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24화
제20장 선자불래(善子不來) (5)
다 덤비라니?
지금 당장?
모두 다 함께 말인가?
아이들은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굳어 버렸다.
간단한 몇 마디 말이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아이들 모두의 여유를 빼앗아 갔다.
모두가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다.
특히 질문을 던졌던 원형주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는 듯 대놓고 눈살을 팍 찌푸리기까지 했다.
헌데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진구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살짝 낮춘 자세, 양손을 자연스럽게 내리고 있는데 주변에 막을 두른 것처럼 따끔따끔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검을 들고 돌격한다면?
곧바로 쳐 내고 오히려 공격받을 것이다.
화살을 쏘면?
저 따끔따끔한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 어떠한 화살이든 다 쳐 낼 것이 분명했다.
무산학관의 아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저건 ‘무형기’였다.
절정을 넘어선 고수들에게서만 볼 수 있다는 고수의 증거 중 하나다.
“진구 교관님…… 강하네.”
“얼굴이 진지해. 진짜 다 덤비라는 걸까……?”
“오십 대 일? 으음, 재밌을 것 같기도 한데.”
말도 안 된다는 듯한 반응도 잠시.
아직 십 대 초반에 불과한 아이들은 호승심에 불타올라 각자 진구와 겨뤄 보는 상상을 해 보았다.
무산학관 아이들이 아무리 또래보다 성숙하다고 해도 그래 봤자 아이들이었다.
어린아이의 정신.
체계적으로 단련된 무공.
그 둘이 합쳐지니 아이들에게 무모할 정도의 용기를 주었다.
심지어 오십 대 일이다. 아무리 어린 소년들일지라도 사람 수가 많으니 왠지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쓰러뜨리기만 하면…….’
‘아니, 한 방만 맞추더라도……!’
무산학관의 영웅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자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원래 금지된 불장난일수록 더욱 재미있지 않던가.
아이들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지금의 ‘틀’을 깨 주길 기다렸다.
폭풍 전의 고요가 감돌았다.
아이들 모두의 시선이 진구와 원형주를 번갈아 응시했다.
‘원형주가 시작했으니까. 어떻게든 해 주겠지?
‘보여 줘! 초짜 교관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 주자!’
말없는 압박이 원형주에게 향했다.
반짝거리는 시선, 흥분한 숨소리가 원형주를 짓눌렀다.
“흐응.”
이 모든 일의 원흉이나 다름없는 진구가 아이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려드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진구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원형주를 응시했다.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원형주가 창백해진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 사람 뭐야?’
원형주는 진구를 보면 볼수록 발밑이 질척한 진흙탕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냥 성정이 가벼운 사내라고만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그 생각이 달라졌다.
상대는 위대한 북경 원가와 아버지의 업적을 알아보지 못하고 비난까지 한 파락호였다.
보는 눈도 없고 실력도 없는 하찮은 사내여야만 했다.
그런데…… 자꾸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연히 버티고 선 자세.
재미있다는 듯 오만한 미소를 지은 채 원형주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강자’의 분위기를 한껏 품고 있었다.
전후좌우.
어느 쪽으로 공격하려 해 봐도 빈틈이 보이질 않았다.
“흡…….”
한 번 들이켠 숨이 내쉬어지질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진구가 눈빛을 번뜩이며 잠시 노려본 순간, 온몸에 피가 안 도는 것처럼 손발이 차가워지면서 뻣뻣해졌다.
원형주는 그 순간 깨달았다.
그의 앞에 있는 교관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파락호가 아냐. 잠룡 중의 잠룡이야. 다른 교관이나 사부들과는 또 달라!’
주변을 흘깃 바라보니 오십여 명의 아이들이 뭔가를 해 보라는 듯 열망 섞인 눈빛으로 일제히 원형주를 주시하고 있었다.
눈빛에 무게가 실려 있다는 게 이런 걸까.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외면하고 싶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원형주는 기가 찼다.
진구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아이들.
도대체,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가.
“어…….”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갑자기 손끝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것을 느끼고는 황급히 양손을 한데 모았다.
입을 다무니 입술이 떨렸다.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입에서는 과도하게 침이 고였다.
이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원형주는 뒷골을 타고 싸늘한 땀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리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지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져야 할 텐데…….’
자신감이 점점 떨어지다 못해 이제는 패배를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물러나면 되지? 몸이 아프다고 할까? 오십 대 일이라니. 자존심이 상한다고 할까? 대련은 무공을 가르치는 데 좋지 않은 방법이라고 넌지시 거절해 보면……?’
어째선지 피해 없이 물러날 방도를 생각하면 할수록 자존심이 꺾였다.
그 순간 근처에 있는 청룡방 동기들의 얼굴이 보였다.
멍청하지만 순수한.
원형주가 ‘틀’을 깨 주길 바라는 치기 어린 욕망들.
‘그래. 이건 아냐.’
원형주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릿한 아픔과 함께 선연한 피 맛이 느껴졌다.
‘나는, 북경 원가의 장손, 원형주.’
원형주는 눈을 부릅떴다.
할 수 있다.
북경 원가의 장손이 물러날 바엔 죽는 게 낫다.
계속해서 스스로 되뇌며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아이들의 눈빛이 불타고 있다. 이길 수 있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더라도 이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피하지 않겠습니다!”
손이 덜덜 떨리는 모습은 포권을 취해서 감췄다.
깊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뒤, 훌쩍 뛰쳐나가 진구의 앞에 섰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원형주는 분홍색 비단 장포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드러난 손등과 팔목은 상처투성이였다.
무산학관에서의 노력의 흔적.
