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10화
제21장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10)
“궁기. 빨리 끝내세요. 도철을 도와야 할지도 몰라요.”
궁기라 불린 자는 왕진에게 고개만 살짝 끄덕인 뒤 서서히 연종태에게로 다가왔다.
가까이 오면 올수록 궁기의 몸이 거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키가 구척은 되는 듯한 거대한 육신.
새하얀 양손의 기괴함.
거기에 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무형기의 강대한 압력까지.
‘기괴하구나.’
연종태는 절정의 경지를 초월한 자이기에, 궁기의 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기이한 내력의 뭉치를 느낄 수 있었다.
어딘가 귀기가 서려 있고, 또한 천도(天道)에서 어긋났음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수백 마리의 쥐가 자그마한 동굴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모습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네놈, 도대체 단전에 뭘 품고 있는 것이냐?”
대답은 없었다.
연종태는 상대의 내면을 관조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듯하여, 시선을 돌렸다.
‘기이하지만 강하다. 목숨을 걸어야 할 상대야. 실수했구나! 왕진을 보자마자 죽였어야 했거늘!’
물론 그렇게 하려고 했으면 또 다른 상황이 벌어졌겠지만.
연종태 또한 사람인지라 자꾸만 후회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벽력검이다.”
궁기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에게 스스로 되뇌듯 하는 말이었을까.
철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연종태는 궁기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등 뒤에서 태을검객들과 병사들이 싸움을 시작했다는 것을 기감으로 느꼈다.
우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연종태의 좌수가 은은하게 빛났다.
손가락을 한껏 펼친 형태의 장타(掌打).
종남의 무공으로 이름 높은 오뢰인(五雷印)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우레 소리가 나는 좌수로 자신의 검을 한 번 쓰다듬자 왼손에 머물던 은은한 빛이 검 날로 옮겨 갔다.
빛나는 검으로 정면을 겨누는 연종태.
마치 그 스스로가 한 자루의 검이 된 듯, 섬뜩한 예기가 사방으로 뿜어졌다.
“오라!”
우웅―.
궁기의 거대한 몸이 촛불이 꺼지듯 훅― 하고 사라졌다가 코앞에서 나타났다.
새하얀 손이 연종태의 안면을 붙잡으려 다가왔다.
“흠!”
연종태의 안색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는 명경지수의 마음을 유지하며 반보(半步)를 옆으로 옮겼다.
별반 특출한 동작도 아닌데, 연종태의 몸은 궁기의 북방을 점(占)했다.
빙글 돌아가는 몸.
어느새 그의 검은 궁기의 등 뒤에 머물렀다.
우르릉―.
그가 어깨를 앞으로 쭉 뻗자 우레 소리가 터져 나왔다. 섬전 같은 찌르기가 궁기의 등허리를 노렸다.
북두천강보(北斗天康步)에 이은 태을분광검(太乙分光劍).
그에게 ‘벽력검’이라는 별호를 안겨 준 성명절기 같은 한 수였다.
휘릭―.
“……!”
궁기의 몸이 한 바퀴 회전했다.
왼쪽 팔을 뒤로 돌려서 검을 옆으로 비껴 내는 동작이 놀랍도록 유연했다.
후웅―.
커다랗고 하얀 오른쪽 손이 어느새 연종태가 검을 붙잡고 있는 손목을 노려 왔다.
“흥!”
연종태는 어림없다는 듯이 코웃음 치며 검 끝을 살짝 내렸다가 상단을 향해 휘둘렀다.
또다시 우레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을분광검 제이 초식이 궁기의 손목을 베어 버렸다.
쩌저적―.
“허어……?”
한데 베어 버렸다고 생각한 궁기의 손목은 멀쩡했다.
오히려 연종태의 검 끝이 살얼음이 끼면서 얼어붙었다.
“극음진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연종태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궁기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 빠르지도, 그리 강맹하지도 않은 듯한데 움직임 하나하나가 묘하게 치명적이었다.
쩡! 쩌정!
