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53화 (282/686)

7권 3화

제21장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3)

사천성 성도로 향하는 길목 한복판엔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천막이 덩그러니 설치되어 있었다.

일 장이 넘는 높이에 윤기가 흐르는 붉은색 천으로 만들어진 천막은 사람이 서른 명이 들어가고도 남을 것처럼 크기가 컸다.

게다가 천막 주변은 어떠한가.

갑옷을 입고 온갖 무기를 착용한 자들이 서늘한 기세로 주변을 노려보고 있었다.

관도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사천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들은 모두 숨 쉬는 것조차 조심하며 최대한 빠른 속도로 그곳을 지나쳐 갔다.

“왔군요. 청성산은 어떻던가요?”

왕진은 들고 있던 지필묵을 내려놓으며 도철과 궁기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뽀얗게 분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 밑의 피로가 숨겨지질 않는다.

도철은 왕진의 옆을 힐끗 쳐다봤다. 탁자에 놓인 지도 위에 자그마한 바둑돌들이 여러 개 올라와 있었다.

“재밌었어. 강한 놈은 없었지만. 그래도 싸울 수 있으니 좋더라고.”

“싸울 수 있으니 좋다?”

왕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투견이 따로 없군요. 용맹한 건 좋지만, 신중하지 않으면 크게 다칠 거예요.”

“누가? 내가?”

“강호 무림은 당신의 생각처럼 그리 만만치 않아요.”

“잘 모르겠는데. 싸워 보니 청성파도 다 허명이었어. 장문인이 그 수준이라니. 구파일방도 별거 없더라고, 역시 내 상대는 무쌍귀 장기린뿐이야.”

오만하며 강맹하다.

왕진은 심유한 눈빛으로 그런 도철을 지그시 응시했다.

“한 번 당했는데도 여전히 패기만만하군요.”

“흥, 다음엔 이길 거다.”

“청성은……. 전대 고수는 다 등선했고, 이번 세대에 고수가 나오지 못했어요. 하지만 우습게 봐선 안 됩니다. 북천의 난 때, 장기린은 무림 오존의 손에 붙잡혔었어요. 십대고수는 몰라도 오존의 수준이 되면 신수라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흥.”

도철은 딱히 더는 말하지 않았으나, 삐딱한 눈빛과 코웃음 치는 미소를 보니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 듯했다.

왕진은 그 이상 잔소리하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살아남은 자는? 도문은 건드리지 않았겠지요?”

“당연히 가만히 뒀지. 다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도문 출신들은 살려 뒀어.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어차피 죽인 거 다 죽이는 게 좋지 않아? 왜 걔네는 살려 둬야 해?”

“무림 문파로서 청성파는 별거 아니지만, 도문(道門)으로서의 청성은 달라요. 민초들에게 필요한 존재죠.”

왕진은 옆에 놓인 검은색 섭선을 들어 살랑살랑 자신에게로 흔들었다.

“청성이 구파일방의 말석이나마 이름을 올린 것은 민초들의 지지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더욱 먼저 손을 봐야 하는 것이고요. 제가 전하라던 서찰은 전했겠지요?”

“전해 줬어. 도문의 늙은이. 그…… 도호가 적암이었나. 아무튼 전해 줬어.”

“받고 뭐라던가요.”

“황명이라고 하니 존명이라고 외치면서 받들겠다고 하던데.”

“흐음.”

왕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보기는?”

“적하와 청벽. 그 둘만 청성의 산문 앞에 수급을 걸어 뒀어. 그 앞에 왕 태감이 준 그 역천죄인이라는 글자도 붙여 놨고.”

“좋아요. 훌륭해요.”

“청벽은 코가 떨어져 나오긴 했지만, 뭐, 그래도 알아볼 수는 있을 거야.”

“뭐라고요?”

왕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코가 떨어졌죠?”

“궁기한테 물어봐. 난 몰라.”

도철은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고, 궁기는 느릿한 말투로 변명했다.

“그놈. 팔. 깨물었다. 밀다가, 코. 잡았다.”

“그랬군요. 궁기가 그 손으로 잡았다면 코가 얼어서 떨어져 버렸겠죠. 그나저나 구파일방의 대제자가 이빨로 깨물다니. 청벽은 처절하게 싸웠네요.”