원형주는 진구의 신호를 기다렸다가, 그가 손을 까딱이는 순간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진구는 흥미진진한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원형주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원회, 그 밉상이랑 닮았단 말이야.’
장기린과 함께 적룡기마대에서 북로전쟁에 종군하던 시절.
싸우면 싸운다고 난리를 치고, 안 싸우면 안 싸운다고 난리를 치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원회는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는 전형적인 귀족 장수였다.
부대주였던 둘째 형 부운화와 책사인 섭우생은 그래도 우직하다나 뭐래나. 쌀 한 톨도 손해 보는 걸 싫어해서 보급 관리도 잘할 거라면서 높은 평가를 주긴 했지만……. 진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깐깐하고 잘난 척하고, 그런 주제에 적룡기마대주인 장기린에게 열등감은 커서 사사건건 이기려 들던 못난이로밖에 안 보였던 것이다.
적룡기마대에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단 한 사람도 없을 터였다.
헌데 인연이 있었던 탓일까.
이런 곳에서 교관과 제자로 만나 버렸다.
‘그래도 근성은 있네.’
진구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진구가 장난스레 놀리긴 해도 아버지 때문에 아들을 미워할 만큼 속이 좁지는 않았다.
놀리듯이 뿜어 본 살기에 안색은 창백해졌을지언정 주저앉지 않은 자존심.
애송이 주제에 진구를 맞상대한다는 열세의 상황에서도 정중하게 예를 차릴 수 있는 강단.
원형주는 의외의 모습들을 많이 보여 주었다.
진구는 강단 있는 소년을 싫어하지 않는다.
진구의 손속이 전에 없이 거칠어졌다.
“예의 차리지 마! 죽는 데는 순서가 없다!”
진구가 툭, 하고 발목을 걷어차니 원형주의 왼발이 앞으로 쭉 밀려나면서 자세가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진구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무공 따윈 모른다.
군부에서 배운 기초 무술.
거기에 붉은 악귀 장기린과 표풍검 부운화에게 전장에서 가르침을 받은 ‘살법’들이 기본인 사람이다.
가볍게 내뻗은 팔에 살기 섞인 발경이 실리고, 공격하는 부위는 하나같이 기경팔맥을 관통하는 중요한 혈맥들뿐이었다.
그나마 힘을 조절해서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진구의 천재성을 보여 준달까.
퍽퍽.
“컥.”
턱과 목.
그리고 명문혈을 손바닥으로 한 대씩 얻어맞은 원형주는 순간적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지 꺽꺽거렸다.
원형주의 몸이 강풍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이리저리 휩쓸려졌다.
원형주는 바닥을 한 번 구른 뒤, 입에 묻은 흙을 퉤! 하고 뱉어내며 독기 섞인 눈빛으로 일어섰다.
“좋은 눈빛.”
진구는 씩 웃었다.
웃는 낯빛 위로, 전장에서만 선보이던 광기 섞인 눈빛이 번뜩인다.
움찔하면서도 지지 않고 펄쩍 뛰어올라 원앙각을 걷어차는 원형주도 인재는 인재였지만, 진구는 눈곱만큼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왼손은 앞으로 뻗고, 오른손은 허리춤에 붙인 거창 자세.
나선형으로 회전하는 발경이 원형주의 좌측 어깨를 후려치자, 원형주의 가벼운 몸이 허공에서 반회전 하면서 바닥에 꼬꾸라졌다.
“끙…….”
바닥에 내팽개쳐진 채 신음하던 원형주의 머리를 진구가 손바닥으로 턱, 하니 붙잡았다.
“이걸로 세 번 죽었다, 원형주.”
“아직……!”
“아니 됐어. 넌 몰랐겠지만……. 처음의 그 압박감. 그게 ‘장수’의 책임감이라는 거야. 나를 믿고 따르는 병사들을 이끌고 죽음이 앞에 보이는데도 싸운다……. 장수의 자질이지. 제법이네, 너.”
“……!”
원형주가 멍하니 굳어졌다.
진구는 원형주의 머리를 거칠 게 쓰다듬은 뒤 일어나서 다시금 아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내가 분명히 오십 대 일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왜 다들 가만히 서 있어?”
진구는 놀리듯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선봉장이 이렇게나 얻어맞고 있는 동안 왜 한 명도 나서질 않아? 다들 백기 들고 투항한 거야?”
너무나 압도적인 모습에 잠시 얼어 있던 아이들의 눈에 불꽃이 하나둘 피어오른다.
진구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산학관 꼬맹이들은 원형주 빼고 다 겁쟁이네. 그렇지?”
아이들이 소리쳤다.
“아니에요!”
“저희도 할 수 있어요!”
호연지기에 휩싸여 소리치는 소년, 소녀들에게 진구는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럼 어서 덤벼. 원형주는 세 번이었어. 너네는 몇 번이나 죽는지 한번 보자.”
함성이 터지고, 아이들이 각자 자신 있는 무공을 선보이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진구의 손이 바빠졌다.
동작이 그리 화려하지 않은데도, 뒤로 물러섰다가 앞으로 나서며 공격하는 진퇴에 망설임이 전혀 없다.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아이들이 우수수 떨어져나갔다.
일인일타.
“넌 하체가 약하네. 넌 성급해. 너무 빨라. 넌 왜 들어왔니? 협격이 전혀 안 이루어지잖아.”
바닥을 나뒹구는 소년, 소녀들은 분한 얼굴이지만 자신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당했다.
파라락―.
소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와 함께, 처음으로 진구의 일격이 허공에서 가로막혔다.
진구는 웃었다.
익숙한 얼굴.
자신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년이 발끝으로 진구의 손목을 걷어차고는 바닥에 내려서 있었다.
“저도 한번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