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5화
제21장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5)
개방 이결 제자의 외침은 매화당에 있던 모두를 경악시켰다.
파불신니.
아미파 장문인의 사저이며, 시골 마을의 고혈을 빨아먹던 부패한 절에 쳐들어가 경외받던 황금 불상을 일 장에 쳐부숴 버린 일로 유명해진 비구니였다.
절정에 이른 절수구식(截手九式)과 무적을 논하는 불광보조(佛光普照)는 그야말로 상대할 자가 없다고 하며, 무림 십대고수들과 이름이 동일시되는 명실공히 사천 최고수 중 한 명이었다.
강호 무림에서 사천에 고수가 누가 있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여덟 글자로 대답한다.
아미파불, 당가사문.
(峨嵋破佛, 唐家死門).
아미산에 파불신니가 있고, 사천 당가에는 비사문이 있으니.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사천의 상징과도 같은 고수였다.
그런 파불이 죽었다?
일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강호 무림이 이 소식으로 요동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개방의 이결 제자. 방금 뭐라고 했나? 누가 죽어?”
매화당주 유협은 버선발로 뛰쳐나와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캐물었다.
고개를 푹 숙인 이결 제자, 그는 거친 숨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행색도 초췌했다.
어찌나 다급하게 왔는지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발목 부근엔 풀 즙이 잔뜩 말라붙었다.
“파불……신니가. 죽었습니다.”
“허!”
유협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안타까움과 믿을 수 없는 심정이 뒤섞인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차근차근 이야기해 보게. 대체 어찌된 건가. 사천 쪽이 뒤숭숭하다는 소문은 들었다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게야?”
“그게…….”
유협은 시종에게 시켜 개방 제자가 목을 축일 수 있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감사합니다. 황실이…… 흑시부대라 불리는 자들을 풀었습니다. 청성은 도문만 남긴 채 멸문했고 아미파는 반파…… 파불신니와 복호승 절반이 죽은 뒤에 결국 항복을…….”
개방 제자의 목소리는 비통했다.
유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탄식을 내뱉었다.
“그럴 수가……. 어찌 그런 일이……!”
이 소식을 듣고 차분할 수 있다면 그는 강호인이 아닐 터였다.
혼란에 빠졌던 유협이 뭔가를 떠올린 듯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사천엔 당문이 있었다. 당문은! 당문은 어찌 됐나?”
“당문은 처음부터 항복했습니다.”
개방 제자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번뜩이는 눈빛, 가라앉은 목소리에 분노가 남아 있었다.
“뭐라고……?”
“흑시부대는 아미파로 가기 전에 당문에 먼저 들렀습니다. 거기서 비사문은…… 황실과 합의를 본 듯합니다.”
“허어.”
유협은 비틀거리다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청성은 멸문, 당문은 항복했고, 아미파는 반파당한 후에야 항복을 해?”
유협은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본파의 바로 앞에서 속가 제자들의 총타 역할을 하는 매화당을 맡을 수 있었다.
유협은 사건의 겉면만을 보고 착각하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사천에서의 사건은 큰일이지만, 그 속에 숨겨진 황실의 의도가 더욱 큰 문제였다.
어째서 지금 흑시부대라는 무력 집단을 보냈는가?
그리고 어째서 사천 땅에서 무림 방파를 일소하는 듯한 행위를 하는가?
또, 당문과는 어째서 서로 간의 합의를 보았나?
“묻겠네. 개방의 제자. 자네는 파불신니의 마지막을 보았나?”
“보았습니다.”
“그분의 마지막은 어떠했나? 흑시부대가 대체 어떻기에 청성을 멸문시키고, 아미파를 압도했지?”
“그건…….”
본래 개방의 제자들은 누구나 뻔뻔할 만큼 능청스러웠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여유를 잃고 굳은 얼굴이었다.
심각한 얼굴, 혼란스러운 눈빛에서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그건…… 군대였습니다. 무림인을 상대로 만든, 그저 무림인을 죽이기 위한 살육 집단이었습니다. 오백 정도 되는 무인들이 갑주와 방패를 무장하고, 산공독을 뿌리며 진격해 왔습니다.”
