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6화
제21장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6)
명진은 석상처럼 굳어 버린 채 침묵을 지켰다.
그의 내면에서 백연이 한 말의 충격이 가시질 않고 있었다.
“손을 대지 않는다고요……?”
명진은 구파일방.
그중에서도 검의 종가로서 존경받는 무당파의 후기지수였다.
그는 지금껏 강호 무림이야말로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무림행을 하면서 낭만과 정의, 협을 쫓아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싸움을 겪었던가.
그 많은 싸움 중에 관과 무림이 서로 적대시하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있다면 북천의 난 정도일까?
허나 북천의 난은 강호관직론이라는 해괴한 등용문에 이끌려 ‘무림인’이 ‘관직’을 가지기 위해 나섰던 사건이었다.
‘관’에서 ‘무림’을 갖기 위해 움직인 지금과는 어찌 보면 정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사숙, 사숙께서 강호 무림에서 어떤 위치를 갖고 계신 줄 아십니까?”
명진은 목소리가 떨렸다.
“무당파의 절학을 배운 속가 제자. 구양세가의 외동딸과 결혼한 천하제일 세가의 실질적인 후계자. 거기에 무림맹주라는 천하에 하나뿐인 자리까지.”
“과분한 직책이지.”
“과분하지 않습니다. 사숙은 그에 걸맞은 능력을 언제나 보여 주셨어요. 북천맹의 난을 막는 데 공을 세웠고, 무림 세가들끼리 싸움이 날 때마다 중간에 나서서 중재해 주셨지요. 군웅들은 사숙이 나서면 어떤 분쟁이든 끝이 난다고 말하곤 했어요. 그때 모두가 느낀 것입니다. 이분이야말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무리 없이 이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으음.”
“그런 명성들이 쌓여 사숙을 무림맹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허명이야. 매번 간신히 패배만 면할 뿐이었지. 난 운이 좋았어.”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숙.”
명진의 눈빛은 절박한 심정을 나타내듯 흔들렸다.
“관에서 어찌 무림의 일에 관여를 한단 말입니까. 심지어 같은 구파인 청성과 아미가 짓밟혔는데…… 이걸 가만히 두고 봐서야 어찌 ‘협(俠)’을 말할 수 있습니까.”
“명진.”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사숙. 이런 제가 잘못된 것입니까?”
명진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에게 있어 관아란 부패한 자가 보일 때 영웅처럼 나서서 단죄해야 할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지금껏 관과 무림이 서로를 소 닭 보듯 하며 모른 척 지내 온 세월이 길었기에 어쩔 수 없는 고정관념이었다.
어찌 그를 탓할 수 있겠는가.
“사숙뿐입니다. 사숙의 맹주령만이 지금의 상황을 바꿀 수 있어요.”
“…….”
“위험하겠지요. 허나 지금 모두가 모여 맞서지 않는다면 훗날엔 맞설 기회조차 없을 것입니다.”
명진의 읍소에도 불구하고 백연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은 움직여선 안 돼.”
“사숙…….”
“지금은 복지부동하며 때를 기다려야 해, 명진.”
백연은 유순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한번 결심을 하면 절대로 번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명진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사숙, 저는 사숙이 용맹한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간의 사람들은……. 무림맹이 황실의 위협에 겨뤄 보지도 않고 꼬리를 말고 도망친 개처럼 패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괜찮다. 욕을 좀 먹을 수도 있지.”
“사숙…….”
“어찌 생각하면 겨우 무공만 내놓으면 끝나는 문제다. 그깟 무공이 뭐라고. 천년 역사의 무공이 있다 한들 제자 한 명의 목숨보다 중할까. 명진. 난 미리 모든 걸 내려놓고 싸움을 피한 당문이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명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렇습니까.”
“풍진 강호의 무림인이라고 해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황실의 신민이야. 그동안은 부정부패를 타도한다는 명목 아래 황실이 눈을 감아 줬지만……. 황실에서 마음을 바꿨다면, 거기까지인 것이지.”
“…….”
“싸우면 역적, 포기하면 겁쟁이라니. 참으로 비겁하군.”
백연은 뒷짐을 진 채 먼 산을 바라봤다.
그의 등에서 감도는 억눌린 분노와 애수를 느끼니, 명진은 자신의 가슴도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사숙도 사실은 싸우고 싶으셨구나.’
명진은 백연의 뼈아픈 결정을 이해했다.
“무당은 어차피 황실에 무공을 내놓았었지?”
“그렇습니다. 소림과 무당은 무산학관에 이미 절반 가까이 무공을 제공했지요.”
“당문에 이야기한 것처럼 황실에서 무당에 교관을 내놓으라고 하면? 누구를 보내는 게 좋다고 생각해?”
“장로님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많긴 합니다만……. 젊은 층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게 중론입니다.”
“젊은 층? 무당에서? 명진이 직접 가서야 안 될 테고, 그럼 그다음 항렬은…… 쌍둥이인가?”
“예. 워낙 잘하니까……. 유력하긴 합니다. 장로들이 무당파 밖으로 보내기 싫어해서 아직 결정된 건 아니지만요.”
“그런가.”
백연은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명진. 맹의 모든 이들에게 전해 줘. 무림맹은 이번 사태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우리가 살아가는 대명제국에 순순히 무공을 제공하고 환난을 피하길 바란다고 말이야.”
“…….”
“거짓말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내 인장도 쾅, 찍어 주고.”
백연의 서글서글한 태도에 명진은 한숨밖에 나오질 않았다.
“예.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예전에 화산의 오매검협, 육모담 그 친구랑 함께 싸운 적이 있었지? 북천맹 때였나?”
“맞습니다. 무쌍귀에게 사절단으로 갔을 때의 일이지요.”
