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161화 (290/686)

7권 11화

제21장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11)

“물러나거라.”

매화신검 악중광.

그는 백발의 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렸고, 새하얀 수염을 배꼽까지 늘어뜨린 신선 같은 풍모를 지녔다.

무림 강호에서 악중광의 위치는 가볍지 않다.

악중광은 화산파 장문인보다 한 배분이 높으며, 무당파의 개파 조사인 삼봉 진인을 직접 만나 보기까지 했다.

무림인들이 매화신검을 만나면 대부분 존경의 뜻을 담아 ‘노사(老師)’라고 부른다.

일면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강호 무림의 큰 스승처럼 대하는 것이다.

“신검께서 어째서……?”

육모담은 크게 당황하였다.

황급히 예를 갖추기는 하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왜……?”

그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계획대로라면 매화신검은 왕진의 목을 베어야 할 사람인데, 어찌하여 그의 뒤에서 나타난단 말인가?

“의미가 없다.”

“제가 불민하여 신검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너도 지쳤구나. 이만하면 되었다. 충분해.”

“예……?”

매화신검은 그를 다독이는 말투였다.

그게 육모담에게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어디 매화신검이 따뜻한 말을 건네는 사람이었던가?

너무나 무정해서 화산파 제자들끼리는 이미 마음만큼은 속세를 떠나 신선이 되어 버린 게 아닌가 말하곤 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위로를 해 준다.

어째서?

천명을 읽는 그 눈으로 무엇을 보았기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머릿속이 아찔했다.

육모담의 몸이 휘청 흔들렸다.

“육 사형을 부축해 드려라!”

황급히 다가오려는 화산 제자들을 악중광이 손을 들어 올려 막았다.

“잠깐.”

그는 지그시 육모담을 응시하다가, 주름진 손으로 육모담의 명문혈 근처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리 높은 경지에 올라도 그는 같은 뿌리를 지닌 화산의 무인.

화산에서 나고, 화산에서 자랐으니 그들의 천명은 차갑고 고고한 화산에 뿌리박혀 떠날 수 없는 운명이다.

악중광이 명문혈을 통해 전해 준 자하신공의 기(氣)는 가뭄이 든 것처럼 말라 있던 육모담의 단전에 단비를 내려 주었다.

“……!”

깜짝 놀란 육모담이 화산의 진기도인법에 따라 황급히 내공을 운용했다.

전장이라 참았을 뿐,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기고 싶었다.

매화신검은 장강처럼 거대한 진기에서 고작 한 됫박을 퍼 주었을 뿐일 텐데, 그 한 됫박의 힘과 양이 상상을 초월했다.

육모담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숨소리가 편안해지고 손발의 감각이 평상시처럼 되돌아왔다.

매화신검의 진기가 육모담의 말라붙은 단전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대체 왜……?”

악중광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명문혈에서 손을 떼어 내면서 입술을 살짝 달싹였을 뿐이다.

전음입밀.

그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말이 육모담의 머릿속에만 들려왔다.

“예……?”

육모담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되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악중광은 말없이 육모담의 어깨를 한 번 툭― 하고 두드리는 것이 끝이었다.

“화산의 제자들이여.”

악중광의 목소리는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수백 명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뒤로 물러서라. 이만하면 되었다. 화산의 기개는 충분히 보여 주었구나.”

살아남은 화산의 제자들이 포권을 취하며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감히 누구의 명이라고 거역하겠느냐는 듯한 태도였다.

싸움은 갑작스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주변의 모습은 처참했다.

깨지고 부서지고, 선혈이 낭자했다.

피범벅이 된 채 검을 휘두르던 무인들이 숨을 씩씩거리면서도 싸움을 멈췄다.

흑시부대 병사들도 방패를 들고 견제만 할 뿐 공격하지 않았다.

매화신검이 가진 존재감.

그의 목소리로 이뤄 낸 고요함 위에서 그는 도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스스로를 사흉의 짐승이라 부른 자. 네게 묻겠다. 어째서 파불(破佛)이 거기에 있는가?”

나직하면서도 통렬한 지적이었다.

도철이 인상을 찌푸렸다.

“뭔 소리야?”

“아미파의 파불신니. 그녀가 어찌하여 네게 있는가.”

“아아……!”

도철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게 보이는구나? 괴물 같은 노인네. 무림오존이랑 같은 급이라더니. 진짜인가 보네.”

도철은 승부욕에 불타올랐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싸우고 싶어 하는 것이 도철의 본능이다.

그는 당장이라도 매화신검을 물어뜯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했다.

“산공독이나 암기 따위에 당할 파불이 아니었다. 그녀가 있었음에도 아미파가 당했다기에 그럴 만한 천명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녀는 네 안에 있군. 천도에 어긋난 채로. 그게 죄라는 걸 너는 알고는 있는가?”

악중광의 시선은 도철을 보고 있으나, 또한 도철이 아닌 먼 곳의 무언가를 바라보듯 초점이 멀어 보였다.

반선(半仙)의 경지에 올라 천명(天命)을 헤아리는 자.

악중광의 식견은 그만큼이나 날카롭다.

