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54화 (283/686)

7권 4화

제21장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4)

“본인은 당가의 가주 금오라고 하오. 따뜻한 차와 음식을 준비해 두었는데, 내실로 들어가시겠소?”

콧수염이 잘 어울리는 중년의 미안(美顔)에는 담담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중무장한 오백의 흑시부대를 눈앞에 두고도 긴장하는 모습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정중할 뿐.

안쪽을 가리키며 내방을 청하는 그는 복지부동(伏地不動)하며 몸을 낮춘 이무기와 같았다.

“흐음.”

도철은 자신의 좌우로 늘어선 흑시부대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평소보다 훨씬 두꺼운 복면을 착용해 목이 굵어 보일 지경이었다. 해독제와 산공독으로 가득 찬 허리춤의 주머니도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많이 달려 무거워 보였다.

‘독전(毒戰)을 대비했는데, 헛수고였나?’

도철은 싸움을 할 수 없다는 것에 진한 아쉬움을 느끼면서 당금오를 노려봤다.

“당문은 차 대신 독물을 마신다는데, 마음 편히 먹을 수나 있겠어? 들어갔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황실에서 온 손님을 어찌 해할 수 있겠소?”

“모르지. 청성파가 감히 명의 관리들을 죽이려 했는데, 당문이라고 다를까? 어차피 다 같은 무림 강호의 파락호들 아냐? 파락호를 어떻게 믿어?”

당금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뒤쪽에 도열해 있던 녹색 무복의 당가 무인들은 달랐다.

“감히……!”

“당문을 앞에 두고……!”

도철을 노려보는 그들의 눈빛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가득했다.

‘반응이 있어.’

도철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더 도발해 보려는 찰나였다.

당금오가 먼저 나서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공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더는 내실을 권하지 않으리다. 허면 어떻게 하시겠소? 여기서 대화를 나누시겠소?”

“……그렇게 하지, 뭐.”

“다탁을 준비하겠소.”

당금오가 손짓을 하자, 안쪽에서 하인들이 뛰쳐나와 곧바로 산(傘)과 다탁, 그리고 다과를 준비했다.

마치 그렇게 하길 기다렸다는 듯 일사천리로 진행되니 도철은 기분이 상했다.

당금오의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는 게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흥, 여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인가…….”

“자. 말씀하신 대로 당문은 독과 약초에 조예가 있어 찻잎도 가장 맛있는 걸 고를 줄 안다오. 마셔 보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겠소.”

당금오는 먼저 자리에 앉아 정갈한 자세로 찻주전자를 들더니 직접 찻잔에 따라 냈다.

도철은 불만스러운 얼굴이긴 했으나 순순히 다탁 앞에 마주 앉았다.

“그런데 마차 안의 높으신 분은 부르지 않아도 괜찮겠소?”

“뭐?”

“이 거대한 일의 책임자가 공 한 분뿐은 아니지 않겠소?”

당금오가 옆에 손짓을 하자, 모른 척 비스듬히 먼 산만 바라보고 있던 관인이 어색한 얼굴로 다가왔다.

나이는 중년이라기엔 조금 젊어 보이지만, 눈이 작고 가늘어 영악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크흠!”

“자, 여기 계신 분은 사천 금천현을 맡고 계시는 금천현령 정환(鄭渙)이라는 분이시오.”

정환이라는 현령은 관직에 있는 사람답지 않게 그리 뻔뻔한 성격이 못 되는 것 같았다.

당금오가 재촉하자 자리에 앉았을 뿐, 마지못해 와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겼다.

“정 현령 생각엔 이 일은 좀 더 큰…… 예를 들어, 사례감의 태감이신 분 정도는 되어야 이런 결단을 내리실 수 있을 것 같다던데.”

“커험! 추측이오, 추측. 알고 있는 건 아니고.”

정 현령은 마음이 심히 불안한 듯 계속해서 도철과 그 뒤의 흑시부대를 힐끔거렸다.

