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8화
제21장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8)
전참(全斬)!
모두 베어 버리라는 왕진의 가벼운 한마디가 불러온 여파는 컸다.
도철이 수신호를 보내자 오백 명의 흑시부대가 일제히 방패와 화살을 들어 정면을 겨누었다.
흑시부대는 시종일관 차분했다.
그들은 들뜨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마치 나무토막을 보듯 무감각한 눈빛으로 각자 정면에 보이는 ‘표적’의 개수를 셀 뿐이다.
차가운 살기가 장내에 흘렀다.
“뭐……?”
“지금 뭐라고 한 거야……?”
화산파와 종남파, 그리고 주변에 몰려든 군웅들 모두는 그때까지만 해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사람은 본래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기면 순간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법 아니던가.
“다 죽이라고……?”
“이만한 숫자를?”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천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관아의 병사들을 무시하는 마음도 컸다.
사천의 청성과 아미는 그저 산공독으로 기습을 당해서 그런 것일 뿐, 무공이 일천한 관병들 따위가 어찌 무공을 익힌 무림인을 상대하겠나 싶었던 것이다.
헌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고작 오백 명의 관병을 데리고 있는 왕진이,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는지 이 자리의 모두를 죽이라고 외쳤다.
화산파와 종남파가 있는 곳에서.
수백의 군웅들을 상대로 말이다.
“허어, 이런!”
그중에 사태 파악을 가장 먼저 한 것은 화산파의 장문인 곽청이었다.
연륜의 힘이었다. 그는 황급히 나서서 육모담을 불렀다.
“모담! 일이 잘못됐다!”
단 한 마디 말로 장문인과 대제자 사이의 의사가 합일되었다.
육모담의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그들의 반응은 빨랐다.
육모담을 비롯한 매화검수 서른 명이 곧바로 검을 뽑아 드는 것과 미리 준비하고 있던 해독단을 꺼내 입에 집어넣는 것은 불과 한 호흡 만에 모두 이루어졌다.
구파일방.
그중에서도 거파로 유명한 화산파는 확실히 남다른 면모가 있었다.
자세를 낮추는 모습.
곧바로 내공을 끌어 올리고 사방을 경계하는 건 그야말로 준비된 무인의 표본이다.
다른 화산파 일대 제자 오십 명과 종남파 태을검객 오십 명이 그제야 검을 뽑아 드는 것과는 크게 비교가 되었다.
“준비.”
도철이 손을 앞으로 가리켰다.
“던져라.”
퍼퍼펑―.
흑시부대는 허리춤의 가죽 주머니를 집어 던지고, 화살로 주머니를 관통시켰다. 그 안에 있던 백색 가루들이 뿜어져 나왔다. 정면 삼십 장(丈) 범위가 온통 백색 가루에 뒤덮였다.
화산, 종남과 군웅들이 뒤섞인 곳에 산공독이 뿌려진 것이다.
사태는 순식간에 급박하게 흘러갔다.
“콜록! 콜록!”
“산공독이다!”
“숨을 참아라! 도망쳐!”
모여 있던 군웅들이 크게 당황하며 산공독이 퍼진 권역 밖으로 나가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뿌연 연기 속.
육모담을 비롯한 매화검수들은 이 날을 위해 미리 상의해 둔 수신호를 서로 주고받았다.
‘갑옷으로 몸을 감싼다고 해서 두려워할 줄 아는가? 그래 봤자 관병들. 우리는 매화검수다. 무림에서 손꼽히는 검사들이란 말이다.’
육모담은 매화검수 서른 명이 일제히 암향표(暗香飄) 신법을 사용해 몸을 날리는 것을 확인하였다.
뿌연 가루로 시야가 어지러운 가운데에서도 돋보이는 몸놀림이었다.
마치 고고히 피어나 향을 흩뿌리는 매화와 같은 은밀하며 기품 있는 동작.
첨예한 기세를 품고 나아가던 매화검수들은 첫 번째 난관을 마주쳤다.
쒜에엑―.
뿌연 연기 사이로, 관병들이 쏘아낸 검은색 화살들이 허공을 뒤덮으며 일제히 날아왔던 것이다.
“화살이다!”
채챙―.
