 웃으며 인사하는 유준은 그야말로 다른 사람으로 보일 지경이다.

소호는 그의 극적인 변화에 화들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 버렸을 정도였다.

‘와! 완전 달라졌어. 이런 처세술도 있구나.’

소호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유준은 사교성이 좋고 밝은 사람처럼 보였다. 조금 전에 외롭고 쓸쓸해 보이던 모습은 이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

그에 반해 다른 사신회의 인물들은 유준을 그리 반기지 않는 것처럼 무뚝뚝한 분위기였다.

유준을 제외하고 사신회의 사람들은 세 명.

그 중에 특히나 소호를 빤히 바라보는 사람이 있어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아는 얼굴이 한 명 있었다.

‘아! 주작방 방장이다.’

눈에 띌 만큼 못생겨서 시선을 확 사로잡는 소년.

마치 공자(孔子)가 초상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추레한 외모를 지닌 주작방의 방장 곽도엽은, 황금 보료가 깔린 의자에 홀로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소호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턱을 세우며 코웃음 쳤다.

“흥. 결국 여기로 왔군.”

여전히 불쾌한 말투, 솔직한 것과 무례한 것의 구분이 없는 소년이었다.

소호는 인사를 할까 하다가 잠시 기다렸다. 우선 유준이 소호를 소개시켜 주는 것이 순서였다.

“아는 분도 계실 것 같은데……. 오늘은 제가 손님을 데리고 왔어요. 저희 백호방의 신입생인 장소호라는 친구입니다. 재능이 뛰어난 친구죠.”

유준은 소호의 등을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려 주었다.

소호는 앞으로 나서서 포권을 취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백호방의 장소호라고 합니다.”

허리를 굽힌 채 잠시 기다렸는데 대답이 없었다.

살짝 고개를 들어 보니, 세 명 중 단 한 사람만 마주 포권을 받아 주었다.

‘덩치가 큰 선배님만 포권을 받아 주시네.’

방석 위에 정갈한 자세로 꼿꼿이 앉아 있던 사람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고, 주작방의 곽도엽은 또 한 번 코웃음만 쳤다.

오직 한 명, 도저히 소년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덩치가 큰 사람만 소호에게 마주 포권을 취해주었다.

“나는 현무방의 이태산이다.”

“아……!”

“나를 아나?”

소호가 감탄을 내뱉자 이태산은 무뚝뚝한 얼굴로 되물었다.

“현무방 최강자라고 들었어요.”

“제대로 들었군.”

소호는 감탄했다.

당당한 말투가 전혀 어색하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소호는 다시 한 번 이태산을 찬찬히 바라봤다.

떡 벌어진 어깨에 키는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도 커 보이고, 한쪽 팔은 여성의 허리둘레만큼이나 굵어서 품이 넉넉한 고급무복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턱은 각졌고 콧대는 이름처럼 높았다. 피부가 깨끗해서 그나마 어려 보인달까.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뒤로 묶은 모습에서 그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강해 보여.’

소호는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무의 높낮이를 재보았다.

이태산은 강인한 육신을 지니고 있는데, 흔히 덩치 큰 사람들이 그러하듯 둔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신체의 비율은 적당했고, 근육은 탄탄하면서 유연해 보였다. 살짝 발뒤꿈치를 들고 있는 자세와 탄탄한 허벅지에서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는 야생동물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외공과 내공의 조화가 자유로운 것 같아. 무공은 어떤 걸 쓸까? 맨몸 권법? 아니면 곤 같은 두꺼운 막대기? 어떤 걸 잡든 능숙하게 소화할 것 같은데…….’

소호의 생각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이태산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눈빛이 반짝거리는군. 다 살펴봤나? 그럼 겨뤄 볼까?”

곧바로 소매를 걷어붙이는 모습이 말뿐이 아니라 진심으로 붙어 보려는 것 같았다.

날카롭게 번뜩이는 눈빛, 꽉 움켜쥔 주먹 아래 잘 단련된 전완근이 줄줄이 갈라지며 꿈틀거렸다.

