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25화
제20장 선자불래(善子不來) (6)
소호.
은자촌의 꼬맹이.
비범한 악동.
존경하는 대형의 유일한 아들.
눈앞의 소년을 칭할 단어는 많았으나 진구의 대응은 단순했다.
화악―.
화탄이 터지듯 뿜어지는 강렬한 기파.
쾅, 하고 내딛는 발걸음에 단단한 청석 바닥에 금이 가며 깊은 족적이 새겨졌다.
소호를 상대하는 진구는 손 모양부터가 달라졌다.
넓게 펼쳐진 손바닥 장타(掌打)에서, 손가락 열 개를 모두 꼿꼿이 세운 손날을 창처럼 사용했다.
진구는 발끝에서 시작된 경력이 손끝까지 전달되는 동안 가용할 수 있는 모든 관절과 근육을 비틀어 회전력을 만들어 냈다.
진구의 몸이 폭풍에 휘감긴 듯했다.
오른손은 곧 창이다.
쒜에에엑―.
강렬한 바람 소리와 함께 공간이 갈라졌다.
적룡기마대의 돌격대장이던 진구.
진구의 수창(手槍)이 소호가 있던 공간을 찌르는 순간, 허공의 무언가가 사라져 버린 것처럼 훅― 하고 공기를 빨아들였다.
고요한 침묵 속에 작은 티끌이 들어왔다.
팡.
공기 방울이 터지는 것만큼이나 작은 소리를 시작으로 태풍 같은 바람이 소호에게 밀려들었다.
후오오오―.
소호는 다급하게 몸을 비틀었다. 상체와 하체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앞으로 걸을 듯 말 듯.
기묘한 박자로 흔들리던 소호가 땅으로 꺼지듯 훅― 하고 사라지더니 진구의 우측 사각지대에서 솟구쳤다.
파라락―.
소호의 소맷자락이 바람에 떨리며 날갯짓 같은 소리를 냈다.
피하는 과정에서 진구의 손날에 스친 탓일까.
소호의 앞섶은 예리한 무언가에 잘린 것처럼 풀어헤쳐져 있었다.
소호도 진구처럼 손가락을 꼿꼿이 세워 손날을 만들었다.
손에 검이 들려 있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검 한 자루가 날을 세우고 있으면 그게 곧 검이지 않던가.
곧게 세운 손날 위로 서늘한 예기가 감돌았다.
“갑니다!”
소호는 손날 검으로 무산학관에서 배운 기초 검법 삼십육초식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헌데 모양이 이상했다.
하나하나 따로 전개하면 지극히 단순한 기초 무공에 불과한데.
기이하게도 소호가 여러 개의 초식을 한꺼번에 전개하자 천수여래가 나타난 듯 무시무시한 초식으로 탈바꿈하였다.
위아래 좌우.
상대방의 정면 팔방을 점하며 날아드는 검술은 방어조차 힘들만큼 정교했고 절묘했다.
진구는 웃었다.
당연하다는 듯.
그래야 마땅하다는 듯 웃으며 팔을 휘둘러 소호의 공격들을 쳐 냈다.
파바바밧―.
순식간에 십여 합이 부딪치는가 싶더니, 진구가 크게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핫!”
진구가 오른손을 뒤로 돌려 어깨를 살짝 감췄다.
그러고는 번개가 번뜩인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또 한 번의 찌르기 일격.
소호는 자신이 시작이 빨랐으니 공격이 닿는 것도 더 빠를 거라 생각했으나, 이게 웬걸.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정작 둘 중에 먼저 위험해진건 소호였다.
진구의 팔이 갑자기 길어진 것처럼 앞으로 쑥― 다가온 것이다.
“으왓…….!”
소호는 대경실색하며 황급히 몸을 굽혔다.
전개되던 검술 초식이 중단되긴 했지만 비장의 일격은 진구의 소맷자락을 살짝 베어 냈다.
소호도 무사하지 못했다.
공격이 살짝 스친 탓인지 목덜미 옆의 피부가 빨갛게 일어난 채 화상을 입은 것처럼 따끔거렸다.
“아야야…….”
소호는 휙, 하니 뒤로 물러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진구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순진하긴. 하나같이 왜들 그래? 실전에선 공격당했다고 해서 상대방의 무기만 막지 않아. 곧바로 사람을 찔러서 못 싸우도록 만드는 게 더 낫지 않아?”