왕진은 자신의 매끈한 턱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소림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완고한 적하 진인, 성격이 급하던 청광과 그를 말리던 대제자 청벽.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코가 없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요.”

왕진은 옆에서 가만히 죽간을 읽고 있던 선에게 손짓해 차를 한 잔 부탁했다.

“유득청산재불파몰시소留得青山在不怕没柴烧).”

“뭐?”

“청산이 있는 한 땔감은 걱정 없다.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을지니.”

왕진은 선이 가져다준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향긋하면서 깊은 향.

왕진이 좋아하는 용정이었다.

“청광이 이 말을 잊지 않아야 할 텐데요.”

“청광? 아아, 청성이검 중에 그 도망친 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십 년이라니. 그렇게 오래 참을 수 있겠어? 나 같으면 열받아서 곧바로 나올 것 같은데? 그럼 뭐, 내 손에 죽겠지만.”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후후.”

왕진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이 천막 너머 멀리 동북 방향을 바라봤다.

“도철, 흑시부대는 어떻던가요?”

“아, 쟤네? 괜찮아. 쓸 만해. 검기를 쓰면 가죽 갑옷이 뚫리니까 그것만 좀 위험하고……. 청벽 정도 수준이 안 되면 상처도 못 내더라고. 일대 제자들만 좀 위협이 됐고, 이대 제자들은 생채기도 못 냈어.”

“검기라……. 검기상인의 경지에 오른 자들은 무림 강호 전체를 따져도 그리 많지 않죠. 그 정도면 쓸 만하네요. 암기는 어땠죠?”

“암기는 쓸 일이 없었어. 산공독을 뿌리고 활과 방패만으로도 다 막아 냈으니까.”

“역시 흑시부대네요. 첫 출전에서 그 정도 성과라니.”

“경험이 많아지면 더 강해질 거라고. 내가 훈련시킬 테니 두고 봐.”

“기대되는군요.”

왕진은 흡족하게 웃었다.

“산공독이라든가, 필요한 물품들은 충분히 준비해 줄 테니 걱정 말고 운용하도록 해요.”

“그거 다행이네.”

“자, 그럼 두 사람 다 이리로 와 봐요.”

왕진은 찻잔을 내려놓고 옆에 탁자에 있는 지도를 가리켰다.

“두 사람은, 우리가 왜 사천에 먼저 왔는지 아나요?”

도철이 곧바로 답했다.

“청성 때문에 온 것 아냐?”

“그건 덤일 뿐이에요. 어차피 멸문시키긴 했겠지만.”

“아, 그래? 그럼 왜 여길 먼저 왔지?”

왕진이 빙긋 웃으며 궁기를 쳐다보니, 궁기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 일통.”

“맞아요. 바로 맞췄어요.”

왕진이 흡족하게 웃자 도철은 “쳇.” 하고 혀를 찼다.

“명 제국의 천하입니다. 무림 강호라도 폐하의 강산이에요. 우리가 할 일은 전 무림에 폐하의 칙령을 전하고, 일통하는 것이지요.”

왕진은 유려하게 뻗은 손가락으로 사천 지방의 지도를 꾹 눌렀다.

“초한의 한신처럼. 삼국의 유비처럼. 우린 사천에서 시작해 중원으로 향할 것입니다.”

왕진은 사천에서 시작하여 동북방을 향해 쭉 손가락을 쓸었다.

“점창은 칠성태극교와의 싸움으로 이미 멸문이나 다름없는 상태죠. 모산파도 마찬가지예요. 북천의 난 때 화를 당해서 지금은 무공보다는 술사 쪽만 남았어요. 그나마 남아 있는 장로들도 우리의 계획에 협력 중이니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섬서.”

“섬서? 화산파?”

“맞아요. 화산과 종남이 있는 이곳이에요. 그쯤이면 아마 우리에 대한 소문도 났을 테죠. 내 생각엔 우리의 무림일통 여정에 여기가 가장 큰 접전지입니다.”

왕진의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어…… 화산에 누가 있더라? 오매검협?”

“맞아요. 성격은 좀 성급하다지만 그도 강하다더군요. 하지만 가장 위험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 한 명. 전대 고수인 매화검신입니다.”

“흐응?”

“강할 겁니다. 그는 검존과 동수를 이룬 적도 있었으니 무림오존의 아래가 아니에요. 매화검신이 상대라면 그대들 두 사람이 신수라고 해도 둘이 함께 싸울 생각도 하고 있어야 할 것이에요.”