“으악―!”
검광이 번뜩이고, 수많은 무인들 중 일부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쓰러진 자들 중에 매화검수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에 있었던 어중이떠중이 군웅들만 쓰러졌을 뿐이다.
매화검수들은 날아오는 화살을 모두 검으로 쳐 낸 뒤, 검을 수직으로 꼿꼿이 세운 채 일제히 관병들에게로 날아올랐다.
고고한 향을 흩뿌리는 암향표.
관병들의 커다란 방패를 발로 밟으며 비조(飛鳥)처럼 날아올라, 서른 명의 매화검수가 동시에 아래로 검을 찔러 넣었다.
까강―.
천류신화검(天流神火劍).
화산 전통의 강렬한 검술이 펼쳐졌으나, 어깨 부근의 단단한 갑주에 튕겨져 나왔다.
관병들의 대응은 그들의 생각보다 더욱 신속했다. 관병들은 무인에게는 없는 방패와 갑주, 그리고 숫자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의 공격이 날아오면 두 명이 방패를 내밀었다.
둘이 공격하면 세 명이 방패를 벽처럼 세웠다.
첫 번째 대열의 방어를 분명히 뚫었는데, 뒤쪽 열에 있던 사내들도 단단한 거북이 등껍질처럼 방패를 위로 쳐들어 자신의 몸을 꽁꽁 감쌌다.
“칫.”
“생각보다 단단하다!”
“옆으로 돌아서 들어가! 빈틈을 노려라!”
매화검수들은 가벼운 몸놀림과 절도 있는 검술로 끊임없이 상대방의 빈틈을 노렸다.
팔목, 정강이, 발끝.
방심하기 쉬운 여러 부위를 노렸는데, 의외로 상대 병사들은 빈틈이 별로 없었다.
무공의 고수는 아닐 테지만, 분명히 정형화된 무공을 배운 듯했다. 심지어 극도로 단련되어 움직임 하나하나에 절도가 있었다.
“어디서 이런 자들이……!”
매화검수들은 탄식했다.
고작 관병 서너 명도 뚫어 내지 못하다니.
화산파 매화검수.
무림 제일 검객의 자부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깡!
쩌정―!
쇳덩이와 쇳덩이가 부딪치는 소음과 함께 매화검수와 관병들이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사이에도 후열에 있던 관병들로부터 검은색 화살이 끊임없이 허공을 날았다.
산공독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던 군웅들이 쓰러지는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합!”
육모담은 화산파의 대제자만 배울 수 있는 신공, 자하심법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배 속 단전에서부터 은은하게 끓어오르는 기분.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한 기분이 들며, 육모담의 몸 주변으로 은은한 노을빛이 흘러나왔다.
육모담은 암향표가 아니라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를 사용해 관병들에게로 향했다.
격전이 벌어진 전장.
그에게 오매검협이라는 별호를 붙여 준 극성의 오행매화검(五行梅花劍)은 육모담에게 있어 가장 익숙한 검술이다.
우우웅―.
검이 울었다.
육모담의 입에서도 나직하게 검결이 흘러나왔다.
“천하만물이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을 반복하니, 이는 화수목금토의 오행이라.”
검 끝이 차분하게 안정된다.
첨예한 기세.
노을빛 검기가 검 끝에서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검극매화(劍極梅花), 오행합일(五行合一).”
검 끝에 흐드러지게 핀 매화꽃이 올라앉았으니, 그 안에 천하 만물 오행이 담겨 있다.
툭.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매화 꽃잎처럼.
자유롭고 경쾌한 움직임 끝에 육모담의 검 끝이 흑시부대가 들고 있던 방패에 살포시 닿았다.
그 순간.
쩌엉―.
“컥……!”
커다란 방패가 상부가 우그러지며 땅바닥에 처박혔다.
어찌나 강맹했던지, 방패의 일부는 우그러지다 못해 절반으로 쪼개지기까지 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노려보는 병사의 눈빛이 보였다.
육모담은 마치 춤을 추듯 부드럽게 한 발을 옆으로 빼며 몸을 회전시켰다.
빙글 돌아가는 몸.
자연스럽게 뻗어 낸 검 끝이 이번엔 상대방의 목을 노린다.
