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19화
제19장 균자난청(菌子難淸) (13)
소호는 황급히 양손으로 품 안을 더듬거렸다.
왕진이 줬던 비단 주머니를 품 안에 넣어 놨던 것 같긴 한데, 실제로 품 안에 잘 있는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아! 있다!’
다행히도 부드러운 비단 재질의 주머니가 품 안에 그대로 있었다.
곧바로 꺼내 보니 백색 비단에 금사로 호랑이 문양이 새겨진 모습이 받았을 때 그대로였다.
소호가 그 안에서 목걸이를 꺼내 들자 곽도엽이 쳇― 하고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진짜 받았군.”
이태산이 성큼 다가와 목걸이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은판에 호안.”
소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소호의 중지만 한 길이, 섬세한 세공으로 기묘한 문양을 새겨 놓은 은판 가운데에 세로로 검은색 줄이 새겨진 호안석이 반짝 빛을 발했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아! 그러고 보니, 왕진이라는 분, 나한테만 준 줄 알았는데 저분들한테도 하나씩 다 준 거네?’
소호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호승심? 섭섭함?
약간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나만 혼자 특별한 게 아니었다고 하니 묘한 승부욕이 생겼다.
‘게다가 유준 선배도 갖고 있었다니.’
소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유준을 쳐다봤다.
자기도 받았으면 받았다고 할 것이지. 왜 말을 해 주지 않아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냔 말이다.
“진품이군. ‘집혼기’가 맞다.”
이태산의 목소리는 판관처럼 단호하고 준엄했다.
“집혼기……요?”
이태산이 물끄러미 소호를 응시했다.
“받을 때 듣지 못한 건가?”
“친분의 증표 같은 거라고만 들었어요.”
“그랬군. 틀린 말은 아니다만.”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긴 이태산은 마치 거대한 사천왕상 같았다.
“집혼기란……. 이곳 무산학관에서 그분이 인정한 ‘재능’이자 ‘무력’이다. 거기에 주술적인 힘이 있어서 갖고만 있어도 소유자를 강하게 해 준다더군. 아직 그 진위 여부는 모르겠지만……. 목에 매고 있을 때 기(氣)가 모이는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낀 적은 있다.”
항상 진중하고 규율을 따지는 성품답게 딱딱한 말투였다.
소호는 호안석 목걸이, 집혼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게 그렇게나 대단한 것이란 말인가?
보고 있으면 느낌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게나 신묘한 물건인지는 감이 오질 않았다.
“흥. 이태산, 아는 척하며 나선 것은 좋으나 제대로 알지를 못하는구나. 힘이 모이는 건 진짜다. 의심할 필요 없다.”
“곽도엽, 어떻게 확신하나?”
“왜긴, 겪어 봤으니 아는 거지. 기가 모이는 정도가 아니라, 몸에 지니고 계속 단련하면 네 힘을 몇 배나 강하게 해 줄 수 있는 신물이 집혼기다. 천고의 신물이 하사되었으니 영광으로 생각해야 마땅하다. 효능을 의심하다니. 언어도단.”
곽도엽은 여전히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있었으나 똑바로 치켜 뜬 눈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이태산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놀랍다. 도의와 충성심이라니. 너답지 않군.”
“흥, 나다운 게 뭐냐.”
“계산이 빠르고,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영악함. 의리와 충심마저 가격을 매기는 황금충(黃金蟲).”
“칭찬 고맙군.”
곽도엽은 이태산의 독설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냈다.
독설을 한 이태산도 그걸로 상처받을 거라 생각 안 했는지 태연한 얼굴이니, 참으로 기묘한 관계의 두 사람이었다.
“그래서, 집혼기로 어떻게 단련한다고?”
“하! 밥을 꼭 입안에 떠먹여 줘야 먹나? 알아서 찾아보도록 해. 항상 목에 매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답을 찾겠지.”
“그런가. 성정이 삐뚤어진 네가 그 정도로 말한다면 강해지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진실이겠지. 믿어 보겠다.”
“……누가 성정이 삐뚤어져? 학관에서 대장 놀이를 하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군.”
이태산과 곽도엽이 으르렁거리는 사이, 이번엔 태성천이 입을 열었다.
정갈한 자세로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유준과 소호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불패검, 이상하군. 이해가 가질 않는다.”
“무엇이 이상하죠?”
