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20화
제20장 선자불래(善子不來) (1)
“나 무룡전 결승에 진출해야 해. 그렇게 약속했어.”
소호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마치 다음 날 마을 옆의 강가에 같이 놀러가기로 약속했다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듣는 쪽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청소 중이던 모두가 손에 들고 있던 청소 도구들을 떨어뜨렸다.
조서인, 윤지관, 마희희.
모두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니 소호를 바라봤다.
“어…… 소호야. 그게, 너는 분명 대단하지만……. 무룡전 결승은 좀 힘들지 않을까?”
“어어……. 응원할게. 응원하긴 할 건데…….”
조서인과 윤지관은 당황하면서 우려를 표했고, 마희희는 눈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야. 너 무룡전이 뭔지는 알지?”
소호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알아. 다들 모여서 누가 강한지 대련해 보는 거잖아.”
“그래, 맞아. 일대일 대결을 반복해서 누가 진짜 최강자인지 가리는 대회. 기숙사 대 기숙사로 대결하는 건 군룡전이고. 아무튼, 중요한 건 무산제전 때는 선배들도 다 참가한다는 거야! 대회는 신입생이랑 선배들이랑 나눠져 있지 않다고!”
손가락으로 척― 하니 소호를 가리키는 마희희는 마치 준엄한 판관 같았다.
소호는 이해를 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마희희는 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진지하게 외치는 걸까?
“어…… 그런데?”
“으으.”
마희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갑자기 소호의 옆에 있는 섭주해와 대미미에게로 불똥이 튀었다.
“야! 너네가 잘 설명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얘는 전혀 모르고 있잖아!”
섭주해는 차분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마 소저, 소호 형은 다 알고 있습니다.”
“뭐어?”
“무룡전에 우리 백호방의 선배들도 다 참가한다는 거나, 그들 모두, 그러니까 현무, 청룡, 주작방의 최강자들도 다 참가해서 힘을 겨루는 곳이라는 걸 다 알지만 그래도 큰 결심을 하고 말하는 겁니다, 소호 형은.”
소호는 아차! 하는 얼굴로 섭주해를 바라봤다.
“백호방 다른 선배들은 생각을 못했어!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할까?”
“괜찮습니다. 어차피 대회에선 정당하게 실력을 겨룰 뿐이니까요.”
“그렇네. 결과는 똑같구나.”
“그래도 나중에 기회가 될 때 미리 말해 두는 게 좋겠지요. 선배들도 소호 형이 참가한다는 건 알아야 하니까요.”
“응. 그래야겠어.”
소호와 섭주해의 대화를 보면서 마희희는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그러는 거면 더 심각하잖아…….”
마희희는 구원을 청하듯 이번엔 대미미를 쳐다봤지만 이내 포기해야만 했다.
“오라버니는 해낼 수 있을 거야!”
“……어련하겠니.”
마희희는 통통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다 알고 있다면……. 그래, 도전하는 건 좋아. 거기에 내가 뭐라고 하겠어. 좋은데……. 그래도 약속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잖아? 만약 잘못되면 다른 학생들이 이래저래 안 좋은 말로 떠들 거야.”
“맞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꼭 이렇게 급하게 해야 하니? 신입생 때는 선배들이 하는 걸 보면서 박수만 쳐 줘도 되는 거잖아. 이렇게까지 급해야 할 이유가 있어?”
“응. 이유가 있어.”
“…….”
“나도 오래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야. 그래도 걱정해 줘서 고마워, 희희야.”
소호가 배시시 웃으니, 마희희는 난감한 얼굴로 획하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감자로 곰팡이들을 박박 긁어냈다. 분노의 감자질이었다.
소호는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마희희도 다 걱정을 해서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애초에 관심이 없는 대상이라면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고, 진구 삼촌이 예전에 말을 해 줬었다.
“소호 형.”
“응?”
“청소 끝나고 우리 잠시 이야기 좀 할까요?”
소호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고 주변 아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다시 청소를 재개한 아이들의 표정은 복잡 미묘했다. 특히 조서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져 있었다.