반면에 도철은 벌레 씹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추측일 뿐이지. 암. 그러니 윗분께 말씀을 잘 전해 주시구려. 금천 현령인 정환이 당문과 함께 이번 일을 무사히 넘어가길 바라고 있다고.”

정환은 숫제 고개라도 조아릴 것처럼 공손한 말투였다.

“허허, 공께선 어찌 생각하시오? 어떻소? 마차 안에 계신 분도 이곳에 모셔야 할 것 같지 않소?”

당금오와 도철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뜨겁게 오가는 시선 속에 서로에 대한 생각이 교차했다.

“나는…….”

도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부대의 대장으로는 안 보이나?”

당금오는 고개를 저었다.

“대장으로 보이오. 다만 당문을 멸문시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으로는 안 보이오.”

으득.

도철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으나 그걸 반박할 말이 없으니 더욱 화가 나는 것이다.

도철이 뭐라 소리치려는 찰나, 마차의 문이 열리며 왕진이 걸어 나왔다.

“그만하세요, 도철. 아무래도 직접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군요.”

왕진의 손에 들린 흑색 섭선이 모두의 마음처럼 흔들렸다.

“당 가주의 독공이 무시무시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설전(舌戰)까지 잘 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군요. 반가워요. 사례감을 맡고 있는 왕진입니다.”

섭선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왕진이 다탁으로 다가왔다.

“왕 태감.”

“태감을 뵙습니다.”

당금오와 정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처럼 정중하게 인사했다.

굽히는 허리, 절대로 고개를 들지 않는 모습에서 극도의 존경과 공포심이 담겼다.

“연기는 그만하세요. 내가 왔는지 다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왕진이 팡, 하고 손바닥을 마주치자 금천 현령 정환이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왕진은 반달처럼 휘어진 눈으로 당금오와 정환 두 사람을 지그시 바라봤다.

“당대의 금천 현령은 똑똑한 사람이었군요. 기억해 두겠어요.”

“인정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태감.”

정환은 곧바로 다탁 옆으로 물러나 바닥에 닿을 듯 몸을 바짝 엎드렸다.

왕진은 흡족하게 웃은 후, 이번엔 당금오를 바라봤다.

“당문의 문주. 인상적이네요.”

“황공합니다, 태감.”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온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요?”

“사천 땅에서 저희 당문이 모르는 일은 없습니다.”

당금오는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왕진은 흥미로워하며 당문주가 따라 준 찻물을 입으로 가져갔다.

모두가 깜짝 놀라서 왕진을 바라봤다.

도철이 당문이 주는 차는 위험하니 마시지 않겠다고 한 게 불과 조금 전.

왕진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망설이지 않고 차를 마셨다.

“맛있네요. 용정인가요?”

“……제가 직접 선별하였습니다.”

“풍미가 깊네요. 앞으로도 마시고 싶은 차예요.”

왕진은 지그시 눈을 감고 차의 향을 즐기기까지 했다.

탁월한 그의 배짱에 지켜보던 당금오의 얼굴에 경탄의 빛이 떠올랐다.

“그럼 당문주에게 하나 물어보죠. 당문이 청성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감히 답해 드리겠습니다.”

당금오는 포권을 취하며 일어나 공손히 답했다.

“첫째, 당문은 청성과 달리 황실의 권위를 존중합니다. 명제국의 신민으로서 명을 받들 것이며, 원하는 것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만약 불필요하게 싸우게 된다면 큰 피해를 보게 되니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앞으로의 여정을 생각할 때 저희와 불필요하게 싸워 전력을 줄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당금오는 미리 생각해 뒀던 것처럼 막힘없이 대답했다.

“역시 당문주는 비범해요. 자, 그럼 솔직하게 답해 주세요. 당문주를 제외하고 사천 당문이 여기 흑시부대와 싸운다면 피해는 얼마나 입을 것 같은가요?”