“무산학관에는 네 개의 기숙사가 있지. 그리고 그분은 각 기숙사당 한 명의 인재를 뽑았다. 그래서 나는 집혼기가 각 기숙사의 최강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한 명이 더 나타났다. 어째서인가?”
태성천의 말은 앙숙처럼 으르렁거리던 이태산과 곽도엽의 다툼을 멈추게 만들었다.
“맞는 말이군.”
“사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건 전혀 생각도 못하긴 했지.”
“네 개의 기숙사, 네 개의 집혼기. 이 균형을 깨면서 나타난 게 소호인가.”
모두의 시선이 소호와 유준에게로 향했다.
소호로서는 아는 게 없으니 대답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유준을 보니 그는 미리 예상한 일인 듯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탁.
유준은 지팡이를 짚으며 앞으로 나섰다.
백태가 낀 눈으로 모두를 쭉 둘러본 뒤 잠시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나는…… 올해를 끝으로 무산학관에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소호를 데려온 것은 그런 이유도 있어요. 소호가 나의 빈자리를 채울 겁니다.”
유준의 발언이 가져온 파장은 컸다.
이태산, 태성천, 곽도엽.
세 사람 모두 깜짝 놀라 동요하는 얼굴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뭣……?”
“불패검이 학관을 나가?”
“이유가 뭐냐?”
유준은 고개를 저었다.
“다들 아는 이유입니다. 나라를 위해 일해야지요.”
“…….”
사신회의 사람들은 모두 동년배로서 유준과 학관 생활을 몇 년이나 함께 해 온 소년들이었다.
그 시간 동안에는 싸움도 있고 즐거운 일도 있었을 것이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들, 모두가 느끼는 감회는 소호가 느꼈던 감정과는 또 달랐다.
“부름을 받은 건가?”
“예.”
“흐음……”
그들은 복잡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안색이 몇 번이나 변했다.
“그런가.”
“그 나이에, 우리 중에 최초로 부름을 받는 것인가.”
“부럽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 삐뚤어진 곽도엽마저 유준을 향해 아쉬운 눈길을 보냈다.
“허나 아직 공부가 끝나기도 전에 부르다니. 그 정도로 일손이 부족한 건가?”
“불패검이 특출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흥, 어찌됐든 우리와는 다른 길을 걷겠군. 학관에서 나가면 다신 못 보는 건 아닌가?”
유준은 고개를 저었다.
“대의를 위해 함께 일하는데언젠가는 보겠지요. 그리고 자꾸 보낼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아직은 안 갑니다. 올해 말, 그러니까 ‘무산제전’은 마치고 갈 거라고요.”
잔잔한 애수가 감돌던 분위기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입을 다무는 곽도엽.
딱딱하게 굳어지는 이태산.
서릿발처럼 차가운 기세를 내뿜는 태성천.
“그런 것이었군.”
태성천은 처음으로 얼굴에 미소를 띄었다.
“너는 이곳에 선전포고를 하러 온 것이구나.”
확신을 띈 태성천의 목소리에 유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낯으로 답해 주었다.
“네. 맞습니다. 역시 청룡검만이 내 뜻을 알아주네요.”
탁.
유준은 지팡이를 강하게 짚으며 웃는 얼굴로 선언했다.
“제게 주어진 마지막 무산제전입니다. 무룡전이든 군룡전이든. 올해는 봐주지 않을 겁니다. 아시겠죠?”
유준은 태연한 목소리로 말하며 의뭉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올, 해, 는?”
“봐주지 않을 겁니다?”
처음엔 분노하여 날카롭게 노려보던 세 사람이었으나 이내 호승심을 자극받은 듯 위험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좋다. 올해 현무방은 전력을 다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겠군. 작년의 두 배로.”
이태산은 현무방 아이들이 들으면 까무러칠 말을 내뱉었다.
“나도 미리 말해 두겠다. 마지막 무산제전이니 뭐니, 배려는 기대하지 마라. 올해 무룡전 우승은 포기하는 게 좋을 터.”
심상치 않은 기세를 내뿜으며 자신의 검을 쓰다듬는 태성천.
“유치하군. 하지만 오만함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유준.”
곽도엽도 태연한 척하지만 말속에 뼈가 있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후후후.”
유준은 나직하게 웃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포권을 취하는 모습이 정중했다.
“잘 부탁합니다. 이번 무산제전은 즐겁겠네요.”