“……!”
승부는 한순간.
오행매화검이 상대방의 몸에 닿는 순간 승부는 끝난다.
한데 육모담은 초식을 끝까지 전개할 수가 없었다.
다시 방패를 집어 들고 방어 자세를 취한 상대방의 무공이 생각보다 훌륭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방패가 사라지자 드러난 후열의 모습이 훨씬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심……!”
육모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후열에서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왼손으로 오른손 팔목을 받치고 있던 자들의 손목에서 암기가 튀어나왔다.
피슉―.
그들의 소맷자락 아래에 숨겨 뒀던 암기가 섬전처럼 쏘아졌다.
손가락 세 개만 한 크기의 동그란 원형 철구였다.
쏘아진 철구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날아온다 싶더니, 이내 삼등분으로 갈라지며 허공에서 쪼개져 버렸다.
피슈슉―.
“암기다!”
쪼개지는 것과 동시에 철구 안에서 튀어나온 검은색 바늘들이 매화검수들의 전면을 새카맣게 덮어 버렸다.
육모담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었다.
황급히 구궁반천검(九宮反天劍)으로 전면을 틀어막았다.
검강(劍綱)에 검벽(劍壁).
가진바 능력을 십분 발휘한 뒤에야 검은색 바늘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육모담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날아온 흑침만 해도 백 개가 넘는다. 절정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무인이라면 이걸 검으로 막아 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
‘누가 이런 악랄한 암기를 만들었단 말인가!’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다가 물러난 듯했다.
그는 황급히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적들은 방패를 들고 몸을 낮춰서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에 매화검수들은 달랐다.
기품과 용모를 중시하던 화산파의 검사들.
그들의 영광의 증표였던 매화 문양 비단 무복에는 검은색 바늘들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심지어 그들에겐 쉴 시간조차 없었다.
지금 이 순간도, 화살이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채챙―.
“사제……!”
육모담은 피눈물이 날 것 같은 심정을 이해했다.
“영호!”
가장 아끼던 둘째 사제는 하체에 흑침 수십 개가 박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쿨럭……!”
이미 초점이 사라진 눈.
단순한 침이 아니라 독침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 순식간에 영호의 목과 얼굴에 핏줄이 돋아나더니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의 움직임이 멈추자, 가슴팍에 검은색 화살들이 날아와 잔인하게 틀어박혔다.
“충오……!”
셋째 사제 충오는 다른 곳은 다 막았으나 왼팔에 독침이 박힌 듯했다.
비틀거리며 물러서던 충오는 이를 악물더니 스스로 왼팔을 잘라 냈다.
“컥……!”
고통에 흐느끼는 사제를 보자 육모담은 눈이 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함께 검을 배우고, 식사를 함께하던 사제들이 대부분 피를 토하고 있었다.
매화검수 삼십 명 중, 두 다리로 똑바로 서 있는 사람은 열 명도 채 안 된다. 멀쩡한 건 고작해야 다섯 명뿐이었다.
산공독의 뿌연 연기 속에서, 쇳소리가 들리고 피 냄새가 났다. 마치 전장 한복판에 선 기분이었다.
육모담은 절규했다.
“이놈들……! 가만두지 않으리라!”
그는 분기탱천하여 당장이라도 왕진을 찢어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나 현실은 가혹했다.
눈앞에 있는 오백 명 관병들의 방패와 갑주는 여전히 단단했다.
불과 다섯 명의 관병조차 쉽게 뚫는다 장담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다.
게다가 방패의 뒤에서 음산하게 겨누고 있는 화살과 암기는 여전한 위협이다.
그는 뒤편을 흘깃 바라봤다.
일대 제자 오십 명과 장로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선봉대였던 매화검수들이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놀라서 달려오는 듯했다.
‘계획대로 행동해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계획대로 움직여야 할 터.
육모담은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저 멀리 이 모든 일의 원흉, 왕진을 노려보았다.
섭선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여전히 웃는 얼굴인 가증스러운 환관.
육모담은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자신의 천명(天命)을 느꼈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맑구나. 내 천명이 여기 있음을 알겠다.”
꽉 움켜쥔 청강검에서 매화 꽃잎 같은 검기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