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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객잔 2부-157화 (286/686)

7권 7화

제21장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7)

“태상장로님.”

칼날 같은 화산의 산세를 닮았기에, 화산파의 계율은 다른 문파보다 엄격했다.

육모담은 태상장로인 악중광의 말을 감히 맞받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신검의 말씀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파불신니는 강했다. 아미파의 무공을 대부분 대성한 뛰어난 인재였지. 운이 없었다거나, 들리는 것처럼 산공독에 당했다거나 그런 사소한 이유로 당할 사람이 아니었어. 그가 당했다면 그럴 만한 천명이 있었기 때문일 터.”

인간의 감정을 반쯤은 잃어버린 반선(半仙)이 보는 광경은 어떤 것일까.

악중광은 마치 천명을 헤아리듯 시선을 먼 곳으로 향했다.

“화산 또한 강하다. 허나 오만하지 말라. 화산의 천명은 여기서 갈라진다.”

그리 크지 않으면서도 귓속에 꽂히는 목소리. 준엄한 충고가 모두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곽청의 안색이 바뀌었다.

“사숙님 말씀은 여기서 우리의 운명이 갈린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하다.”

화산의 운명을 논하는 자.

무림오존과 같은 경지에 올라 하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 바로 악중광이다.

“으음…….”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곽청은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저잣거리의 점술과 다를 바 없을 만큼 두루뭉술하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반선의 경지에 오른 매화신검이니 안 믿을 수도 없는 일.

곽청은 불만스러운 내심을 꾹 눌러 참고 공손히 되물었다.

“어떤 것이 보이시는지 여쭙고 싶지만……. 가르쳐 주지 않으시겠지요?”

“…….”

“예. 저희가 고민해 보겠습니다.”

곽청이 신중한 기색을 보이자, 육모담은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신검의 말씀대로 오만해선 안 될 것입니다. 제게 묘안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황실의 군대가 섬서성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는 더 이상 화산만의 싸움이 아닙니다. 작게는 섬서성 무림 문파들의 싸움이요, 크게는 무림인들의 자유를 위한 싸움이지 않습니까?”

“힘을 합치자는 뜻이냐?”

“예. 특히 저희 섬서에는 구파가 한 곳 더 있지 않습니까?”

곽청은 바로 그것이라는 듯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쿵.

“종남을 말하는 것이로구나!”

“예. 지금이야말로 종남과 힘을 합쳐야 할 시간입니다. 장문인.”

“좋은 생각이다. 종남의 벽력검과 태을검객들이 우리와 함께 싸운다면 두려울 게 없겠지.”

“예. 거기에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환관은 종남파도 저희와 뜻을 함께 할 것이라는 걸 꿈에도 생각지 못할 것입니다.”

“성동격서인가?”

“예.”

곽청은 악중광의 의견을 정중하게 물었다.

“신검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악중광은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다가, 눈을 지그시 감고 조용히 침묵에 빠졌다.

“좋을 대로 하라.”

매화신검이 승인하자,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육모담은 종남을 설득시키기 위해 곧바로 산을 내려갔고, 곽청 장문인은 화산에서 무림 문파들의 회합을 열 것임을 천하에 선포했다.

화산의 무인들이 검을 들고 싸움을 준비하자 서악 전체에 예기가 흐르는 듯했다.

소문을 들은 무인들이 하나둘 찾아오고, 화산파가 있는 화음현엔 유례없이 많은 손님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중 절반 정도는 화산파에 힘을 보태겠다며 호기를 부렸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화산이 황실의 군대를 어떻게 상대하는지 크게 궁금해했다.

북적이는 무인들과 호사가들 사이에서 화산의 운명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

햇볕이 화창한 날이었다.

산들거리는 바람 사이로 지저귀는 새소리는 마치 왕진이 오늘 이룰 업적을 축하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왕진은 솜털을 가득 채운 푹신한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이도 모였네요.”

수백 명의 구경꾼들 사이로 화려한 매화 문양으로 장식한 백색 무복을 입은 자들이 서른 명, 그 외에 매화 문양이 없는 백색 무복을 입은 자들 오십 명이 꼿꼿한 자세로 그림같이 서 있었다.

그들의 기도는 출중했다.

매화 문양이 새겨진 청강검을 허리에 차고 있는 고고한 모습에서 말로만 듣던 향긋한 매화 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저들이 화산파의 매화검수와 일대 제자들이고…….”

그 옆을 쳐다보니 이번엔 황갈색 무복을 입고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범상치 않은 노인네와, 그와 닮은 옷을 입은 청년들이 오십 명 모여 있었다.

“저들이 종남 같군요. 어떻게 생각하나요, 선?”

“맞아요, 왕 공공. 제 생각에도 그래요. 화산파는 아닌 것 같은데 분위기가 강해 보여요.”

“후후, 그러네요.”

왕진은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도철?”

“…….”

“도철? 뭘 보고 있나요?”

왕진이 옆을 바라보니 도철은 누군가 한 사람에게 시선이 꽂힌 채 다른 것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왕진은 도철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에서 매화 문양 도복을 멋들어지게 입고, 신선처럼 긴 수염을 지닌 백발의 노도사를 발견했다.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보기 전엔 그 자리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한 번 보고 나니 엄청난 존재감을 지니고 있어서 다른 곳을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후훗, 그렇군요. 벌써 시작되었나요?”