“산공독을…… 뿌려?”
“제가 살면서 산공독을 그리 함부로 뿌리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그 귀한 산공독을 흙가루 뿌리듯 아낌없이 뿌리면서 묵묵히 전진하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다니. 산공독을 맞았다면 승려들도 무력했겠군. 아미파는 당황했겠어.”
“예. 흑시부대는 아미파가 어찌 싸울지도 미리 숙지한 모양인지 난피풍검법을 파훼하는 모습이 압도적이었습니다. 거기에 그자…….”
개방 제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흑시부대에는 대장이 한 명 있는데, 이름이 도철이라고 했습니다. 살기를 전혀 절제할 줄 모르는 짐승 같은 자입니다. 그자가 파불신니를 정면에서 꺾고, 가슴에 철조를 박아 넣었습니다.”
“허어.”
유협은 탄식했다.
“일대일로 겨룬 것인가?”
“예.”
“도철? 도철이라. 어떤 자인가. 나이가 지긋한 은거기인인가?”
“아닙니다. 젊었습니다. 이립도 안 되어 보였습니다.”
“이립도 안 되는 나이인데, 파불을 전면에서 꺾었다?”
유협은 잠시 산공독 때문이라며 스스로 자위해 보았으나, 이내 그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파불신니는 강호 무림 최고봉이라는 십대고수의 아래가 아니었다.
즉, 강기를 형성할 수 있는 초절정 고수라는 뜻이며, 이런 경지에 오른 이들은 산공독 같은 걸로 막아 낼 수 없었다.
즉, 애초에 도철이라는 자가 십대고수와 마주할 만큼 강하다는 뜻이었다.
“관가에 그 정도 인물이 있었단 말인가. 놀랍군, 놀라워…….”
“아!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또 있나? 끝이 없군. 말해 보게.”
“이건 중요한지 모르겠으나 일단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미파와 흑시부대가 싸울 때…… 비사문 당금오가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다가 떠났습니다. 크게 당황한 듯 보였습니다.”
“싸움을 지켜보다가 놀라면서 떠났다고?”
“예.”
유협은 생각을 거듭한 후 결정을 내렸다.
“보통 일이 아니구나. 본산에 알려야겠다. 내가 먼저 산에 오를 테니 소협은 매화당에서 좀 쉬고 있게. 본산에서 찾을 테니 휴식이 끝나면 올라올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걸세.”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해는 동도라고 했지. 더구나 같은 구파일방이라면 남이 아닐 터. 귀한 소식을 전해 주어 감사하네. 매화당에서 제일 좋은 침실을 내줄 테니 내 집이라 생각하고 쉬시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유협은 개방 제자와 서로 포권을 취한 뒤, 황급히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이 향하는 곳.
매화향 가득한 섬서의 거악, 화산이었다.
***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산골 언덕에 작은 정자 하나가 오도카니 자리 잡고 있었다. 시원하게 바람이 불 때마다 정자 옆에 심어 둔 벚나무 잎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잘 말린 오동나무로 만든 정자는 화려하지 않고 단출하면서 주변과 잘 어울리는 매력이 있었다.
짙은 갈색의 지붕은 토끼풀이 잔뜩 돋아난 뒤쪽의 나지막한 동산과 잘 어울렸고, 정자 아래 황토색 바닥은 양옆을 둘러싼 얼마 안 되는 텃밭과도 잘 어울렸다.
누가 봐도 시골 마을에서 잠시 쉴 수 있도록 만든 정자라고 생각할 것 같았으나, 정자의 전면에 걸려 있는 현판은 보는 사람의 기대를 멋지게 배신했다.
무림맹(武林盟).
놀랍게도 시골 정자에 무림맹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심지어 천하를 아우를 것 같은 기백이 가득한 용사비등한 글씨체였다.
대문파의 산문에나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은 위용 가득한 현판이 열 명도 다 못 앉을 작은 정자에 붙어 있는 것이다.
“사숙!”
