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46화 (275/686)

6권 21화

제20장 선자불래(善子不來) (2)

“어, 음……. 그래? 그랬구나.”

조서인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당황한 듯 굳은 표정, 우물쭈물 어색한 모습이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섭주해가 싫다기보다는 갑자기 찾아오니 어떻게 대해야 할 지 감을 못 잡는 것 같았다.

섭주해는 살며시 웃은 뒤 수련실의 구석으로 가서 정갈한 자세로 바닥에 앉았다.

“서인, 수련을 방해해서 미안해요.”

“아냐, 괜찮아. 안 그래도 마음이 심란해서 끝내려고 하고 있었어.”

조서인은 허둥대며 들고 있던 창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서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적이 없더라구요. 한 번쯤 이야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아서 찾아왔어요.”

“아…… 그랬구나.”

조서인은 순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고 보니 둘이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네. 잠시만 기다려 줘.”

조서인은 마른 헝겊으로 얼굴과 목덜미의 땀을 닦아 냈다.

육신은 지쳐 보이지만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또렷해 보였다.

본래 격렬한 자기수양 뒤에는 현인(賢人)이 된 것 같은 명경지수의 마음이 생기는 법이었다.

섭주해는 자신이 적당한 시점에 잘 찾아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서인. 물어볼게 있어요.”

“으응.”

“서인은 소호 형을 미워한 적이 있나요?”

“……!”

갑작스러운 질문이 너무 공격적인 탓이었을까.

조서인은 목이 졸린 오리 같은 얼굴로 굳어 버렸다.

“그, 뭐, 어어?”

조서인은 희한한 소리를 내뱉으며 당황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주해야. 소호는 나한테 가장 친한 친구야.”

“네. 그렇지요. 하지만 친구인데 밉지는 않았나요?”

“……아냐.”

“단 한 번도요?”

“섭주해.”

조서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무슨 말이 하고 싶어? 내가 가장 친한 친구를 욕하는 말이 듣고 싶은 거야?”

“욕을 하고 싶지는 않은가요?”

“당연하지! 소호 욕을 하는 사람은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좀 전의 순박하게 웃으며 우물쭈물하던 소년은 어디로 간 것일까.

크게 화나 숨을 씩씩거리고 있는 다혈질의 소년만 한 명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섭주해는 빙긋 웃었다.

“소호 형은…… 천진난만하죠. 좋든 나쁘든, 일단 자신의 눈에 띈 곳에는 성큼 발을 들여놓아야 직성이 풀려요. 서인의 가정사나 무공 문제에 발을 들여놓았던 일도 그런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순수한 호의지만 거침이 없죠.”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섭주해의 목소리는 조서인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큰 재능이 있어서…… 재능이 없는 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머리로는 이해하는 듯하지만, 무의식중에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이 나와요. 소호 형의 동생으로서 말하자면, 그런 행동은 적을 만듭니다.”

섭주해는 조서인을 지그시 응시했다.

조서인은 아직 흥분이 채 가라앉지 못한 얼굴로, 하지만 진지하게 섭주해의 말을 곱씹어 보고 있었다.

“아까 마음이 심란하다고 했지요. 혹시 그건 소호 형이 무룡전에 참가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 아닌가요?”

“…….”

조서인은 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앙다문 입술, 흔들리는 눈빛이 그의 내심을 증명했다.

“서인. 저랑 같이 잠깐 산책을 좀 할까요?”

“어? ……어어?”

조서인은 당황하였지만 섭주해가 진지하다는 것을 깨닫고 순순히 따라나서 주었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두운 시각, 두 사람은 수련실 밖으로 함께 빠져나갔다.

***

소호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눈부시게 내리쬐던 햇살, 사방에서 뜨겁게 쏟아지던 사람들의 시선.

그 속에서 대치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무신과도 같았다.

한낱 사람이 감히 거대한 자연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의 존재감은 소호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숨은 헐떡이듯 거칠어졌고, 이를 너무 악물어서 비릿한 쇠 맛도 느껴졌다.