“…….”

“답하기가 어렵나요?”

당금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저를 제외한다면 당문은 멸문지화를 맞을 터입니다. 혹시 독이나 기관지식으로 피해를 더 늘린다고 한들…… 황실의 명을 어긴 죄로 죽는 것은 매한가지일 터.”

“싸우면 흑시부대는 몇이나 죽을 것 같은가요?”

“…….”

“그것도 답하기가 어려운가요?”

당금오는 조금 전보다 더욱 고민하다가 답했다.

“무공 실력과 장비가 보이는 대로라면 피해는…… 삼분지 이.”

“뭐라……! 고작 백 명도 안 되면서……!”

분개하며 일어서려는 도철을 왕진이 말렸다.

“후후, 그렇군요. 그럼 당문주가 포함되어 있다면 이쪽이 필패라고 생각하는군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굴복하며 황실을 따른다……. 재밌네요. 당문주는 확실히 가주로서 가문을 이끌 능력이 있어요. 시류를 읽는 눈이 탁월하군요.”

왕진은 찻잔의 찻물을 남김없이 마신 뒤 내려놓았다.

어째서일까. 왕진은 마치 한창 굶다가 맛있는 음식을 본 것처럼 입에 침이 고였다. 마치 십 대 소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는 자연스레 찻주전자에 눈이 갔으나, 한 잔 더 따르려는 당금오에게 손을 들어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아직은 만족해선 안 된다.

아직은, 허기를 유지해야 했다.

“세상은 보기와 다르죠. 흑시부대와 여기 있는 도철은 보기와는 전혀 달라요. 다른 건 다 맞았으나, 이들에 대한 예상은 틀렸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렇습니까.”

“당문이 가진 무공 절반을 무산학관에 보내고, 거기서 독술과 암기술을 가르칠 교관도 함께 보내세요. 그럴 수 있겠나요?”

왕진의 목소리는 훈풍처럼 따스했으나 당금오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북풍한설만큼이나 차가웠다.

당금오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 당가 또한 명 제국의 신민. 명을 따르겠습니다.”

“좋아요.”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왕 태감.”

“무엇이죠?”

당금오는 자못 진지한 얼굴이었다.

“제게 제법 총기가 있는 아들이 있습니다. 내년에 무산학관에 보내고 싶은데, 들여보내도 되겠습니까?”

“아들이요?”

왕진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당금오를 보니 그는 당연하다는 듯 잔잔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시험만 통과한다면 무산학관은 그 누구도 배척하지 않으니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왕 태감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아들까지 보내다니. 당신의 결단력이 놀랍군요, 당문주.”

“황송하신 말씀. 그저 장차 최고의 무학 학관이 될 곳이니 아들에게 경험시켜 주고 싶을 뿐입니다.”

많은 것을 빼앗기는 자의 마지막 발악일까. 아니면 시류를 읽은 자의 과감한 투자일까.

그 모든 결과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게 될 터.

왕진은 기분 좋게 일어섰고, 당금오와 정환은 허리를 굽힌 채 배웅했다.

“아! 한 가지 더 말씀드리죠, 당문주, 그리고 금천 형령. 흑시부대의 힘은…… 아미파를 통해 보도록 해요. 기회가 된다면 직접 보는 것도 좋겠네요.”

왕진은 훗날 그들이 놀랄 생각을 하니 짜릿한 기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당금오와 정환은 그런 왕진의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몸을 부르르 떨며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왕진은 웃음만을 남긴 채 당문을 떠나갔다.

***

섬서 화산.

속가 제자들이 모여 사는 산문 아랫마을. 속칭 매화당에 거지꼴의 앳된 청년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그는 궁가방(개방)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허리춤의 매듭들을 숨길 생각도 않고 매화당에 들어오자마자 책임자인 매화당 당주에게 달려갔다.

“급보요! 급보! 사천이 떨어졌습니다! 파불신니가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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