쿵!
연종태의 쾌검과, 궁기의 느긋한 수공(手功)이 맞물리며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초식의 정교함은 연종태가 압도적이지만, 초식에 실린 힘의 크기는 궁기가 더욱 강했다.
그렇게 서로 오십 초 정도를 겨루었다.
상대방의 내심을 읽는 것 또한 무공이건만, 상대방이 검은 천으로 얼굴 끝까지 가린 괴인이니. 내심을 짐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치열한 수 싸움 끝에 오십 초를 더 겨루어 백 초가 되자, 먼저 초조해진 것은 연종태였다.
“이놈……!”
무림 십대고수의 위치에 오른 후, 지금껏 이렇게나 그를 애먹인 상대가 있었던가.
게다가 주변의 상황이 점점 더 그를 압박했다.
충천하는 기세로 솟구치던 매화검수들의 패기가 점점 수그러들고 있었다.
옆에서 함께 돌입한 태을검객 오십 인도 백여 명의 방패병에 둘러싸인 채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시간이 없다.’
연종태는 모험을 해야 할 순간임을 깨달았다.
스릉―.
주인의 마음을 느낀 것일까.
연종태의 검이 스스로 떨리며 검명을 냈다.
아직 검은색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미염(美髥)이 검명에 따라 흔들렸다.
배 속에서 끓어오른 태을신공(太乙神功)의 힘이 그의 전신에 퍼져 초인적인 힘을 주었다.
우르릉―.
거센 우레 소리와 함께 전신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고, 들고 있던 검 날이 안 보일 만큼 단단한 검강을 형성했다.
“흠!”
팔괘에 중앙을 합하니 구궁(九宮)이라.
“구궁신행(九宮神行)!”
쭉 뻗은 검극이 궁기의 중단을 향했다.
충천하는 살기.
연종태의 두 눈이 번뜩이는 순간, 여덟 개의 참격이 궁기의 팔방을 포위하며 일제히 내리꽂혔다.
쩌저정―.
푸확!
처음으로 궁기가 다급한 움직임을 보였다.
순백색 양손으로 좌우를 동시에 막아 보려 했으나, 그뿐이다.
극음진기가 실린 손으로 고작 두 개의 참격만을 막았을 뿐.
나머지 여섯 개의 참격이 궁기의 전신을 저미듯이 베어 냈다.
막강한 기파에 휩쓸려, 궁기가 두르고 있던 흑색천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백사(白蛇)처럼 하얀 피부가 드러나며 쩍, 하니 갈라져 깊은 상처가 새겨졌다.
양쪽 어깨, 양쪽 허벅지. 고간과 이마 부근이 쪼개졌다.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상세였는데, 기이하게도 상처에서 피가 흐르지 않았다.
허나 그걸로 끝이 아니다.
우웅―.
쒸이익―!
구궁신행검의 핵심은 중단에 있다.
팔방을 공격하던 힘을 다 합친 것처럼 강대한 기운이 모여, 일격필살의 찌르기를 궁기에게 향했다.
궁기가 칼날을 붙잡으려 했으나 무시하고 찔러 넣었다.
퍽― 하고, 고기를 꿰뚫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궁기의 가슴에 연종태의 청강검이 깊숙이 박혀들었다.
승리.
일격필살의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 공격했던 연종태의 승리였다.
“후우……!”
연종태의 전신에 머물던 태을신기와 오뢰인의 기운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궁기는 제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찢기고 뜯어진 흑색 천 사이로, 색깔이 없는 노란색 머리카락과 푸른빛 눈동자가 보였다.
초점 없이 혼탁한 눈동자가 연종태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오랑캐였더냐.”
금발에 청안.
북방 서역의 인종으로 보였다.
“괴이하지만 강했다, 궁기.”
연종태는 검을 뽑으려 했으나 이상하게도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흠?”
의아함을 느낀 것도 잠시, 검을 잡고 있던 연종태의 손에서부터 거대한 극음진기가 밀려들었다.