한 자루의 목창을 들고 평범한 자세로 서 있을 뿐이었는데도 아버지는 지금껏 만나 본 어떠한 무인과도 달랐다.

거기에 살기까지 뿜어내니 어떠했던가.

소호는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 순간 죽음을 경험했었다.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알알이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듯한 그 기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챠핫!”

소호는 기합성을 내지르며 단전에서 역근경 진기를 끌어 올렸다.

따뜻하고 청명한 진기가 임맥과 독맥으로 치솟으며 심상을 가라앉혀 주었다.

마음이 가라앉고, 평온한 호연지기가 샘솟았다.

지금이라면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아버지의 심기상인(心氣傷人)을 버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윽―.

소호는 움찔하며 몸을 비틀었다.

상상 속 아버지가 어깨를 살짝 뒤로 빼고 있었다.

곧바로 찌르기가 온다.

섬전과도 같은 찌르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공간을 가르는 막강한 첨격(尖擊)!

파라락―.

소호의 소맷자락이 흔들리며 바람 소리를 냈다.

묵신 할아버지의 신법을 사용해 피해 보려 했지만, 아버지의 두 눈은 아지랑이 같은 움직임에 현혹되지 않고 여전히 소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호는 황급히 검을 들어 좌상단 공격을 막아 보았다.

창이 날아온다.

실패다.

검이 박살 나면서 어깨를 얻어맞았다.

“윽!”

소호는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상상일 뿐인데도 실제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힘은 막강했다.

어깨를 얻어맞았다면 상체의 절반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했다.

“치사해. 한 방 맞으면 끝이라니. 왜 이렇게 강한 거야, 아버지.”

소호는 부루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두 눈은 여전히 승부욕에 불타고 있다.

소호는 상상을 계속했다.

이번엔 무기를 바꿔 보았다.

얼마 전에 태산박과 싸울 때 사용해 보았던 외날의 칼이다.

두껍고 묵직한 대도는 그날 사용해 보니 소호의 취향에 꽤나 잘 들어맞는 무기였다.

“챠합!”

다시 한 번 도전을 계속했다.

소호의 상상 속에 있는 아버지는 그 어떤 무기가 상대라도 절대 당황하는 법이 없다.

거리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빠르게 다가가 보았다.

퍽, 하고 창의 손잡이로 얻어맞고 대도가 튕겨져 나왔다.

재빨리 자세를 잡고 방어를 준비했다.

아니나 다를까, 손잡이로 칼을 쳐 내자마자 머리 위에서 벼락같은 참격이 떨어졌다.

소호는 양손으로 대도를 꽉 붙들고 태극권의 묘리를 살려 참격을 비스듬히 옆으로 흘려냈다.

흘러내린 여력만으로도 바닥이 박살 나는 모습이 생생하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땅을 울리는 진동.

쿵, 하고 강하게 내딛는 진각.

아버지가 몸을 반 바퀴 돌리는 것과 동시에 번쩍, 섬전 같은 찌르기가 소호의 가슴을 노렸다.

“흡!”

소호는 몸을 비틀며 대도로 창을 쳐 내려 하지만, 힘이 부족했다.

창은 천년 거암처럼 묵직하여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호의 몸이 실제로 퍽, 하고 얻어맞은 것처럼 뒤로 튕겨져 나가서 바닥을 굴렀다.

소호는 데굴데굴 구르다가 바닥에 대자로 뻗어 버렸다.

“으아.”

소호는 손으로 더듬더듬 가슴을 매만져 보았다.

몸은 무사했다.

실제였다면 가슴이 뻥 뚫려 있을 것이다.

“후우, 치사하다! 아버지!”

소호는 짜증이 나서 분을 참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어찌 이리도 강하단 말인가.

도대체 승리를 할 수 있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질 않았다.

거대한 성채를 눈앞에 둔 장수처럼 답답하고 막막했다.

“그래도 한 번 막아 내긴 했는데…….”