“실전……요?”
“대충 서로 약속한 대로 칼 휘두르면서 노는 것 말고. 목숨 걸고 맞붙는 실전.”
진구는 모두가 어렴풋이 생각은 하던 대련과 실전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었다.
소호도 뭔가를 깨달은 듯 탄성을 내뱉는 순간, 진구의 몸이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쉬이익―.
오른손을 뒤로 뺀다 싶더니, 어느새 진구의 손날이 소호의 어깨를 관통하려 하고 있었다.
소호는 튕기듯이 몸을 움직였다.
엄청나게 빠르지만 이미 한 번 겪어 본 공격이었다.
소호는 이래 봬도 꽤나 많은 싸움을 겪어 봤다.
갑작스러운 대응에는 능숙한 편이다.
“……!
소호가 상체를 반바퀴 비틀자 진구의 공격은 자연스레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찌익― 하고 어깻죽지의 옷이 여파에 휘말려 길게 찢어졌다.
파라락―.
소호는 양다리를 빠르게 교차했다.
아지랑이 같은 움직임을 보이며 다시 한 번 땅속으로 움푹 꺼지듯 사라지려는 순간…….
“안 되지. 똑같은 수는.”
진구가 몽둥이 휘두르듯 팔을 옆으로 휘둘러 갑자기 소호의 멱살을 한손으로 잡아챘다.
거기서 주저앉듯이 자세를 낮추니 소호의 몸이 맥없이 밑으로 딸려 내려온다.
진구는 소호의 다리를 걷어차면서 팔꿈치를 이용한 이문정주를 날렸다.
퍽, 소리와 함께 소호의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숨이 턱 막히고,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아니, 실제로 눈에는 푸른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어느새 소호는 등부터 땅바닥에 처박혀 있었던 것이다.
“한 번.”
진구가 내민 손날이 소호의 목덜미에 닿았다.
장난스러운 얼굴.
진지한 눈빛이 소호를 꿰뚫어 보았다.
“요즘 실력이 안 느는 것 같지? 막막하고 벽에 부딪쳤지?”
“어……?”
“자신만의 장점을 모르네. 지금 넌, 강렬함이 없어.”
“…….!”
진구는 웃지 않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눈빛.
말투에 담긴 분위기는 냉랭할 만큼 차가웠다.
“으……”
잠시의 침묵 후, 소호는 분한 듯이 볼을 부풀렸다.
“치사해. 똑같은 맨몸이라도 팔 길이가 다르니 먼저 닿았어! ……요.”
진구가 다시 웃음 지었다.
“인생은 원래 치사한 거야.”
“……!”
“분하면 얼른 커서 어른하면 돼. 누가 그렇게 작으랬냐? 꼬맹아?”
천하의 소호도 어린애들이랑 진지하게 말싸움을 할 수 있는 진구를 말발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진구가 놔주자 소호는 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비규환이었다.
진구에게 덤볐던 아이들 모두가 다들 다리가 풀렸는지 바닥 여기저기 주저앉아 있었는데, 겉모습만 봐선 패잔병이 따로 없었다.
“다 쓰러졌네…….”
소호는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땀과 먼지로 범벅된 채 앉아 있긴 하지만 짜증이 났다거나 화가 난 모습은 아니었다.
아이들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눈을 반짝이며 열정이 가득했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수월하게 싸울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진구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지 토론하는 표정들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진구 교관님 강하네.”
“우리가 오십 명이나 되니까 이길 줄 알았는데……. 붙어 보니까 알겠어. 우린 상대도 안 돼.”
“안 그래도 수업만 들으니까 내가 강해지는지 어쩐지 몰랐는데……. 이런 건 처음이야. 신기해.”
이론 수업만 듣던 아이들이 실전에 목마른 건 당연한 이치.
목마른 말이 사막에서 물을 만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게 진검 승부구나……. 확실히, 입관 전보다 강해지긴 했어. 어떻게 싸워야 할지 알 것 같아.”
“다음번에는 진형을 짜서 덤벼 보면 어떨까?”
“제대로 된 차륜전은 어때? 최대한 시간을 길게 끄는 거야.”
“진구 교관님이 가만히 안 둘 것 같은데? 먼저 덤벼 오지 않을까?”
“맞아. 그럴듯하네.”
열렬히 토론하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는 진구.