***
사신회의 건물에서 나오니 어느새 해가 지려는 듯 하늘이 어둑해져 있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은 한적했다.
가끔 지나치는 학생들 모두 유준을 알아보는 것 같았지만 다가와서 인사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호, 사신회 사람들은 어땠지?”
무심한 듯 담담한 목소리.
사신회에서와 달리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유준이 나직하게 물었다.
“다들 특이하네요.”
“특이하긴 하지.”
“강하기도 하고요. 주작방 방장은 잘 모르겠지만.”
“그 사람의 강함은 좀 다른 방식이라서. 신법과 암기술에 있어서는 학관 최고라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소호는 그 말을 들으니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아! 그쪽이었구나.”
“뭔가 느꼈었던 건가?”
“뭐랄까. 겨뤄서 맞부딪쳐 싸우면 이길 것 같은데……. 내가 먼저 잡으려고 하면 안 잡힌달까, 머릿속으로 상상이 안 될달까. 그랬거든요.”
소호는 여전히 설명을 잘 못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지리멸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유준은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기세 싸움에서 상대방의 행동은 어느 정도 파악이 되니까. 거기다 거리 싸움으론 곽도엽에게 승기를 잡기가 힘들지. 맞부딪치지 않고 거리를 벌릴 준비부터 하고 있는 사람이거든.”
“맞아요. 신법이 뛰어나다고 들으니 이해가 되네요.”
“다른 사람들은?”
“이태산 방장과 태성천 선배는…… 강하네요. 유준 선배처럼.”
“그래. 강한 사람들이야.”
“그래도 유준 선배가 생사결로 싸우면 이기잖아요?”
“…….”
유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소호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태산과 태성천은 강하다.
소호가 지금 전력으로 싸우더라도 이기기 힘들 만큼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유준에게는 그들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난번 대련에서 소호가 느꼈던 그것.
마치 아버지에게서 느꼈던 것 같은, 압도적이고 깊은 경험이 담긴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불패검이라니.
누가 지은 건지 딱 맞는 별호였다.
“나는…… 검이다. 네 아버지의 말이 맞아. 누군가의 검이지. 그리고 그걸 후회하진 않아. 우리에게 많은 일이 있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의미가 없어. 그러니 왕 대인이나 사신회에 대해서는…… 네가 직접 보고 스스로 판단해.”
“그래서 사신회에 데려간 거예요? 직접 보고 판단하라고?”
“그것도 있고. 내가 없으면…… 백호방은 네가 지켜야 하니까.”
그 어떤 것에도 깊이 얽매이지 않는 듯한 분위기가 있는 유준이었으나, 백호방에 대한 미련은 있는 것일까.
소호는 유준도 떠나는 걸 아쉬워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감사하긴 한데, 저는 고작 신입생이에요. 철웅 선배님도 있잖아요?”
“철웅은 강하지만, 그래도 안 돼. 학관 안에서 저들의 수준에는 도달할 수 없다.”
유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소호.”
“네.”
“왕 대인이 전해 달라고 했다. 균자난청(菌子難淸)이라고.”
“엥?”
균자(버섯)는 깨끗이 하기가 힘이 든다?
소호는 뜬금없는 말에 깜짝 놀랐다가, 이내 그 의미를 이해하고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분이 제가 벌칙으로 청소하는 걸 알았어요?”
“그분은 모르는 게 없으시지. 계속 지켜보며 기다리겠다는 뜻일 거다.”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
“그만큼 기대한다는 뜻일 거다. 그리고…… 무림이라는 땅에서 균자는 아무리 치워도 다시 돋아나니, 깨끗이 하는 데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으음…….”
“나는 말을 전했을 뿐. 아까 말했듯이 판단은 네가 직접 해.”
유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무산제전에는 최강자를 가리는 대련이 있지. 그게 무룡전이다. 그 무룡전의 결승에서 나는 소호 너와 만나고 싶다.”
“저를……요?”
“그게 무산학관과 너에 대한…… 내 나름의 결말이야. 약속할 수 있겠나?”
유준은 깊은 눈빛으로 소호를 응시했다.
소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내아이이자, 장래의 무림 영웅으로서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약속할게요.”
“그래. 그럼 됐어.”
묵묵히 다시 걸음을 옮기는 유준의 뒷모습에선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소호는 유준의 뒤를 묵묵히 걸어갔다.
그날 기숙사까지의 거리는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