소호는 다시 먼지를 털고 일어섰다.

양손과 양발에 찬 묵철(默鐵)로 만든 수련용 철갑이 무겁게 느껴졌다.

지난번 싸움에서 힘의 부족을 느낀 후, 철웅처럼 외공을 단련하기 위해 마련한 수련용 도구였다.

“으랴랴.”

소호는 애써 힘을 내며 흘러내리는 땀을 소매로 닦아 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은자촌의 작은 호랑이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를 뛰어넘기 위해 달려들었다.

***

“치열하다……!”

소호가 수련하는 모습을 본 조서인은 큰 충격을 받은 듯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싸우다가 땀과 먼지투성이가 되어 바닥을 구르는 모습은…… 마치 실제 목숨이 걸린 싸움처럼 절박한 느낌마저 들었던 것이다.

심지어 소호는 양손, 양발에 두터운 쇳덩이를 차고 있었다.

야밤에 혼자 하는 수련치고는 강도가 너무 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소호가 너무 실감나게 대련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조서인의 눈엔 상대방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풍운 노사……?”

눈을 가늘게 뜨고 응시하던 조서인의 입에서 정답이 흘러나왔다.

“역시, 서인은 눈에 보이나 보네요.”

“소호는 풍운 노사를 이기고 싶은 걸까?”

“네. 소호 형의 가장 큰 목표죠.”

조서인은 복잡한 감정이 섞인 묘한 표정이 되었다.

“주해는…… 소호가 수련하는 모습을 나한테 보여 주고 싶었던 거야?”

“네. 맞아요.”

섭주해는 담담하게 수긍했다.

“소호 형은…… 서인을 보면서 나에게는 없는 걸 가진 친구라고 표현했어요.”

조서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소호에게 없는 게 있다고?”

“네.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그럴 리가. 모르겠어……. 무슨 뜻일까?”

“무공에 대한 열정. 어떠한 수련도 견뎌 낼 수 있는 끝없는 인내심.”

“그건…….”

조서인은 입을 달싹거리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꾹 다물었다.

“저 모습을 보니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죠?”

“맞아. 나는…….”

“그런데 말이죠. 사실 중요한 건 소호 형도 저렇게 수련을 한다는 거예요.”

“어……?”

“타고난 천재라서 강한 게 아니에요. 소호 형은 늘 저렇게 목표를 잡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어요. 목표가 너무 멀긴 하지만. 예전에 산속 마을에서 함께 살 때도 늘 저렇게 안 보이는 곳에서 노력을 했죠.”

담담한 섭주해의 말에 조서인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가……. 똑같다는 거구나.”

“네. 서인에게 물을게요. 무공이란 건 재능만 있으면 거저 얻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나요?”

“아니.”

조서인은 곧바로 답했다.

“고련 끝에 몸에 새겨지고 익혀지는 게 무공이야. 난 그렇게 믿어.”

“네. 맞아요. 재능이 있고 무공을 보는 눈이 뛰어나다고 해서 다 고수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죠.”

“맞아. 그렇네.”

“소호 형도, 서인도. 둘 다 무(武)에 재질이 있는 사람들이지요. 저와는 달라요.”

조서인은 깜짝 놀라며 섭주해를 바라봤다.

“너…….”

“저는 지략적으로 소호 형을 도울 거예요. 하지만 무공의 영역에서 함께 겨루며, 등을 맡기고 싸우고, 성장할 수 있는 건…… 제가 아니죠. 당신입니다, 서인.”

조서인은 우둔하지 않았다.

섭주해의 말뜻을 알아들었으며, 짧은 말 속에 담겨 있는 진한 안타까움도 알아챘다.

“그렇구나……. 소호도, 똑같았어.”

“네. 그걸 알아주길 바랐어요.”

“나도 더 노력해야겠다. 무룡전도…… 나도 노력해 볼 거야.”

조서인은 솔직한 눈빛,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네. 기대되네요.”

섭주해는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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