청소가 끝난 후에 소호의 주변에 모인 것은 섭주해와 대미미, 두 사람뿐이었다. 이번엔 조서인도 볼일이 있다면서 먼저 기숙사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은자촌 출신의 세 사람만 다시 뭉친 것이었다.
“소호 형, 저희한테 좀 더 해 줄 말이 있죠?”
“맞아. 사실 아까…… 사신회라는 곳을 갔어.”
“사신회?”
소호는 섭주해와 대미미에게 좀 전에 있었던 일들을 쭉 말해 주었다.
현무방과 청룡방 사이의 길목에 사신회의 전각이 있는데 거기서 만난 세 사람이 ‘그분’에게 인정받은 각 기숙사의 최강자였다는 걸 말해 주었다. 유준과 이태산, 태성천, 곽도엽이 각각 왕진이 설명한 ‘집혼기’라는 걸 하나씩 갖고 있었다는 점을 말했을 때 섭주해가 의심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집혼기?”
“이거야.”
품에서 꺼내 섭주해에게 보여 주니 섭주해의 눈에서 푸른 귀화가 번뜩였다.
웅웅―.
섭주해의 허리춤에서 뭔가가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음.”
섭주해는 전에 없이 신중한 얼굴로 집혼기를 응시하다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파짓―.
“윽.”
소호는 깜짝 놀라서 집혼기를 뒤로 뺐다.
집혼기에 손이 닿으려는 순간, 섭주해가 뭔가에 깜짝 놀란 것처럼 황급히 손을 뗀 것이다.
“검혼이 격렬하게 싫어하네요.”
“검혼이?”
소호는 자연스레 시선이 섭주해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섭주해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주술용 단검을 항상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검(劍)의 혼(魂)이라고 하여 검혼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손도 대지 않고 검을 움직일 수 있게 해 주는 섭주해의 힘의 원천이었다.
“소호 형, 제가 그동안 많은 경험이 있어서 주술 쪽에 조금 지식이 있어요. 그런데 이건…… 보통 물건이 아니에요. 재료가 비싼 건 둘째치고, 당대 최고의 주술사들이 모여 몇 년이나 고민한 듯한 물건이에요.”
“어…… 그 정도야?”
“네. 신물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놀랍네요. 소호 형이 이런 걸 갖고 있었다니. 왜 지금까지 몰랐지?”
섭주해는 소호에게 집혼기를 들고 있어 달라고 부탁한 뒤 사방에서 유심히 살폈다.
“은판에 새겨진 술식을 보면 술사들이 쓰는 강령(降靈)과 비슷한데, 놓인 방식을 보면 술진의 기본은 강신(强身)……. 그야말로 영웅을 만드는 물건이네요. 희한해요. 신기합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섭주해는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집혼기를 샅샅이 훑은 뒤 일각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집혼기라……. 잘 어울리는 명칭이에요. 말하자면 혼을 집약시켜 용의 내단(內丹) 같은 귀물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좀 더 살펴봐야겠지만……. 주인에게 해로운 형태는 아니에요. 주인을 영웅으로 만드는 신기이자 신물. 분명히 소호 형한테 도움이 되는 물건은 맞습니다. 천도에 맞는가는 다른 문제긴 한데…….”
섭주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한편, 소호는 섭주해에게 그 정도로 고평가를 들은 물건이라는 걸 알게 되니 집혼기가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으음……. 그렇게 귀한 물건이라니 좀 부담스러운데.”
“바로 그 점이 저는 의아해요.”
소호에게 진심으로 쓴 소리를 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 섭주해다.
세 사람만 있기 때문일까.
섭주해는 드물게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호를 지그시 응시하며 물었다.
“소호 형은 왕진이라는 자에게 왜 이걸 순순히 받았나요? 어째서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갖고 있었죠?”
“어, 그게…….”
소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배시시 웃었다.
“호의로 주는 거라서……?”
“그건 올바른 답이 아니에요, 소호 형.”
섭주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미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오라버니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걸 거야.”
“고마워, 미미야.”
소호와 대미미가 서로를 보며 배시시 웃는다.
