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9화
제21장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9)
내딛는 한 발에 그의 새로운 깨달음이 담긴다.
절정의 암향표.
순식간에 병사들에게 다가간 육모담이 청강검을 부드럽게 휘둘렀다.
임독양맥을 한 바퀴 돌아 손목의 내관혈(內關穴)을 통해 빠져나간 자하진기가 다섯 갈래로 나뉘었다.
화수목금토.
다섯 개의 오행기로 나뉘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하나의 기운이 되어 검 끝에서 단단하게 응축되었다.
우웅―.
검이 몸을 떨었다.
“검극매화(劍極梅花), 오행합일(五行合一).”
넘실넘실. 눈송이처럼 허공을 휘젓던 검이 단단하고 차가운 방패에 살포시 닿았다.
꽈앙―.
잔뜩 응축된 진기가 허공에서 매화꽃을 피워 냈다.
양손으로 방패를 꽉 움켜쥔 채 온몸으로 버티려던 병사가 속절없이 뒤로 날아갔다.
막강한 파괴력.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신기(神技)였다.
철 방패가 움푹 패며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손잡이가 덜렁거렸다.
“큭……!”
“잡아!”
여러 개의 신음이 동시에 들려왔다.
주변의 병사들이 개미처럼 겹겹이 달라붙어 겨우 충격을 이겨 냈다.
“다섯 명이라. 아까보다 많은데.”
육모담은 싸늘하게 웃었다.
아까는 세 명이서 막아 냈는데, 이제는 다섯 명이나 붙어 있었다.
“아까보다 강하다!”
“위험해! 방패를 놓지 마라!”
우르르 뛰쳐나온 병사들이 육모담의 주변을 둘러쌌다.
육모담의 눈빛이 번뜩였다.
천명을 느끼고 목숨을 건 검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는 마치 신들린 듯 검을 휘둘렀다.
피슉―.
날아오는 암기는 옆으로 쳐 내고.
쩌엉―.
사각지대를 노리고 날아오는 칼은 어림없다는 듯이 단박에 후려쳤다.
중간중간에 뻗어 내는 검극마다 오행기 매화가 꽃피우니 그야말로 화산 무공의 정화였다.
꽈앙― 쾅! 쩌엉―.
육모담 한 명의 분투가 흑시부대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처음엔 어떻게든 육모담을 잡아 보려던 병사들이 이제는 기세에서 완전히 밀려 버렸다.
그들은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고 그저 방패 뒤에 몸을 숨긴 채 쏟아지는 공격들을 버티느라 급급했다.
육모담은 진원진기까지 끌어 올리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검을 휘둘렀다.
부릅뜬 눈, 거센 외침에 영웅의 기세가 함께한다.
“모두 검을 들어라! 매화검수! 우린 이길 수 있다!”
오오오―!
함성이 울려 퍼졌다.
대나무처럼 곧은 절개야말로 화산파의 상징이 아니던가.
육모담과 같은 심정이던 매화검수들이 목숨조차 도외시한 채 병사들에게로 달려들었다.
맹호처럼 날뛰는 검사들.
무시무시했던 병사들의 기세가 한 풀 꺾였다.
육모담과 매화검수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천하의 매화검수들이 저렇게 쉽게 쓰러지다니……! 산공독과 암기가 저리도 무섭단 말인가!”
전장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인근의 바위산. 몸을 낮추고 있던 종남의 젊은이들은 탄식하듯 수군거렸다.
종남의 장로이자, 무림 십대고수에 들어가는 벽력검(霹靂劍) 연종태는 그런 제자들에게 싸늘하게 일갈했다.
“조용히 하라.”
연종태는 침중한 안색이었다.
관병과 무림인이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보는 날이 오다니.
육십에 가까운 나이.
험하디험한 무림 강호를 떠돌며 온갖 꼴을 보아 왔다고 자부하는데, 그의 평생을 돌이켜 봐도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신기한 광경이긴 하나, 이 일로 인해 벌어질 후폭풍을 생각하면 절대로 맘이 편할 수가 없었다.
“장문인이 괜찮아야 할 텐데…….”
연종태는 산공독으로 뿌옇게 뒤덮인 전장을 바라보며 그 안에 있을 종남의 장문인 진익현을 떠올렸다.
진익현은 사사로이는 벽력검 연종태의 사제고, 공적으로는 대종남파의 장문인인 사람이었다.
그는 대범한 사람이지만 무공은 자신만큼 뛰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 그의 주변을 지키고 있는 태을검객 오십 명은, 종남파에서 그리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무인들뿐.
“장문인…….”
부디 무사하길 바라는 것밖에 할 수 없다니. 연종태는 속이 쓰렸다.
그리고 속이 쓰린 만큼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환관 왕진이 더욱 원망스러웠다.
“준비하라.”
연종태는 냉혹한 살기를 담아 씹어 뱉듯 명령을 내렸다.
태을검객들의 기세가 순식간에 삼엄해졌다.
종남에서 검 실력으로는 상위 오십 인에 드는 태을검객들이 뾰족한 바위 뒤에 숨어 자신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동격서(聲東擊西). 종남의 제자들아. 섬서의 모든 이들이 나 벽력검과 태을검객의 힘을 믿고 이 작전을 짰다.”
연종태는 주변의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마치 맹수가 엎드려 있는 것 같았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 태을검객들에게선 무서울 정도의 결의가 느껴졌다.
부릅뜬 눈, 집요한 눈빛이 오로지 전장만을 향했다.