“무쌍귀…….”
백연은 과거를 떠올리며 그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면 객주님이 계셨군. 요즘은 어찌 지내시려나. 지금도 그 마을에 계실까?”
“예? 사숙,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그 친구 말인데. 싸움을 앞두고 성격이 어땠지? 성격이 좀 급하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사람이 원래 호전적인가?”
“오매검협은…….”
명진은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나이가 들었으니, 많이 나아졌을 겁니다.”
“하핫, 그래? 예전엔 호전적이었다는 거군? 사람이 원래 무모한 편이었어?”
“무쌍귀의 실력을 믿지 못하고 싸울 듯이 덤벼들기도 했었지요.”
“제정신이 아니군.”
백연은 단호하게 평가를 내렸다.
“그분을 직접 보고도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든단 말인가?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데?”
“예. 무모해 보입니다만, 어찌 보면 용맹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그 때는 무쌍귀의 진정한 실력을 몰랐지만요.”
“……편을 들어주는 걸 보니 똑같은 마음이었나 보구만.”
명진은 얼굴이 붉어진 채 헛기침을 했다.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았지요. 나중에 그분의 무공을 직접 보고 난 뒤에는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만.”
“그래도 반성을 했다니 다행이다.”
“누구나 다 그런 시절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는 사숙은 어땠습니까? 사숙도 무쌍귀와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난 처음 봤을 때부터 그분의 실력을 곧바로 알아보고 다투지 않았어.”
백연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놀리는 듯한 웃음이었다.
명진은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도호를 읊어야 했다.
“무량수불. 어쨌거나 육모담 그 친구는…… 성격은 좀 호전적이지만, 무공은 의심할 필요 없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최근엔 못 봤으나 더욱 강해졌겠지요.”
“그분에게 대들던 어린 친구가 이제는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는 매화검수의 수장인가…….”
백연은 잠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 멀리, 섬서성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
“마속처럼 말을 듣지 않을까 걱정이십니까?”
백연은 침묵을 지키며 묵묵히 먼 땅을 바라보았다. 그의 걱정은 화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
“하여, 무림맹은 나서지 않겠다는 연락이 도착했습니다. 지나가는 비를 피하듯, 잠시 몸을 숨기고 황실의 일에 협력하여 환난을 피하라고 합니다.”
섬서성 화음현.
오악 중 서악(西岳)이라 불리는 대륙의 명산이자, 도교의 성지인 연화봉에는 오랜만에 화산파의 행보를 결정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곽청을 시작으로 태상 장로이자 화산파의 최고수인 매화신검 악중광. 화산파의 대제자이자 매화검수들의 수장인 오매검협 육모담까지.
그들 모두가 모인 상청궁에서는 한참 동안이나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방금 전에 매화당주 유협이 전달해 준 무림맹의 전서를 몇 번이나 곱씹어야 했던 탓이다.
“후우.”
그러다 가장 먼저 폭발한 것은 육모담이었다.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분을 참지 못하며 외쳤다.
“무림맹주라는 자가! 싸움을 피하고 숨으라고만 하다니! 맹주령을 내려서 모든 무인들을 집결시켜도 모자랄 판국에! 어찌 자기만 살자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런 글을 보내는가!”
육모담은 장문인 곽청을 향해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장문인, 무림맹이 나서지 않는다면 저희가 힘을 모아야 합니다. 이대로 당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모담아. 신중해야 한다. 화산의 명운이 걸린 일이다. 함부로 결정해선 안 될 터.”
화산파 장문인인 곽청은 노쇠하긴 하였으나 화산 무인 특유의 고고한 절개가 있는 사람이었다.
말로는 신중하자고 하며 선인처럼 수염을 쓰다듬고 있긴 하나, 주름진 얼굴엔 참아내지 못한 분노가 한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저희는 천하제일 검문 화산입니다. 관병 오백 명이 왔다고 해서 순순히 저희의 절학들을 모두 건네준다면 강호의 동도들이 모두 비웃을 겁니다. 사천 당문처럼 화산파도 순 겁쟁이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육모담은 당장 누군가가 그리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분노에 차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 꼴을 볼 수는 없지요. 저희는 맞서 싸워야 합니다.”
“허나 상대는 황실의 병력이다. 역모로 몰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느냐.”
곽청의 걱정은 타당해 보였다. 육모담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영락제 때처럼 무시무시하고 강력한 황제가 아닙니다. 무림 강호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그들에겐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끝까지 싸워서 죽이자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한 번 저희의 결의라도 보여 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육모담은 다혈질인 성격이었으나, 단순히 감정만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었다.
곽청 장문인은 곧바로 그 뜻을 알아듣고 눈빛을 번뜩였다.
“즉, 무공을 내줄 때 내주더라도, 일단은 힘을 보여 주며 만만히 보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군.”
“바로 그것입니다. 어쩌면 내줘야 하는 무공도 협상으로 줄일 수가 있겠지요. 중요한 건 저희 화산의 결기를 보여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흐음.”
“부당한 황실의 탄압에 반대한다는 명분도 있습니다. 무림맹이 해야 할 일입니다만……. 안 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어찌 생각하면 우리 화산의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무림맹이 이번 행동으로 무림인들의 지탄을 받고 발언권이 약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난세와 같다.
지금 먼저 나서서 행동하는 자가 사람의 인심을 얻는 것이다.
“그런가. 우리가 먼저 나설 필요가 있겠군.”
솔깃한 듯 보이는 곽청을 보며 육모담은 흡족한 듯 웃었다.
역시 장문인과 자신은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하며 전의를 다지려던 그 때였다.
“똑같은 마음으로 나섰던 파불신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매화신검 악중광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