“겨루는 것도 좋…….”

호연지기가 치솟은 소호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유준이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태산 방장, 소호는 처음으로 이곳에 왔는데 우선 다른 친구들하고 인사부터 하는 게 어떨까요?”

“흠.”

이태산은 소호를 대할 때와 유준을 대할 때의 태도가 판이하게 달랐다.

이태산은 무심한 눈빛으로 유준을 응시하다가 묵묵히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유준은 그저 웃는 낯이었다.

“소호, 저쪽에 앉아 있는 사람도 유명한 분이야. 청룡방의 최강자. 청룡검(靑龍劍) 태성천이라고 하면 학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 검술에 있어 최강을 논해.”

정갈한 자세로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던 소년.

나이는 십오 세쯤 되었을까. 푸른색 윤기가 흐르는 무복을 입었다. 길게 기른 머리를 뒤쪽으로 늘어뜨렸고, 적당한 체구에 팔다리는 길어서 늘씬하고 유려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는 유준의 소개가 탐탁지 않은 듯 하얗고 매끈한 얼굴에 눈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군.”

태성천은 앞으로 손을 뻗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부드럽게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래 봐야 정저지와. 학관 안에서의 이야기에 불과하니 최강은 과한 칭호다. 게다가…….”

태성천의 날카로운 눈빛이 유준을 노려봤다.

“불패검을 꺾지 못했는데 검술 최강이라니. 놀리는 말로밖에 안 들리는군.”

소호는 깜짝 놀라 유준을 바라봤다.

“오오!”

감탄을 토해 내자, 유준은 드물게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연이 닿지 않아 겨뤄 보지 못했을 뿐. 청룡검의 검술은 당해 내기 힘들지요.”

태성천은 무릎 위에 올려 두고 있던 검에 손을 얹었다.

“그럼 오늘 겨뤄 보는 건가.”

낮게 깔린 목소리.

잘 갈린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로운 예기가 태성천을 중심으로 뿜어졌다.

사아악―.

마치 칼로 종이를 벤 것처럼 공기가 갈라진다.

쿵.

유준은 짧게 발을 한 번 구른 뒤 웃는 얼굴로 양손을 내저었다.

날카로운 기세가 유준의 손짓에 흩어졌다.

“다들 오늘 왜 이러시죠? 평소보다 성격이 급한데.”

유준은 난감해하면서도 절대로 맞부딪치지 않았다.

다음번에 기회가 있을 거란 이야기로 태성천을 달랜 유준은 마침내 곽도엽의 차례에 도달했다.

소호는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있는 곽도엽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지난번에도 숨겨진 실력이 있다는 걸 느끼긴 했었지만, 앞선 두 사람을 만나고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다른 분들처럼 강한가……?”

소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준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칼날처럼 날카롭던 태성천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 자식이……!”

한편 곽도엽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멍하니 있다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뒤쪽에선 이태산이 감탄한 듯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면전에서 첫마디가 그건가. 의외로 호걸이군.”

“편들어 주지 마라, 현무방장.”

“뭐 어떤가. 솔직한 사내 중에 나쁜 사내는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태산과 곽도엽은 서로 성격이 안 맞는 듯 보였다.

곽도엽은 투덜거리면서 황금보료에서 자세를 바꾸더니 대뜸 소리쳤다.

“나는 마음에 안 든다. 이 녀석, ‘그분’의 인정을 받긴 한 건가?”

“물론.”

유준은 단칼에 대답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여기로 데려올 리가 없지요.”

소호는 의아해져서 되물었다.

“인정이요?”

“이것 말이다.”

가장 먼저 꺼낸 것은 이태산이었다.

이태산에 이어 태성천, 곽도엽, 그리고 유준까지 모두 품 안에 손을 넣어 목에 걸고 있던 것을 꺼냈다.

“어? 그거……!”

소호는 눈을 크게 떴다.

각각 주변 장식은 좀 다르지만, 분명히 본 적이 있는 호안석을 모두가 꺼내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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