진구는 대뜸 소리쳤다.
“야! 너네 생각보단 좀 하더라? 그래도 나한텐 안 돼. 그건 확실히 알았지?”
“우―!”
아이들이 분해하며 야유를 퍼부었다.
“앞으로도 자주 싸워 줄 테니까 좀 더 노력해 보란 말이야.”
“분하다!”
“다음엔 쓰러뜨려 줄 거예요, 교관님!”
소호는 활기차게 서로를 대하는 진구와 학생들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게, 진구 삼촌이지!’
격의가 없어 사람과의 간격을 좁힐 줄 안다.
그러면서 실력과 재능이 있어 자연스레 존중하게 된다.
그게 소호가 아는 진구 삼촌의 매력이었던 것이다.
소호가 보기엔 학관장인 철우와 수석교관 철표도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신난 아이들과 만족한 학관장.
그 둘이면 됐다.
진구는 무산학관의 모든 관문을 통과한 셈이었다.
***
화려하게 치장된 자금성의 대전 안.
그의 주군을 향해 공손히 예를 올리던 양사기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아직 어려서 치기가 있기는 하나, 그래도 영민한 편이라고 생각했던 황태자가 아둔한 소리를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양사기는 이름난 군자답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찬찬히 되물었다.
“전하. 불민한 신하가 되묻겠사옵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주군의 의견을 되묻는 양사기의 목소리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왕 태감의 흑시부대 사용을 허가할 거예요.”
“전하, 그것은……!”
“오만무도한 무뢰배들이 대명제국 황실의 신료들을 습격했어요. 이걸 가만히 둬서야 황실의 기강이 바로 설까요?”
“이미 흉수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사옵니다, 전하.”
“그들은 살수일 뿐이에요. 살수를 보낸 자들은요? 그들도 잡았나요?”
황태자는 입꼬리를 진하게 끌어 올렸다.
“심지어 내 신하들을 습격한 이유도 우스워요. 무림의 힘을 과시하다니. 감히, 관과 무림은 다르다면서 짐에게 힘을 과시하다니! 고작 무공만 좀 익힌 무뢰배들이! 감히!”
황태자가 언성을 높였다.
“찢어 죽일 놈들이에요! 잡아오면 사지를 찢고 목을 베어 죽일 것이야!”
두 눈을 번뜩이며 소리치는 황태자는 기괴했다.
어린 소년이 가질 수 있는 살기가 아니었다.
양사기는 큰 충격을 받았다.
어찌 이리 변하셨는가.
그가 성심껏 유교경전을 읊으며 가르쳤거늘, 언제 이리 난폭한 성정이 되었는가.
“전하……! 무림에는 이미 성명서를 내어 싸움이 없도록 만들 예정이었지 않사옵니까. 정 그러시다면 국법대로 조사하여 잡아오면 될 일 입니다.”
“그걸로는 부족해요.”
황태자는 단호했다.
“굳이 삼강오륜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군신은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와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짐의 자식, 짐의 제자를 죽이려 한 자들이에요. 발본색원하여 뿌리를 뽑고 싶어요.”
“전하……!”
“이건 이미 전쟁이에요. 심지어 다른 신료들 모두 제 의견에 동의해요. 그렇지 않던가요, 여러분?”
양사기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명 황실의 신료들이 제각각 양사기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랬던가……!’
양사기는 황태자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는 왕진을 노려보았다.
그날의 일이 신료들에게 공포심을 준 것이다.
성명서를 내도록 잘 다독였건만, 결국 겁을 먹어 이리 되다니.
양사기가 그토록 믿고 있던 심복들조차 침묵을 지키는 모습을 보자, 그는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늙디늙은 몸으로도 그 순간 쓰러지지 않고 버텨 낸 것은, 오로지 명 황실을 위한 집념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전하. 흑시부대는…… 드러나서는 안 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일을 벌이면 무림과 완전히 척을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라고 하세요.”
“전하…….!”
“더 이상 참지 않을 거예요. 짐에게는 황금 장수들도 있으니까요.”
“전하……?”
황태자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더니 싸늘하게 웃었다.
왕진이 내민 글에 거칠게 찍히는 옥새가 양사기의 마음을 무너뜨렸다.
‘큰일이구나. 피바람이 불겠어.’
무림에도, 명 황실에도 파란을 예고하는 사건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