“흡!”
청강검 검 날에 허옇게 서리가 내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검을 잡고 있던 연종태의 팔까지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이놈……!”
어찌하여 가슴이 꿰뚫리고도 극음진기를 내뿜는단 말인가?
연종태는 재빠르게 반응했다.
우르릉―.
순식간에 치솟는 태을신기.
우레 소리와 함께 오뢰인의 기운이 전신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허나, 한 팔이 묶여 있는 상황은 컸다.
심지어 궁기는 커다란 양손을 뻗어 연종태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가슴팍에 검을 꽂은 채로 말이다.
“늙은이. 아프다. 귀찮, 지만.”
더듬더듬.
어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초점이 없는 푸른색 눈동자,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모습이 기괴했다.
“이게. 빠르다.”
쩌저적―.
연종태는 어깨부터 얼어붙기 시작했다.
화악― 치솟는 기파, 태을신기를 뿜어내며 저항했으나 직접 몸을 맞대고 흘러들어오는 궁기의 극음진기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대했다.
“이놈……!”
연종태는 치열하게 저항했다.
아직 얼어붙지 않은 왼손으로 오뢰인 장타를 궁기의 몸통에 몇 발이나 꽂아 넣었으나, 궁기는 철로 만들어진 철 나한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궁기가 입을 쩍 벌렸다.
초점 없는 눈동자, 암혈(暗穴)처럼 뻥 뚫린 목구멍은 끝없이 깊어 보였다.
“아귀로구나.”
연종태는 무간지옥의 영원히 굶주리는 아귀를 떠올렸다.
지니고 있는 극음진기가 이렇게나 강대한데, 궁기의 영혼은 어찌하여 이리도 텅 비어 보이는가.
연종태의 양팔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육신.
온전히 움직일 수 있는 곳은 머리뿐인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태을신기를 뿜어내며 끝없이 저항하던 연종태는 궁기의 단전에 자리 잡은, 혼백을 빨아들이는 주술적인 무언가를 알아챘다.
종남파는 전진도교의 영향을 받은 문파였다.
이제는 완전히 속가 문파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들은 풍월은 있어 어린 시절 배웠던 도경의 한 구절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사바하…….”
끝까지 전의를 잃지 않은 연종태.
그의 눈앞으로 거대한 암혈이 다가왔다.
***
쿵―.
실낱처럼 힘겹게 이어진 진기가 허공에서 매화꽃을 그려 냈다.
폭발하는 오행기.
주변을 개미 떼처럼 둘러싼 병사를 또 한 명 튕겨 냈다.
숨소리가 격렬했다.
양팔과 다리가 미약하게 경련했다.
누가 봐도 지친 듯 보이지만, 아무도 그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않았다.
오매검협 육모담.
스스로 화산의 정기를 보여 주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이제껏 보여 준 신위가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재밌네. 너.”
비틀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삐딱한 몸짓, 반항적인 눈빛.
머리카락을 지저분해 보이도록 아무렇게나 방치한 청년이 육모담의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냐?”
“나? 도철. 여기 흑시부대 대장이야.”
도철은 지극히 가벼워 보이지만 전신에서 위험한 분위기를 풍긴다.
육모담은 지쳤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맑은 눈빛으로 도철을 응시했다.
“도철……? 산해경의……?”
“알고 있네? 그래. 그 사흉의 짐승. 도철이다.”
도철은 짐승처럼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제 슬슬 비켜. 너 하나 때문에 흑시부대가 삼십 명이나 쓰러졌잖아.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시간이 지체된 것만 해도 우리한테 큰 손실이라고.”
육모담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비키지…… 않는다.”
“아니, 넌 비켜야 해.”
도철은 육모담을 보지 않았다.
육모담의 등 뒤.
신선처럼 나타나 조용히 서 있는 노인을 노려볼 뿐이었다.
“이제 결판을 내야 하거든.”
철컹―.
짐승의 발톱처럼 양손에 착용한 철조가 위험한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