“후하하핫! 천도? 천도오?”

도철은 크게 비웃었다.

“천도 같은 소리하네. 하늘의 뜻이 사람한테 무슨 소용 있어? 사바세계에는 사바세계의 법칙이 있는 것 아니겠어?”

도철은 크게 웃으며 양손에 낀 철조를 철컹거렸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섬뜩할 만큼 잘 갈린 칼날이 살기를 담아 번뜩였다.

“파불신니를 물었지? 맞아. 여기에 있어. 그 비구니는 강한 노파였어. 여기 보여? 이 흉터들?”

도철은 길고 날카로운 쇠 손톱으로 자신이 입고 있던 무복을 열어젖혔다.

잘 단련된 육신 위로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두 개.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십(十)자 모양의 흉터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보였다.

“죽을 뻔했어. 하지만 결국 내가 물어뜯었지. 내가 잡아먹은 거야. 사흉의 짐승. 도철이 아미파를 잡아먹었다고.”

도철은 붉은색 혀로 입술을 한 번 핥은 뒤 양팔을 옆으로 벌렸다.

쫙 펼친 양손.

열 개의 철조 칼날들이 위협적으로 빛을 반사했다.

“그러니 노친네. 댁도 마찬가지야. 잔소리 말고 덤벼. 오래 살았으니 미련은 없겠지만. 그래도 최후에 멋지게 가야 하지 않겠어?”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말투였다.

무도(無道)하기 짝이 없다.

육모담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화산파의 검객들이 모두가 모욕이라도 당한 심정으로 눈을 부릅뜨며 분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악중광은 거기서 대범한 반응을 선보였다.

그깟 도발 따위 우습다는 듯, 이번엔 시선을 돌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는 왕진을 바라봤다.

“환관 왕진이여. 그대는…… 천도에 어긋났다. 이번에 어긋난 인연은 후에 화가 되어 돌아올 터. 감당할 수 있겠느냐?”

푹신한 보료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던 왕진이 웃으며 답했다.

“천도에 어긋났는지는 하늘이 정하는 것이에요.”

“그런가. 네게 설교할 생각은 없다. 하나 더 묻겠다. 그렇다면 너는 왜 이런 짓을 벌이는가?”

“이유라…….”

왕진은 이 대화에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섭선을 살랑이며 잠시 생각에 잠긴 그에게서 즐거움이 느껴졌다.

“그게 나라와 무림 강호에 이득이 되기에.”

“이득? 그래서 스스로 나서서 피를 뒤집어쓰는가.”

“그게 제 천명이라면 천명이겠죠?”

빙긋 웃는 왕진에게선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다.

꽤나 먼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나 서로 물러서지 않았다.

왕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로, 주변의 무림 군웅들을 쭉 내려다보았다.

“애초에…… 무림 문파들은 너무 욕심을 부렸어요. 심산유곡에서 무공이나 가르치면 될 것을. 속세에서 힘을 기르고 오만해져서 관리를 습격하다니. 오늘 우리 병사들을 보고 알았겠지만 그대들은 무력 집단이 아닙니다. 나약해요. 전쟁이 벌어지면 그대들은 한 줌의 절정 고수를 기르기 위한 학당에 불과하죠.”

“화산의 무인은 강하다.”

“그렇겠지요. 그래서 지금의 결과가 어떻던가요?”

“……”

“황실의 군력은 강력합니다. 슬슬 무림인들도 그걸 실감했으면 좋겠네요.”

악중광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가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다 싶더니, 어느새 그의 손에는 검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중간 동작이 전혀 보이지 않는 신묘한 발검이다.

새하얀 검병. 파르라니 빛나는 검 날에는 빗살무늬 혈조와 소박한 매화 한 송이가 새겨진 아름다운 검이었다.

“지난 일백 년의 세월. 나는 화산의 넓은 품에 안겨 검을 익혔고, 이곳에서 먹고, 자고, 숨 쉬며 살아왔다. 평생을 화산의 자긍심을 위해 살았으며, 이제껏 그 삶에 한 점 부끄럼이 없었다. 내가…….”

악중광의 매화검이 하늘을 겨누었다.

천천히 내려온 검극이 마침내 정면의 도철과 병사들을 겨누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압도당했다.

“내가. 화산의 검이다.”

고오오오―.

피부로 느껴지는 듯한 막강한 기파.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기암괴석처럼 고고한 존재감이 도철과 흑시부대를 짓눌렀다.

백발, 백염, 신선 같은 용모.

거기에 압도적인 무형기가 합쳐지니 그야말로 검선(劍仙)이 따로 없었다.

“후하하핫!”

도철은 웃었다.

광기 어린 모습으로,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지금까지 중에 최고잖아?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도철은 왕진의 허락을 구하기 위해 돌아봤다.

왕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악중광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화산의 검이라……. 도철.”

촤르릉―.

도철의 손에서 철조들이 섬뜩한 소리를 냈다.

“부러뜨리세요.”

왕진의 허가가 떨어지는 순간, 도철은 사냥개처럼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그를 향해, 매화검신의 일격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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