왕진은 잔뜩 긴장한 도철의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잠시 응시했다.

“무림 동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그사이 화산파의 무인들 중에서 가장 출중한 기도를 지닌 청년이 나와 사방을 향해 포권을 취한 뒤 입을 열었다.

“여러분, 내 이름은 육모담이라 합니다! 강호 동도들은 오매검협이라 부르고 있지요. 화산의 매화검을 든 자로서 이 자리에서 한마디를 하고 싶어 앞으로 나섰습니다.”

육모담은 주변 모두에게 양해를 구한 뒤, 왕진을 바라보며 영웅의 기상을 드러냈다.

내공을 끌어 올리자 뿜어지는 기파.

그는 자하신공의 노을빛 기운을 온몸으로 은은히 흩뿌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환관 왕진에게 고한다! 난폭한 병사들을 데리고 나타나 사천에서처럼 혈겁을 일으킨다면 그 누가 순순히 그대의 말을 따르겠는가! 이는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무림인들의 뜻이며, 더 이상 강호 무림의 질서를 망가뜨린다면 그대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섬서는 사천과 다르다. 우린 쉽게 굴복하지 않는다. 분명히 말하겠다. 당신의 방식은 잘못되었다!”

우국지사처럼 진실되고 절절한 외침이었다.

진실이야 어찌됐건, 육모담이 비범한 자라는 것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옳다!”

“옳소! 어찌하여 관이 무림의 일에 관여하는가!”

“관병들은 돌아가서 도적 떼나 잡아라!”

사방에 몰려 있던 무림인들이 육모담의 의견에 동조하며 큰 소리로 외쳐 댔다.

왕진은 섭선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상대가 가만히 당하고 있으면 본래 기세가 점점 오르는 게 사람의 심리 아니던가.

조심스레 한두 마디 내뱉던 사람들이 점점 과격한 발언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당장 황실로 돌아가라!”

“우린 지금의 강호를 원한다!”

“파불신니를 왜 죽였냐!”

“이 살인마!”

험상궂은 비난들이 왕진을 향해 비수처럼 꽂혔다. 군웅들이 입으로 던지는 돌팔매질이 왕진에게 몰아쳤다.

철컹―.

흑시부대 오백여 명이 방패를 들어 올리려는 것을 왕진은 손을 올려 막았다.

왕진은 천천히 섭선을 치우고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조용히, 차분하게.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그 또한 광기에 가깝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에서는 심상치 않은 빛이 번뜩였다.

“어…….”

“으음…….”

왕진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비난이 점차 잦아들다 마침내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면 공포를 느끼는 법.

화산에 모여 있던 모두는 본능적으로 왕진이 그들과는 뭔가가 크게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분위기를 살피던 육모담이 황급히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와 큰 소리로 외쳤다.

“환관 왕진이여! 그대가 바라는 건 무엇이오!”

왕진은 그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화산과 종남, 그리고 우리 섬서성의 모든 무인들은 그대의 요구를 들어 보고 결정을 내리겠소!”

왕진의 반응이 그의 예상과 크게 다르자 육모담은 초조한 기색이었다.

수백 명의 군웅들에게 비난을 들으면 보통 화를 내거나, 겁을 먹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할 텐데.

도리어 즐거워하다니!

어찌 이런 자가 있단 말인가.

“후훗.”

왕진은 차분하게 섭선을 흔들다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제 좀 조용해졌네요.”

왕진은 섭선으로 손바닥을 탁―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이야기는 잘 들었어요. 결론은 섬서 사람들은 나를 싫어한다는 소리군요. 안타깝네요. 화산파의 검공은 무산학관에서도 인기가 많을 것 같았는데 말이죠.”

왕진은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육모담은 이해가 되질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오?”

“버려야 하니 안타깝다는 소리예요. 하긴, 무당의 무공이 있으니 그렇게 아쉬울 건 없겠죠. 화산은 무당에 밀려 만년 이인자였잖아요?”

“……!”

천하제일 검문을 자부하는 화산에게 무당에게 밀린다는 소리는 역린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화를 내기 전에 육모담은 공포를 느꼈다.

왕진은 일반적인 상대가 아니었다.

이쯤 되면 상대방이 당연히 달래면서 이야기를 잘해 보려 할 것이라는 예상이 전혀 들어맞질 않았다.

‘마치 부숴 버릴 명분을 기다렸다는 듯이……!’

화산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탓에 간과했다.

왕진은 화산의 무공을 ‘포기’할 수도 있음을.

육모담에겐 천고의 보물이나 다름없는 화산의 절학들이 왕진에겐 가져도 그만, 잃어도 그만인 계륵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도철.”

왕진이 호명하자, 도철은 곧바로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철컹!

척, 척.

방패를 들어 올린 오백여 명의 흑시부대가 자세를 낮추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왕진은 섭선으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흑색 섭선 위로 드러난 눈이 다시금 반달을 그리며 웃었다.

“모두 죽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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