“우리를 믿고 장문인께서도 스스로 미끼를 자처하셨다. 산공독으로 뒤덮인 저곳에서 우릴 대신해 시선을 끌고 계시지. 그러니 종남의 제자들아. 우린 어찌해야 하겠나. 목숨으로 믿어 주었으니, 목숨으로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
연종태의 말에 대답은 없었다.
그저 삼엄한 예기가 더욱 피어오를 뿐이다.
“움직인다.”
연종태는 자신도 몸을 낮추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육모담이 얼마나 맹렬하게 날뛰는지, 왕진의 좌우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대형을 바꿔 앞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앞으로 몰리면 몰릴수록 옆의 방어는 허술해졌다.
계획대로였다.
왕진 주변의 병사들을 빼내는 작전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몇 안 되는 인원으로 해내는 모습이 경탄스러울 뿐이다.
“육모담……! 대단하구나. 보보(步步)마다 오행. 내뻗는 검은 오행의 조화를 이룬 매화검. 그대가 차세대 매화신검인가.”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개화하지 못했을 재능이 꽃을 피웠다.
“저 나이에 저 무위(武威)라니. 대단한 인재로다.”
연종태는 육모담이 이런 곳에서 죽지 않기를 기원하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싸움을 준비하란 신호였다. 태을검객들이 진기를 끌어 올리자, 고요했던 바위산이 웅성거리는 듯했다.
“왕진……!”
왕진의 좌우에 정렬해 있던 병사들이 이젠 상당수 빠져나가 텅 비어 보일 지경이었다.
정면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발하는 육모담에게로 모든 병사들의 시선이 쏠려 있었다.
연종태는 때가 왔음을 느꼈다.
“가자!”
연종태의 명령은 준엄했다.
벌 떼처럼 일어난 태을검객들이 화산파의 날카로운 바위산을 밟으며 일제히 날아올랐다.
왕진의 옆을 지키던 병사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적이다!”
“옆에서 온다!”
병사들은 황급히 방패를 들었으나 종남파의 쇄도가 더욱 빨랐다.
기러기의 동작을 닮은 금안공(金雁功)이 펼쳐지며 종남 무인들은 화산의 거친 돌들을 훌쩍 뛰어넘었다.
가장 선두에는 연종태가 있었다.
종남파의 무인들 중 가장 강대한 기파를 흩뿌리는 자.
그는 왕진의 곁에 남은 몇 안 되는 방패병들을 태을신수(太乙神手)로 후려치고, 손목을 잡아끌어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머지는 뒤따라오는 태을검객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었다.
태을신수로 뒤흔들고, 벽운천강수(碧雲天綱手)로 쓰러뜨렸다.
그야말로 추풍낙엽.
벽력검 연종태는 무림 십대고수가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잘 단련된 흑시부대 정병들조차 감히 한 수 이상을 받아 내기가 힘들었다.
“던져라!”
후웅―.
뒤편에서 주머니가 날아왔다.
연종태는 훌쩍 뛰어올라 검 면으로 주머니를 옆으로 쳐서 떨어뜨렸다.
날아오는 화살들은 절반으로 두 동강냈다.
“똑같은 수가 통할 것 같은가!”
연종태는 발로 허공을 딛는 듯한 움직임으로 방패병들을 뛰어넘었다. 사람이 떠받치고 있는 가마 위, 전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에 왕진이 앉아 있었다.
왕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푹신해 보이는 커다란 보료에 앉은 채, 연종태를 발견했음에도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매에선 여전히 본심을 알아챌 수 없었다.
“성동격서라. 꽤나 머리를 썼네요.”
왕진은 태연하게 섭선을 흔들기까지 했다.
시시각각 연종태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뿌리며 다가오는데도, 왕진은 겁을 먹지 않는 듯했다.
마침내 연종태가 왕진의 곁에 다가섰다. 그를 막는 병사는 이제 하나도 없었다.
“무림을 핍박하는 악적이여. 지금 당장 병사들을 물려라.”
스릉―.
연종태의 검이 왕진의 목을 겨누었다.
“종남의 무복. 그 기세. 그대가 종남의 최고수인 벽력검이군요?”
“그렇다.”
“병사들을 물리라니……. 그렇게 하지 않겠다면요?”
연종태는 말없이 왕진의 목에 칼을 갖다 댔다.
날카로운 예기에 스친 왕진의 목덜미에서 핏방울이 살짝 배어 나왔다.
“아야. 따갑네요.”
“더 베이면, 따갑지 않을 것이다.”
왕진은 연종태가 살기를 뿜었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성정이 대단하네요. 내가 미운가요?”
“저곳에 있는 시신들을 보라. 저들은 무림 강호의 미래를 이끌 젊은이들이었다.”
“이해해 주길 기대하진 않지만…… 안타깝네요. 무림을 핍박하다니? 나만큼 무림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다들 나무만 보지 숲을 보지 못해요.”
왕진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병사들을 물릴 수도, 제가 죽어 줄 수도 없어요.”
왕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궁기.”
연종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손목을 뒤집었다.
가마 아래에서 거대한 기운이 솟구치고 있었다.
연종태의 몸은 바짝 긴장하여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마치 맹수를 눈앞에 둔 것처럼 온몸이 경직되었다.
검은색 천으로 온몸을 둘둘 감은 거구의 사내였다.
양손만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드러난 양손이 핏기가 없어 보일 만큼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느껴지는 기세는 무림 십대고수의 아래가 아니다.
놀라운 자.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이놈……!”
연종태는 왕진이 허술하게 옆구리를 드러낸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이런 자를 숨기고 있었으니, 습격 따위가 두렵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