넓게 펼쳐진 논밭 사이의 오솔길로 한 사내가 황급히 달려왔다.
나이는 삼십 대쯤 되었을까.
정갈한 백색 도복을 잘 차려입은 그의 달음박질은 마치 구름 위를 넘듯 가벼웠다.
“사숙! 어디 계십니까!”
순식간에 정자에 도달한 사내는, 곧 자신이 찾던 이가 시골 촌부처럼 텃밭에 쭈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허탈함과 당황스러움도 잠시,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찾던 ‘무림맹주’에게로 다가갔다.
“사숙, 제발 체통 좀 지키십시오. 누가 보면 곧 등선할 영감님인 줄 알겠습니다.”
“음? 내가?”
서글서글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방문자를 보면서 선한 웃음을 지었다.
“등선할 영감님이라니. 내가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여?”
“허름한 옷에 밀짚모자까지 쓰다니. 뒷모습만 봐서는 영락없이 시골 영감님이에요.”
“하핫, 그런가?”
웃음을 터뜨리는 그는 코밑과 하관 전체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 있긴 하나, 눈가와 이마에는 주름이 하나도 없이 팽팽했다.
사실 그건 당연한 일.
현 무림맹주 백연은 불혹을 조금 넘은 사십 대 중반에 불과했다.
아직 영감 소리를 들을 나이는 절대로 아니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노숙해 보인다는 소리를 좀 듣긴 했지.”
“자랑이 아닙니다. 제가 칭찬한 것도 아니구요.”
“하핫, 그래. 그래. 알았어. 명진은 항상 너무 진지해.”
“저라도 진지해야지요. 사숙께서 너무 소탈하시니까. 결국 이런 사달이 나는 겁니다.”
“사달이라니?”
“읽어 보십시오.”
친근한 말투와 달리 백연에게 죽간을 내미는 명진 도장의 태도는 공손했다. 백연은 그가 두 손으로 받쳐서 내민 죽간을 받아 들었다.
“이건……?”
봉인된 밀랍을 뜯고 죽간을 읽어 본 백연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선하고 사람이 좋아 보이는 인상이지만 북천맹의 난 때부터 온갖 싸움터를 전전했고 세파에 휩쓸리며 많은 모험을 해 온 사람이었다.
사태의 위중함은 죽간의 내용을 다 읽기도 전에 알아챘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 받아.”
“예?”
백연은 명진에게 죽간을 도로 건네준 뒤, 다시 텃밭에 앉아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명진은 할 말을 잃고 잠시 멍하니 굳어 버렸다.
“아니, 잠깐. 사숙,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잡초를 뽑아야 해. 농사일이라는 게 시기가 중요해서. 지금이 아니면 못하거든.”
“아니, 지금 잡초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뭐하시는 겁니까? 당장 맹주령을 내리셔야죠. 사천이 날아갔습니다. 청성은 멸문했고, 당문은 포기했으며, 아미파는…… 절반이 죽었습니다. 파불신니가 당했어요.”
명진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할 정도로 흥분했다.
“내게 무슨 힘이 있겠어. 시골 영감님에 불과한데.”
“사숙. 지금 장난치실 때가 아닙니다.”
“나도 장난치는 게 아니야.”
백연과 명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서로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명진은 이를 악물고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평화로운 시대에 무림맹은 필요 없다면서 이런 산골에 스스로 처박히셨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사숙. 맹주령 한 번이면 맹약을 맺은 모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모일 것 아닙니까? 지금은 그게 필요합니다. 이 일은 심상치 않아요. 황실이 전 무림 강호를 통제하려 하고 있단 말입니다. 사천으로 끝이 아닐 게 분명하단 말입니다.”
“모이면 어떻게 하려고?”
“예?”
“황실과 싸울 건가? 왜? 쳐들어가서 황제라도 끌어내리게?”
명진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확인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백연의 발언은 과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명진. 내 마음은 확고해.”
무림맹주 백연은 담담한 얼굴로 고집스럽게 눈을 빛냈다.
“무림맹은 이번 일에 손을 대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