“둘이 같이 싸우라고……?”

“저는 경우에 따라서는 나머지 사흉을 불러올 생각도 하고 있어요.”

도철은 불신하는 표정을 지었고, 궁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과 종남만 굴복시킨다면…… 그다음은 쉽지요. 무림맹은 나서지 않을 것이에요. 진주 언가, 하북 팽가, 남궁세가, 그 다음 천진의 개방과 절강 모용세가까지 간다면.”

왕진은 지도에서 손을 떼고는 섭선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무림일통(武林一統)!”

“흐음.”

“어때요? 쉽지요?”

도철은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썼다.

“그 굴복이라는 게 어떤 의미야? 다 죽이는 거야?”

“끝까지 저항한다면 그래야죠. 하지만 웬만하면 무공의 절반을 받는 걸로 용서해 줄 생각입니다.”

“무공의 절반? 뭘로? 비급 같은 걸로?”

“네. 무산학관에 교관을 보내라고 하는 것도 좋겠네요. 그 정도면 다들 타협하지 않을까요?”

왕진은 웃었고 도철은 불만스러워 보였다.

“만약 다 굴복해 버리면 우리의 집혼기는 언제 채워?”

“후훗, 걱정 말아요. 피를 볼 일은 많을 거니까요. 이제 시작에 불과해요. 흑시부대를 어렵게 얻었어요. 겨우 무림일통으로 끝낼 것 같은가요?”

“호오, 그렇단 말이지?”

도철은 그제야 만족한 듯이 웃었다.

싸움과 피.

그게 사흉의 존재 목적이다.

“아. 그것 말인데. 일단 여기서 아미파를 먼저 갈 거야, 아니면 당문을 먼저 갈 거야?”

도철은 마치 산책으로 어딜 갈지 고르는 어린아이처럼 가벼운 말투였다.

“어딜 먼저 가고 싶은가요?”

“아미파. 비구니들이랑 먼저 싸워 보고 싶어.”

“거긴 파불신니(破佛神尼)가 있지요. 무공이 뛰어난 승려들도 많다고 들었으니 청성과는 달라요. 어찌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첫 구파겠네요.”

“그래. 그러니까 먼저 가 보자고.”

도철은 두 눈에 투지를 활활 불태웠다.

입가에는 이미 사냥감을 보는 듯 잔인한 미소도 머금고 있었다.

왕진은 그런 도철에게 손을 내저었다.

“부(不).”

“왜!”

“힘든 건 마지막에 하는 거예요. 우선은 당문으로 갑니다.”

“아니, 당문에도 비사문(飛死門)이 있잖아. 그자가 손을 한 번 뿌리면 수백이 죽는다며? 그놈이 더 위험한 거 아냐?”

“후훗, 당문은 세가예요. 구파와는 달라요.”

왕진은 여유롭게 섭선을 부쳤다.

“당문부터 가 보죠. 그러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

***

사천 당문.

독과 암기로 유명하니 사파로 불릴 만도 하건만, 자신들만의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탓에 여전히 정도 문파로 인정받는 특이한 세가.

사천이라고 하면 당문이고.

당문이라고 하면 사천이라고 할 만큼 유명한 가문이 바로 사천 당가였다.

도철과 궁기.

그리고 오백 명의 흑시부대가 당문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산문 앞에 녹색 무복을 입은 일단의 무리가 일렬로 정렬해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호오?”

도철은 감탄성을 내뱉었다.

가장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서있는 중년인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똬리를 튼 살모사가 독니를 번뜩이는 듯한 기세였다. 도철은 그 모습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짤막한 수염에 무시무시한 눈빛 또한 범상치 않다.

한눈에 그가 당문의 수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사문이라더니. 대단하셔. 거기에 관인까지 대동하셨다?”

중년인의 옆에는 누가 봐도 명 제국의 관복을 입은 관인 한 명이 안절부절못하면서 난감한 얼굴로 서 있었다.

도철은 오백 명의 흑시부대 뒤에 있는 마차를 흘깃 쳐다봤다.

그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번에도 왕진의 말이 맞았다.

당문의 분위기는 그가 원하는 상황과 정반대였던 것이다.

“황실의 여러분들. 우리 당가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사천 당가의 중년인은 정중한 포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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