섭주해는 진지한 얼굴로 소호를 응시했다.
“저는 소호 형의 순수한 성품과 매력, 그리고 하늘이 돕는 듯한 천운을 존경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악의는 그림자와 같아서 가장 밝은 곳 뒤에 숨어 있는 법입니다. 사람을 순순히 믿지 마세요, 소호 형.”
“으음……. 그런가?”
“애초에 왕진이라는 자는, 남궁 삼촌을 다치게 하고 은자촌을 사건에 휘말리게 한 장본인이 아닙니까.”
섭주해의 말투가 차가웠다. 왕진에게 분노했으며 그를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전해졌다.
“맞아. 이상한 사람이지?”
“이상하다는 걸 훨씬 넘어섰죠.”
“그런데 직접 만나 보니까 달라. 그 사람은 우릴 보고 있지 않았어.”
“네?”
소호는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예를 들어서 말이야. 주해야. 코끼리가 태산을 향해 오르다가, 밟을 곳이 없어서 엎드려 있던 황소를 밟고 올라갔어. 그럼 황소한테는 코끼리가 불구대천의 원수일까?”
“……네?”
“어, 음. 그러니까. 코끼리는 황소가 미워서 때리고 죽이려고 밟은 건 아니잖아? 그냥 태산을 오르다 보니 밟을 곳이 없어서 밟은 거잖아? 그건 황소가 화를 낼 만한 일이긴 하지만……. 원수는 아니잖아?”
소호는 여전히 지리멸렬하여 설명을 잘 못했으나, 섭주해는 귀군사라고 불렸던 섭우생의 피를 이은 두뇌파의 책사였다.
소년은 소호의 말을 곧바로 알아듣고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왕진에게 화는 났었지만 불구대천의 원수는 아니라는 이야기입니까, 소호 형?”
“응. 맞아! 난 그렇게 느꼈어. 게다가 남궁 삼촌도 대련 중에 다쳤던 거라고 하고……. 왕 태감이 영약을 보내서 이젠 회복되셨대.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결론적으로 희생자가 없으니 그렇게까지 미워할 필요는 없지 않냐는 말이군요.”
“응. 맞아.”
“그래서 왕진이 사과 겸 소호 형의 능력을 인정하며 호의를 베푸니 순순히 받은 거고요?”
“응! 그거야.”
“유준 선배도…… 미워할 수가 없겠군요?”
“아직 어색하긴 한데, 이상하게 미워할 수는 없어. 올해를 마지막으로 왕 태감의 일을 도우러 가야 한다고 하고……. 뭔가 안된 면이 있어.”
“그렇군요. 소호 형은 그렇게 느끼겠네요.”
소호는 빙긋 웃었다.
역시 섭주해는 소호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동생이었다.
헌데 섭주해의 표정이 이상했다.
전에 없이 심각한 얼굴, 복잡한 내심이 드러나는 얼굴로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그릇이 크다는 건…… 위험한 것이었군요.”
섭주해는 나직하게 중얼거린 뒤, 소호에게 다가와 양손을 꼭 붙잡았다.
“소호 형.”
“응?”
“지금처럼 태양처럼 밝은 모습으로 있어 주세요. 하지만 약한 자의 아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재능 없는 자에 공감하고, 소인배라 불릴지라도 내 가족을 위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도 해 주세요.”
“어……?”
“주변의 따라가기 힘든 사람들의 관리는 제가 할게요. 그저 강해지고, 앞으로 나아가 주세요.”
내가 당신의 부족한 점을 채우는 버팀목이 된다.
섭주해의 그런 의지가 담긴 얼굴을 보며, 소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믿을게, 주해야.”
***
등불로 환하게 밝혀진 수련실.
나무로 만들어진 수련용 목창이 강렬한 기세를 흩뿌렸다.
전후좌우.
사방을 점하며 뻗어 나가던 목창이 황급히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아무도 없어야 할 수련실에 한 사람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주해?”
온몸에 땀을 흘리며 창을 휘두르던 소년, 조서인이 의외의 방문자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서인.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병약한 인상의 소년, 섭주해가 조서인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